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각-
빨간 오픈 토 슈즈가 미색 커튼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온다.
붉은 꽃잎이 도도한 자태를 유지하며 나오는 것과 반대로 구두의 주인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
구두와 같은 색의 허리띠를 포인트로 준 하얀 원피스와 허리 부근에서 곱게 말은 검은색 머리를 한 승아 누나는 평소답지 않게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라도 반할 웃음을 보고도 내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나는 오히려 굳어가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저기, 도준아. 나는 카페에 팔찌가 떨어져 있길래 가져다주려고..."
"봤지?"
"...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묻는 입술이 쉬이 열리지 않는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눈동자가 나에게만은 온전히 닿지 않는다.
듣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것이겠지. 사랑을 받기만 하고, 먼저 떠날 줄만 알았던 이 여자는 난생처음 겪는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굴리는 눈앞의 여자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가,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그마저도 금세 식었다.
"내 기사 봤잖아."
"그래서?"
"나 이제 누나가 아니라 저 여자한테 빠져있어."
"거짓말."
"눈으로 보고도 안 믿어져?"
거짓말이란 말로 일갈한 여자는 상한 자존심을 피식,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하긴, 못 믿을 만도 하겠지."
나도 처음엔 나 자신의 변화를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쩌지? 내가 보기엔 앞으로 더 빠질 것 같은데."
아마도 점점 더 깊이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진해연, 그녀는 늪이다. 가까이하면 할수록 숨이 가쁘고 현기증이 난다. 모르는 척도 해보고, 발버둥도 쳐봤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빠져드니 미칠 노릇이다.
그런데 손 하나 까딱 못하고 빨려 들어가면서도 기분만은 좋은 참 이상한 늪, 참 이상한 여자.
진해연이란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옅은 미소가 물든다.
"연기하지 마!"
"내가 연예인도 아닌 일반인 데리고 연기할 만큼 한가해 보여?"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린 누나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높였다. 영롱하기만 했던 목소리는 무엇이든 찔러버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두 사람을 감싸는 공기에 낀 살얼음이 서걱거린다. 누나는 자신을 보호하던 미소마저 감춰버렸고, 표정을 지운 나의 얼굴에는 서늘한 냉기만 남았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나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누나는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도준아."
하지만 이내 눈가를 살포시 접어내리며 내가 단 한 번도 거부하지 못했던 매혹적인 미소를 띄웠다.
"우리 도준이가 화 많이 났구나. 알았어. 누나가 잘못했어. 이제 그만해."
하얗고 가느다란 팔이 살며시 들어와 허리를 감싼다. 움찔, 빌어먹게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버렸다. 제길, 3년이면 충분했잖아.
코를 찌르는 진한 향기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조금 전, 은은한 살냄새에 안정을 되찾았던 호흡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향기에 다시 가쁘게 날뛰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다 했더니 작년 생일에 내가 선물했던 미스트와 같은 향이네.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은 향수 브랜드의 계열이라 구하는 데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어렵사리 구한 선물을 건네받은 당신은 내게 참 잔인한 말을 했었지. 그 날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뿌린 건가?
"1년."
나는 가슴으로 파고드는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그러자 누나는 온기를 빼앗긴 작은 새처럼 바르르 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물음표를 그린 커다란 유리구슬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나를 응시한다.
내가 1년 전의 문도준과 같을 거란 착각은 그만. 난 이제 더는 달콤한 설탕을 달라고 매달리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딱 1년 됐어. 누나가 헤어지자고 한 지. 그 시간이 뭘 의미하는 것 같아?"
"그래, 알아. 꽤 긴 시간이었다는 거."
커스터드 크림처럼 부드러운 눈길을 담은 고개가 기울어지고, 풍성한 머릿결이 나의 팔 위로 사르르 흘러내린다.
조금 전 허리를 감쌌던 두 팔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뿐히 허공을 가르고 올라와 목을 둘렀다.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며 우아한 몸짓으로 다가와 꿀을 바른 듯 달콤하게 속삭이는 하얀 나비의 목소리에 나는 한순간 멍해졌다.
"그래도 기간이 얼마나 됐던 넌 항상 받아줬잖아. 사랑했잖아."
"......"
"그리고 지금 난 네 앞에 있고."
"......"
"이젠 아무한테도 한눈팔지 않을게. 맹세해."
흑발의 미미인형을 닮은 여자가 발꿈치를 살짝 들어 올려 예쁜 입술을 가져온다. 나의 것과 맞닿은 조그만 입술이 매끈하게 말려 올라가는 감촉이 느껴졌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불가항력이란 것이 정말 있다면 나에게는 차승아란 여자가 아닐까 하고.
머리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매번 지고 말았다.
그렇게 오늘도, 더 이상 휘둘리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은 다짐이 무너질 뻔한 순간,
'나에게 문도준이 어떤 존재냐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무릎을 당겨 눈물 가득한 얼굴을 묻던 한 여자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하필 지금 그 여자가 떠오르는 거지? 꿈속에서 닿았던 말캉한 감촉과 눈물의 흔적이 잔상으로 남아 머릿속을 맴돈다.
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저 상처받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이유가 나 때문일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그 눈물이 나로 인한 것이라면?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목에 둘린 가느다란 팔도 풀어냈다. 도톰한 입술 끝을 올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누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다.
이 사람은 아직도 나와 함께했던 과거에 머물러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당신과 다른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
"1년 전에 누나가 그랬지? 나는 누나만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고."
"도준아, 그때는..."
"그 말 하면서 찔리지 않았어?"
