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C 방송국 1층에 위치한 작은 카페.
연두색 이파리들이 상큼한 빛을 내뿜는 벽의 한쪽 모서리에 사람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한 테이블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마주 보고 앉아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남녀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불편한 적막함을 견디지 못한 남자가 맞은편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쥔 여자에게 얼음처럼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촬영 없어?"
"오늘은 드라마국 세트장에서 있어. 그래서 일부러 너 보려고 온 거야."
"괜한 수고 했네."
불퉁한 듯 들리는 말은 사실 내 생각 그 자체였다. 뭐하러 여기까지 왔는지 난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들어 입방아에 오르는 건 둘째치고 이제 우리는 마주 보는 것 자체가 불편한 사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닮은 분홍색 빨대로 얼음을 빙글빙글 돌리던 누나가 풍성한 속눈썹에 덮힌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만히 들어 올렸다.
"나한테 화났어?"
"아니."
"그럼 왜 연락을 안 받아?"
"우리가 연락할만한 사이인가?"
단 한 톨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어조에 내 목울대가 흠칫 울린다. 한때는 내 세상의 전부였던 여자에게 이리도 무정할 수가 있는 건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한 누나의 얼굴이 마른 지점토 인형처럼 파사삭 굳었다. 하얀 얼굴을 가르는 작은 균열이 누나의 기분을 여실히 드러낸다.
"너 진심이야?"
자존심이 상해 찌푸려진 새하얀 얼굴 위로 한 까만 여자가 겹쳐 보인다. 이상하다. 그녀와 있을 때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새벽이슬처럼 말간 얼굴은 무엇이든 투영할 것 같았으나, 정작 그녀를 보고 있는 나는 그녀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비죽이는 입술 위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자신의 감정을 그녀 자신은 몰랐다. 나는 그런 점이 더욱 재밌었다.
그래서 더더욱 말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도록 만들었던 것일지도.
"이거 받고 마음 풀었으면 좋겠어."
"......"
"너 이 브랜드 모자 좋아하잖아."
잠시 다른 얼굴을 떠올리는 사이 누나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빨간 자수가 커다랗게 박힌 스냅백 모자.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이번 시즌 한정판이다.
"그리고 빨간색도."
모자를 내민 주인공은 빨간색을 언급하며 자신 있게 웃어 보인다.
그래. 열정적인 모습이 좋다는 당신의 말에 빨간색만 미친 듯이 찾아다녔던 때가 있었다.
데뷔하고 얼마 되지 않아 누구에게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력했던 때, 역설적이지만 무엇보다도 인간 문도준을 향한 따스한 미소가 절실했던 그때.
나의 열정을 인정해준, 절실함을 채워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너에게는 열정보다 성숙한 믿음과 지혜가 필요하거든.'
스페인의 작은 골목길에서 이름 모를 남자가 예언하듯 읊었던 그 말, 성숙한 믿음과 지혜.
초심과 같은 열정만 있다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내게 성숙한 믿음과 지혜라는 것은 좀처럼 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았다.
그런데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반드시 나를 향하지 않더라도 바람결을 타고 흩날리는 미소의 입자가 나의 입가를 설레게 한다.
"사양할게. 이제 다른 색이 좋아졌거든."
"그럼 바꿔줄게. 무슨 색이 좋은데?"
"글쎄."
슬쩍, 왼손에 두른 팔찌를 내려다봤다. 언젠가부터 원래 제 자리인 양 자리 잡은 녀석. 그녀를 닮아 투박한 듯, 단단한 모양이 썩 마음에 든다.
심해의 짙은 고요를 담은 짙푸른 팔찌 옆에서 빛을 반사하는 시계가 훌쩍 가까워진 녹화시간을 알려주었다.
이제는 안녕을 고해야 할 시간이다.
"갈게."
"오랜만에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얘기하자. 그 정도는 괜찮지?"
일어나는 나의 팔에 누나의 가는 손이 올라왔다. 깃털처럼 사뿐히, 그러나 은근한 힘이 느껴진다.
피부를 타고 고스란히 느껴지는 고집에 나는 숨을 참았다.
"인터뷰 있어."
"오늘 저녁 같이 먹는 걸로 안다!"
나는 사람들의 오해를 피하고자 팔 위에 얹어진 작은 손을 떼어내고 돌아섰다.
누나가 소리를 높이건 말 건 카페를 나선 나는 그제서야 가까스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의 행위가 무안할 정도로 가슴은 여전히 갑갑하다.
"아, 까만 콩 보고 싶다."
*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서 들어선 촬영장 안은 실제 사우나실을 방불케 할 정도로 후끈했다.
지난 2월에 밸런타인데이 특집으로 오고서 그사이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도준 씨는 누구보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을 것 같은데요."
첫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자기소개를 하기도 전부터 직구를 던질 줄이야.
"하하, 뜨거운 여름이요?"
"에이, 다 아시면서."
눈을 가늘게 뜬 MC가 의뭉스런 표정으로 입을 늘인다. 이것 참, 아닌 것을 아니라 할 수도 없고.
