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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태양이 걷는 순례길
작가 : 에스뗄
작품등록일 : 2017.6.18

인생이라는 고달픈 순례길에서 맞닥뜨린 뜨거운 태양 하나.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그믐달 진해연과 그녀를 쫓는 태양 문도준. 과연 태양과 달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050. 나비가 앉은 자리(3)
작성일 : 17-07-15 23:46     조회 : 357     추천 : 1     분량 : 4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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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작은 방에 약통을 두고 나온 내 눈에 소파에 길게 누워있는 밀가루가 들어왔다.

  제집 소파에 누운 것처럼 전혀 위화감이 없는 그는 아예 잠이라도 자고 갈 태세였다.

 

 "아, 피곤해."

 "그럼 얼른 집에 가서 자요."

 "지금 가면 내일 기사 1면에 날 거예요."

 "어째서?"

 "졸음운전 하기 딱 좋은 상태거든요."

 

  어이구, 핑계도 좋다. 그럼 성진 씨를 부르면 되잖아. 매니저가 괜히 있어?

  한심하단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는 나를 향해 붉은 혀를 쏙 내민 밀가루는 팔로 머리를 받치고 인어공주 자세를 취했다.

  이 세상의 모든 여자는 다 넘어오라는 듯, 날렵한 선을 강조하는 요염한 자태로 누운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당당하고 매혹적이다.

  탁탁, 그가 제 머리 위쪽의 자리를 가볍게 쳤다.

 

 "응?"

 

  탁탁, 다시 한 번 소파를 치며 필요 이상으로 붉은 입술을 매끈하게 말아 올린 그가 무언의 압박을 보내온다. 그런 자세로 그렇게 웃지 말란 말이야.

  대체 뭘 어쩌려고 저러나 싶다. 이미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터득한 나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곧바로 무겁지 않은 적당한 무게감이 허벅지에 여실히 느껴졌다. 밀가루가 잽싸게 내 무릎 위에 제 머리를 얹은 것이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소원 9번. 상대방 무릎 베고 자보기."

 "그래서 지금, 여기서, 이 상태로 자겠다고?"

 "딱 30분만."

 

  소원 9번? 무릎 베고 자는 것도 있었어?

  원래 얼토당토않은 내용이 가득하긴 했지만, 이 인간은 진짜로 그것들을 다 할 작정이야?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하도 기가 차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예쁜 곡선 그리는 하얀 이마를 꾹꾹 찍어눌렀다.

 

 "나 집에 가야 하거든요, 아저씨?"

 "음, 몰라요. 아까 머리도 같이 맞았는지 띵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

 

  제 이마를 쿡쿡 찌르는 손가락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감아올린 그는 얽힌 두 개의 손으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나 참, 이 남자의 뇌구조가 심히 궁금하다.

  한참이나 장난을 치던 그의 동작이 갑자기 뚝 멈췄다.

  이윽고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처럼 그의 초점이 흐려지고, 잠에 취한 사람처럼 잠긴 목소리로 추억에 취해갔다.

 

 "어렸을 때, 잠이 안 오는 날엔 우리 할머니 무릎을 베곤 했어요."

 "그래서요?"

 "할머니가 머리를 이렇게, 이렇게 쓰다듬어주면 신기하게도 잠이 솔솔 오더라고요."

 

  밀가루에게 잡힌 손이 그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살며시 얽힌 손가락 사이로 보드라운 검은 머리카락이 사르륵, 기분 좋게 흘러내렸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그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는 또다시 아련한 추억에 잠겼다.

 

 "할머니한테 학교에서 있던 얘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었는데. 선생님께 칭찬받은 얘기, 친구랑 싸운 얘기, 이것저것 다 말했던 것 같네."

 "그래서 지금 나보고 할머니가 되라는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우리 문도준 어린이, 오늘은 방송국에서 뭐 하고 놀았어요?"

 

  나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그의 할머니가 그러하셨듯,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물었다.

  예상치 못한 나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뜬 그가 곧 눈가를 예쁘게 접으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잠시 뒤, 그의 무심한 눈길이 나를 지나쳐 천장을 응시했다. 하지만 결코 무심하지 않은, 어쩌면 절대로 무심할 수 없는 마음이 그의 눈에 맺혔다.

 

 "오늘은, 조금 슬픈 일이 있었어요."

 "슬픈 일?"

 "사실 슬프다기보다는 시원하고, 쓰라리고, 또 허전하고 그랬네요."

 "어려운 일이었나 봐요."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어요."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손가락 하나만으로 해낸다 하더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힘든 일.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비웃더라도, 적어도 나는 입술 끝을 들어 올리기 조차 힘든 일.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있다. 각자 다르긴 하지만,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해요."

 "아무튼, 여러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바람에 조금 전까지 여기가 체한 것처럼 꽉 막혀 있었거든요."

 

  그가 맞잡고 있던 두 개의 손을 가슴에 가져가 댔다. 단단한 가슴팍 아래에서 시작되는 두근두근, 작은 울림이 묵직하게 닿았다.

  손바닥을 타고 건너오는 심장박동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마치 처음부터 나의 것이었던 것처럼.

 

 "그런데 해연 씨를 보니 체기가 슉, 내려갔어요."

 "......"

 "정말 신기하게, 마법같이."

 

  그는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가슴에 가져다 댄 나의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자신의 손가락을 채워 넣었다.

  살포시 접히는 그의 예쁜 눈가가 내 눈에는 왜 이리 시려 보이는지.

