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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태양이 걷는 순례길
작가 : 에스뗄
작품등록일 : 2017.6.18

인생이라는 고달픈 순례길에서 맞닥뜨린 뜨거운 태양 하나.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그믐달 진해연과 그녀를 쫓는 태양 문도준. 과연 태양과 달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048. 나비가 앉은 자리(1)
작성일 : 17-07-15 23:41     조회 : 396     추천 : 1     분량 : 5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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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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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at the..."

 

  검은 건 바탕이요, 빨간 건 글씨니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저미는 그 단어는 바로 '매진'이라.

  하아, 기껏 밀가루가 지정한 '2층 로비 왼편 화장실 앞 자판기'까지 왔더니 커피가 매진이라고?

 

 "밀가루 너 이 시키, 알고 보낸 거라면 진짜 가만 안 둔다."

 

  하필이면 자판기마다 커피만 매진이라 하는 수 없이 방송국 전 층을 빙글빙글 돌아야 했다.

  결국, 나는 우리가 있던 6층에서 하나를 뽑아 대기실로 돌아왔다.

 

 "내가 어디까지... 어, 아무도 없는 거야?"

 

  대기실 문을 여니 밀가루는 어디로 가고 쪽지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나를 반겼다.

 

 「촬영 거의 다 끝나서 오래 안 걸리니까 기다렸다 같이 가요.」

 

  동글길쭉한 글자들이 흐트러짐 없이 줄지어 서서 차분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다시 봐도 참 정갈한 글씨체는 밤하늘과 같은 그의 눈을 닮았다.

  같이 가자니. 이 남자에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나는 액정에 뜨는 이름만 봐도 손발이 저릴 정도로 떨렸는데.

  그날 밤과 똑같은 눈, 똑같은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하고 막혔는데. 당신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구나.

 

 '그렇게까지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실수였다고 했다.

  반했다던 말도, 태워버릴 듯 뜨거웠던 눈빛도, 숨을 모조리 앗아갈 만큼 깊었던 입맞춤도 모두 날 향한 게 아니었다. 그저 실수였을 뿐.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창 성장기에 꾸던 꿈처럼 바닥이 아래로 꺼지는 줄 알았다.

 

 "이제 보니 취중진담이란 거 다 거짓말이구나. 그저 취중진상일 뿐이었어."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어차피 날 좋아한다 했으면 도망갈 거였잖아. 그래, 차라리 이편이 나은 거야.

  아냐, 그래도 나쁜 놈!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놓을 거면 얌전히 내려놓기나 하지. 밑바닥으로 집어 던질 건 또 뭐람.

 

 "그리고 여자친구 타령 좀 그만할 수는 없어?"

 '그땐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 알았나.'

 "나는 뭐, 알았나?"

 

  다른 날과 달리 그날 밤, 그의 품 안에서 내 가슴은 하나도 뛰지 않았다. 오히려 덜컥, 하고 멈춰버린 심장을 다시 깨우느라 애를 먹었지.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가 만들어낸 야릇한 감각이 나의 온몸을 지배했다.

  아찔과 짜릿 그 사이에서 깨달았다. 나는 이 남자를 원하고 있다는 걸. 이제 더는 부정할 수 없다는 걸.

  그러자 덜컥, 두려워졌다. 모른 척 그의 손을 잡아버릴까 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질까 봐.

 

 "이럴 줄 알았어. 이래서 애초에 시작하지 않으려 했던 거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울려대는 그의 전화에 나는 두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그렇게 애써 마음을 다잡고도, 한순간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주르륵 녹아내리는 지조 없는 심장이 원망스럽다.

  평범한 사람 다 놔두고 왜 하필 태양을 닮은, 누구나 우러러보는 그 사람인 건지.

  이번엔 또 얼마나 벌거벗겨지려고? 또 얼마나 깊은 어둠 속으로 쫓겨가려고?

 

 "그래도 좋아?"

 '좋아. 그래도 좋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시작된 낮은 목소리가 온몸을 울린다. 어느새 커져 버린 마음이 이성을 집어삼켜 버렸다.

  그를 만난 이후,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 과연 이대로 4개월을 더 버티는 게 가능할까? 멀미에 나가떨어지는 건 아닐까?

 

 "하아, 정말 큰 일이다."