말을 다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나의 입술의 한쪽 끝이 비릿하게 올라간다. 결코 웃기지도, 기쁘지도 않은데 나오는 미소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감정의 호수를 겨우 막아섰던 댐이 무너졌다. 마음에 켜켜이 쌓아두었다가도 반짝이는 두 눈을 마주하면 차마 꺼내놓지 못했던 원망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가슴 한 켠에 굳게 자리하고 있던 사랑이란 이름을 떼어내자 비릿한 쇠냄새가 코끝에 진동한다. 다 아물었다 여겼던 상처의 딱쟁이도 같이 떨어졌는지 바람이 스친 자리가 쓰라리다.
"미안해."
"아냐.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니 누나 말이 맞는 것 같아."
'연락의 빈도수가 점차 줄어들고, 대답이 짧아지고,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점차 줄어들고, 만나도 별말 없이 휴대폰만 멀뚱멀뚱 바라보는 것은 편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이 다 한 게 아닐까?
아니, 그런데 그동안 했던 것이 사랑이 아니라 호감이었을 수도 있어.'
몇 해 전, 드라마 속에 나왔던 대사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내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귀를 틀어막았던 것뿐이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당신의 방랑벽에서 시작된 몹쓸 여행. 나는 당신을 만족하게 해줄 수 없었고, 당신은 철새처럼 나를 떠났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당신은 눈에 띄게 야위어 갔다.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은, 내게 말을 건네는 당신의 목소리는, 결코 나를 향하지 않는 당신의 마음은 더 이상 예전의 것이 아니었지만 나는 차마 당신을 밀어낼 수 없었다.
처음에는 변해가는 당신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밀물과 썰물처럼 당신이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에서 나도 파도에 깎이며 조금씩 무뎌졌나 보다.
그리고 이별은 언제나처럼 평범하게 찾아왔다. 언제나 그랬듯 당신의 한 마디로 우린 정말 끝났다. 물론, 당신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기계가 아닌 사람이 사는 삶인데, 인간적이지 않은 순간이란 게 있을까요?'
'무슨 뜻이죠?'
'사실 넓게 본다면, 인간적이란 말 속에는 비열함과 차가움이란 의미도 내포되어 있을 텐데요. 그것도 인간의 모습이니까요.'
피카소의 집에서 그녀가 말한 대로 넓게 본다면 나의 사랑도 참 인간적이었다. 아름답기만 바랐던 사랑은 비굴하고, 쓸쓸하고, 지독하기까지 했다.
이별 뒤, 고통에 몸부림칠 줄 알았지만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죽을 만큼 사랑했다 여겼지만 그 사랑이 끝나고도 죽지는 않았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딱 그만큼 내 사랑이 모자랐던 걸까?
아니, 타들어 가는 불꽃처럼 열렬히 사랑했다. 단지 이별의 시점에 내게 남은 것이 더 사랑이 아니었던 것일 뿐.
"난 이미 그때부터 누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
"누나가 그랬듯, 내 마음도 서서히 변한 것뿐이야."
그리고 그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기 시작한 거고. 그 사람이 같은 건물 안에 있다는 걸, 이제 곧 다시 올 거란 걸 알고 있음에도 나는 또 그녀가 보고 싶다.
아, 지금은 안 되겠구나.
비록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뭣도 아니지만 적어도 그 여자가 우리의 관계를 알아선 안 된다. 온 세상이 다 알아도 그녀만은 몰랐으면 좋겠다.
유리구슬을 닮은 눈동자에 물기가 스민다. 물방울 모양의 유리 조각이 곧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아직은 저 눈물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다.
나는 앞에 선 여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이 가녀린 여자에게 먼저 등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따금 지금의 장면을 상상해본 적도 있었다. 묘한 쾌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아프다. 딱쟁이가 떨어진 자리가 오늘따라 참 많이 쓰라리다.
"내 여자 오기 전에 나가줄래? 털끝만큼이라도 오해할만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거든."
"기다릴게."
"기다리지 마. 안 가."
난 당신과 다르니까.
두 눈을 감자 무뎌졌던 감각들이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는 것만 듣고, 믿었던 어리석은 순간들에 갇혀있던 또 다른 진실들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간다.
나를 감싸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여린 걸음을 옮기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아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에 담긴 미련의 소리가 들린다.
달칵, 탁-
"하아."
끝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쓰러지듯 소파 위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시린 빛을 내뿜는 형광등을 피해 팔로 두 눈을 가렸다.
"결국, 저질러 버렸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작은 균열이 댐을 무너뜨리듯 생각지도 못한 일로 그동안 나조차도 몰랐던 감정과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상처, 받았겠지? 누나에게는 단 한 번도 싫은 소리 해본 적이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이게 맞는 건가?
"그래. 잘한 걸 거야."
사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나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왜 자꾸 마음이 흘러가는 건지, 내가 이래도 되는 건지도 나는 모르겠다.
단 한 가지, 내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지금 그 여자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는 사실.
이 상태로라면 가시가 돋친 말이라도 내게는 달콤한 자장가처럼 포근한 위로가 될 것 같다.
어쩔 거야? 진해연. 당신 때문에 나 이제 진짜 솔로 됐다고.
♬♪
연락도 없이 며칠 동안 사라졌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조금 바빴다며 웃는 건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늦은 밤중에 보고 싶다 전화 와서 달려나가면
그냥 나의 품에 안겨 한참 울면서
끝내 아무 말이 없다가
참 미안하다고 늘 고맙다는
그건 어쩌면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싫어졌냐고 좋아하긴 한 거냐고 몰아세울 때
그냥 나의 손을 잡고 한참 울면서
끝내 아무 말이 없다가
잘 모르겠다고 왜 이러는지
그건 아마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이젠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 김동률 - 사랑하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