  기분 좋은 손길과 반듯하게 올라간 입모양과는 반대로 그의 눈은 '나 지금 아프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법이란 게 정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만은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리고 허전한 당신의 마음도 따스하게 마법으로 채워줄 수 있다면 좋겠어.

 

 "정말 괜찮은 거예요?"

 

  걱정을 삼키며 무심한 척 묻는 나의 질문에 그는 대답 대신 한층 깊어진 검은 눈을 맞춰왔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열린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나 두고 가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따지고 보면 도준 씨가 온 거죠. 내가 한 일은 그저 작업실 문을 열어준 것밖에 없는걸."

 "그럼, 내가 오면 언제든 열어줄 거예요?"

 

  거짓말처럼 시린 눈을 숨기고, 해맑게 웃어 보이는 그를 보고 나도 모르게 그러하겠다 대답할 뻔했다.

 

 "난 여기가 좋아요. 해연 씨가 있어서 그런지 밝고 따뜻해."

 "몇 번 오지도 않고 그런 것도 알아요?"

 "그럼요. 그런 의미로, 나 정말 조금만 잘게요."

 

  정말 자겠다는 말을 끝으로 밀가루는 머리를 바깥쪽으로 돌렸다. 뭐야, 진심이었어?

  다리를 들어 올려 이놈의 머리를 떨어뜨릴까 고민하는 찰나, 그가 아까부터 잡고 있던 손을 자기 가슴께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깍지를 꼈다.

  마지막으로, 빨래판으로 삼아도 될 만큼 너른 등 너머에서 실오라기 하나 지나갈 틈 없이 단단한 손깍지만큼이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손, 놓으면 안 돼요."

 

  뭐랄까, 6살짜리 유치원생의 경고 같은 말에 할 말을 잃었다.

  할머니께도 이리 말했을까? 응. 문도준 주니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주었다.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밀가루는 꿈의 나라로 떠나갔다.

  하나인 듯 보이는 두 사람이 자리한 공간에는 한동안 째깍째깍 보채는 시계만 바쁘게 움직일 뿐, 그 어떤 움직임이나 소리도 없었다.

  그는 정말 피곤했는지 곧 규칙적으로 어깨를 움직이며 고른 숨소리를 냈다.

 

 "......"

 "......"

 

  입술이 터진 자리에 묻은 피가 검붉은 색으로 굳어버렸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주던 손을 들어 핏자국을 살짝 건드려봤다.

  그러자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얼굴을 돌렸다. 천장을 보고 누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머리카락이 쓸려 이마를 가렸다.

  가늘고 보드라운 머릿결이 만들어낸 사락, 소리가 그의 꿈을 방해하지 않도록 나는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훤히 드러난 이마와 함께 찌푸려졌던 눈썹도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가만히 감은 두 눈 속에 펼쳐진 세상은 잔잔한지 그의 표정도 제법 평온하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문도준 주니어의 모습도 이랬을까? 정말 천의 얼굴을 가진 남자라니까.

 

 "자고 있을 땐 정말 천사 같은데."

 

  내 취향은 아니지만 참 잘 만들어진 얼굴이란 말이지. 내가 신이라도 만족스럽겠어.

  연유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에 코도 오똑하고, 여자보다 긴 속눈썹은 또 어떻고? 그에 비해 짙고 단정한 눈썹과 다부진 체격은 남자다움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나는 그의 얼굴선을 따라 조심스레 손가락을 옮기며 아름다운 조각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동그란 이마에서 풍성한 속눈썹, 코를 이어 마침내 촉촉한 입술에 닿은 손끝이 바람에 흔들리는 꽃줄기처럼 바르르 떨었다.

  그라나다의 석류를 닮은 붉고 투명한 그의 입술은 톡, 터뜨려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아, 이미 내 손에 터지긴 했구나.

 

 "이렇게 잘 생겨서 하는 짓은 왜 그리 짓궂은 건지."

 

  나는 잘생긴 말썽꾸러기가 못내 괘씸해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붉은 입술은 적당한 수분을 머금어 촉촉하고 신선한 푸딩처럼 탱글탱글했다.

  그때, 커다란 손이 올라와 그의 입술에 닿아있던 나의 손가락을 덥석 붙잡았다.

 

 "알려줘요? 그 이유."

 

  헉! 손이 잡히는 순간 한 번, 잠에서 덜 깨 쇳소리가 섞인 낮은 음성에 또 한 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느새 눈을 뜬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반짝이던 별빛이 사라진 까만 밤하늘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블랙홀로 변해 있었다.

  두 손 모두 그에게 잡혀버린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만 꼴깍 삼켰다. 도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너무 놀라 멈춰섰던 심장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뛰고 있다. 그의 눈길이 닿는 얼굴의 곳곳이 터질 듯 뜨거워졌다.

  이미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눈동자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된 나는 용기를 그러모아 겨우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이유가 뭔데요?"

 "글쎄,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는데."

 "그럼?"

 "알고 싶어요?"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힘을 주어 두 손을 잡아당기자 내 몸이 쏟아지듯 그의 위로 끌려갔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잠에서 막 깨어난 그는 내가 아는 문도준이 아니었다. 모든 표정을 지워낸 얼굴은 무서우리만치 차가웠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마주한 그의 눈이 나를 자신의 검은 공간에 모조리 빨아들일 듯 깊숙이 응시했다.

  유달리 짙고 어두운 눈빛에 정신을 빼앗긴 나는 매끈하게 올라간 붉은 입술이 꽃잎처럼 살며시 열리는 모습을 멍청히 쳐다봤다.

 

 "키스해주면 말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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