 

  나는 바람이라도 쐬기 위해 복도로 나섰다. 비상계단 문을 여는 동시에 나풀대는 하얀 원피스가 나를 지나쳤다.

  이 향기는, 차승아 씨?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내가 인사를 건네자 그녀가 천천히 서늘한 눈을 들어 나를 응시했다. 지난번에 언뜻 보았던, 미소를 지운 인형 같은 표정으로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나를 못 알아본 건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달콤한 눈웃음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웠다.

 

 "그쪽이었어요?"

 "네?"

 "그쪽이..."

 

  Trrrr...

  가늘게 뜬 눈이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은데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시 말을 꺼내려 할 즈음, 눈치 없는 핸드폰 벨소리가 말을 끊었다.

 

 "죄송해요. 잠시만요. 네, 진해..."

 -해연 언니! 아직 안 갔죠? 나랑 데이트해요! 지금! 당장!! 롸잇나우!!!

 

  라, 라희야...

 

 

 *

  잠실, 우리 집 근처 대형 놀이공원.

  라희와 나는 놀이공원 안의 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굴을 꼭꼭 숨긴 라희는 수많은 놀이기구와 현란한 퍼레이드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로지 커피만 마셨다.

  거대한 공간 안에서 헤매지도 않고 카페를 찾은 것부터 시작해 주문에 자리 잡기, 음료 가져오기까지 그 모양새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나는 동네 카페에 온 줄로 착각할 뻔했다.

 

 "데뷔하고서 한 번도 안 왔다는 거 거짓말이네."

 "히힛. 그래도 한동안 못 온 건 사실이에요."

 

  나의 핀잔에 배시시 웃음을 흘린 라희는 한 곳에 고정한 시선을 옮기지 않고 입만 오물오물 움직였다.

 

 "아는 사람이에요?"

 "응? 누구?"

 "저기 안경 쓴 직원. 계속 보고 있잖아요."

 "헐..."

 

  나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나 보다. 잘 익은 토마토 마냥 붉게 올라온 당황한 얼굴을 연신 파닥대는 두 손이 제법 바쁘다.

 

 "어디 보자."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고, 눈이 똘망똘망하니 성격이 좋아 보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잘생긴 외모는 아니다.

  사람들도 내 생각과 같은지 그 옆에 키가 큰 남자에게 줄이 더 길게 늘어섰다. 음, 라희는 꽃미남 사이에 있다 보니 잘생긴 얼굴이 질린 건가?

 

 "의외네. 라희씨는 좀 더 날카로운 느낌을 좋아할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얼굴이 다는 아니잖아요."

 

  그렇긴 한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설득력이 없잖아요.

  라희의 이미지는 차승아 씨와 정반대다.

  분홍 솜사탕을 떠올리게 하는 청순, 아담, 아련한 고전 미인인 차승아 씨에 비해 라희는 톡 쏘는 스파클링 와인처럼 섹시하고, 늘씬하며 당당한 현대 여성이랄까?

  시원시원한 키와 볼륨감 있는 몸매, 동그란 얼굴 안에 자리 잡은 또렷한 이목구비는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인 데다, 톡톡 튀는 매력이 독보적인 여자 아이돌이니까.

  그렇기에 웬만큼 잘 생긴 남자들 사이에서도 콧대가 높아 골라 사귈 것만 같은 라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경험상 잘생긴 것들은 얼굴값을 해서 별로예요."

 

  그래. 네 말을 들으니 안 그래도 비싼 얼굴 값 제대로 하는 한 남자가 바로 떠오르는구나.

 

 "너무 잘나서 제 멋대로인데도 컴플레인조차 걸 수 없는 그런 남자가 있지."

 "언니, 오빠랑 사귀죠?"

 "푸웁!"

 

  아, 깜짝이야! 입에 물고 있던 레몬에이드를 뿜어버릴 뻔했다.

  마치 내 머릿속을 다녀간 듯,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라희 때문에 나는 꽃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그의 얼굴을 서둘러 지워버렸다.

  기사 속 여자친구가 나라는 건 성진 씨까지 우리 셋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혹시 밀가루가 말했나?

 

 "표정 보니까 맞네. 맞죠?"

 "그건 왜 물어요?"

 "나는 솔직히 두 사람 사귀는 거 반대거든요. 결사반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앉아 긴 다리를 올려 꼰 라희는 온몸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했다.

  결사반대까지 할 정도인 거야? 난 왜 슬퍼지려 하지?

 

 "처음엔 좋을지 몰라도 나중엔 분명 언니가 피박 써요. 내가 알아요."

 

  잠시 내게 머물렀던 라희의 시선이 자석에 끌리듯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는 라희의 초점이 점점 흐릿해진다. 그와 함께 음성도 물에 젖은 휴지처럼 힘없이 처럼 풀어졌다.

 

 "언니, 나는요. 차라리 내가 속 끓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난 연예인이니까."

 "연예인은 뭐, 사람 아닌가?"

 "질타를 받고 무언가를 잃어도, 최악의 경우 이 바닥을 뜬다 해도 나는 어떻게든 다시 채울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저 사람은 아니잖아요."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라희는 진심이었다. 라희의 시선 끝에 닿은 한 사람을 다시 한 번 훑어봤다.

  우리의 대화가 들릴 리 없는 그는 앞에 선 손님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마저 푸근하게 하는, 참 해맑은 미소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지옥을 경험할 걸 생각하면, 난 절대 고백 못 해요."

 "그건 라희씨 때문이 아니에요. 라희씨라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그저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 다른 것뿐이에요."

 

  게다가 지옥은 상대가 그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는걸.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바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내가 유난을 떠는 것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 지옥이란 곳은 상대로 인해 받은 상처의 크기에 비례하지, 걱정에 비례하는 건 아니다.

 

 "그 몫은 어떻게 다른데요?"

 "그건 사람에 따라 달라요. 다만, 더 사랑한 사람이 더 많이, 더 오래 아파하는 법이죠."

 

  바보같이 이별이 오는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랑을 주고 또 주다 아픔은 온전히 나 혼자의 몫이 되었다.

  남들은 얼마나 많이, 오래 그 짐을 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 아픔만으로도 버거워 남의 것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추억의 빛깔이 바래지고 흐려지면, 서툰 사랑의 기억이 묻어있는 이름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아지면, 그때쯤이면 내 몫도 다 끝난 것이겠지.

 

 "언니, 도준 오빠 좋아하죠?"

 

  도리도리, 흔들리는 고개가 나의 것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감각이 없다. 지금 나는 라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얼굴은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가슴은 그 사람을 더 알고 싶다고, 조금 더 곁에 있고 싶다고 타인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의 미소가, 손길이 닿을 때마다 마치 짝사랑 중인 소녀처럼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내가 나도 우습다.

  시나브로 새어나가고 있던 감정이 그와의 입맞춤 이후로 완전히 터져버렸다. 행여 그에게 들킬까 필사적으로 숨기고는 있지만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

 

 "혹시 내가 작업실에서 한 말 신경 쓰고 있는 거예요?"

 "어떤 거? 도준 씨가 스킨십이 많다는 거?"

 "그래서 착각하는 애들도 많다는 것도."

 

  신경이 안 쓰인다는 건 거짓말이겠지. 내가 그 애들 중 하나라는 건 분명하니까.

 

 "그때 하려다 못한 말인데..."

 "......"

 "내가 봐도 언니는 다른 것 같아요. 아까도 오빠가 언니 끌고 가는 거 봤어요. 박력 쩔던데요? 대박, 나 완전 반할 뻔했잖아!"

 "좀 전엔 결사반대라더니?"

 "언니가 다칠까 봐 그렇죠. 뭐, 날 혼냈던 걸 생각하면 언니도 팬들한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다만."

 "아냐. 나 사실 엄청난 겁쟁이에요."

 

  스스로 만든 안개 속에 숨어서는 강한 태양빛이 비춰도, 별빛이 새어 들어와도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있는걸.

 

 "나도 일부러 센 척하는 거예요. 안 들키려고,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이제 보니 우리 두 사람 참 닮았네."

 "그러게요. 그런 의미로 짠, 한 번?"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레모네이드. 두 개의 유리잔과 그 속에 담긴 얼음이 서로를 찾아 부딪치는 소리가 청량하다.

  우리가 첫 만남에서 서로를 곱지 않게 보았던 이유는 상대에게서 자신의 못난 모습이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서 마주했던 우리.

  반년이 지나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다시 마주한 우리 두 사람은 과연 얼마나 성숙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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