그나저나 뜨거운 여름이라니. 누가 들으면 아주 식겁하겠네.
얼음 동상 마냥 싸늘해질 여자의 얼굴을 상상하니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흐른다.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MC들은 돌아가며 나의 가상 연애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아직 제대로 알려진 게 없어서 모든 시청자분이 궁금해하세요. 두 분, 어떻게 만나신 건지 살짝만 알려주세요."
그 정도쯤이야. 사실 이 질문은 사전 인터뷰 전부터 여기저기에서 숱하게 들어왔다.
그에 앞서 섭외가 들어왔을 때부터 실장님과 함께 대본도 만들었으니 외워둔 대사만 잘 읊으면 그만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가 먼저 반해서 따라다녔어요."
시현이를 제외한 모든 MC와 게스트의 눈이 커졌다. 카메라 아래 쭈그려 앉은 작가들에게서는 비명까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머릿속에 준비된 대본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시작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는 7년 전의 어느 봄날.
"모두 아시는 것처럼 7년 전에 학교에서 선생님과 제자로 처음 만났고요. 작년에 외국으로 촬영하러 갔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됐어요."
"어머, 한국도 아니고 외국에서? 진짜 운명이다!"
"그때는 그렇지도 않았어요."
"아니, 왜요?"
"서로 첫인상이 안 좋았어요. 한 번은 촬영 중에 둘이서 싸웠는데 제가 완패했어요. 하나하나가 다 맞는 말이었거든요. 오죽하면 그날 밤이 새도록 이불킥을 했다니까요."
"설마 이불킥을 하다 사랑이 시작된 건 아니죠?"
시현이 녀석이 옆에서 장난기가 다분히 담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옆에서는 오오, 하는 환호성이 들린다.
"그런가?"
아니, 그날 밤에는 분명 열이 받아 밤을 새웠다. 게다가 다음날은 그녀의 꼬임에 넘어가 생일 케이크에 얼굴을 박았다.
스페인에서도 싫다는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해놓고 그 단단한 이마로 박치기나 하고. 진짜 웃기지도 않는 여자였지.
얼굴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예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랬던 그녀의 울퉁불퉁한 얼굴이 말랑말랑 찹쌀떡처럼 보이기 시작한 건 대체 언제부터지?
"그럼 언제 만나기 시작한 거예요?"
"정말 운명인지 그때 이후로 몇 번이나 마주쳤어요. 그런데 그분은 우연일 뿐이라고 선을 긋더라고요. 오기가 생겼죠. 우연인지 인연인지 한번 가보자고."
"이야! 상남자네!"
호들갑에 가까운 MC들의 반응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이 방송을 어서 그 여자가 봐야 할 텐데.
하지만 그녀 앞에만 서면 상남자는 어디로 가고 상꼬마 문도준만 남는다. 다시는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린다며 매일 집 앞에서 울어대던 고집쟁이 문도준.
"아, 그래!"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무언가를 이야기하던 MC가 박수를 딱, 쳤다. 그 덕에 내 정신은 무사히 촬영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도준씨, 여자친구에게 영상편지 한 번 어때요?"
"영상편지요? 글쎄요."
작은 농담 하나에도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여자가 영상편지를 보면 또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
쉬는 시간, 다음 촬영 준비를 위해 대기실로 가는 길.
두 시간 가까이 그녀에 대한 이야기만 하다 보니 갑갑함이 더 심해졌다.
"아무래도 라희한테 소식을 물어봐야겠어."
오늘 음악방송 촬영이 있으니 다른 일정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대기실에 있겠지. 음악방송 대기실이 우리 아래층이었던가?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허리를 폴더처럼 접는 후배들의 목청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화려한 무대의상 사이로 '나 방금 사우나실에서 나왔어요.'라고 홍보하는 듯한 파란 셔츠와 반바지 차림이 영 당당하지 못하다.
어디에라도 뛰어들어가고 싶은 이 시점에 Red Wine의 대기실은 대체 언제쯤 나오는 거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절규가 목구멍에 걸리고 만다.
그때, 복도 끝에 위치한 한 대기실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가진 여자가 나왔다.
"진해연?"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에도 상대방은 느릿하게 뒤를 돌아봤다. 여자의 움직임에 따라 어깨를 조금 넘는 초콜릿색 머리카락이 동그랗게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천천히 감겼다 떠지는 그녀의 두 눈에 나의 모습이 담겼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몇 날 며칠을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그 여자가 맞다.
이러다 또 꿈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나는 얼른 그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나의 발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진해연!"
내 말은 듣지도 않은 그녀가 벌컥, 비상계단을 열어 위로 올라갔다. 다다다닥 멀어지는 소리를 듣자 부재중을 알리던 안내음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지금 한번 해보자는 거야?"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그녀를 보니 나도 오기가 생겼다.
"승부욕하면 또 문도준이거든. 아이돌 육상계 전설의 실력을 보여주지."
사실 실력을 보여줄 것도 없었다. 첫 계단을 시작으로 두 칸씩 성큼성큼 올라간 나는 금세 눈앞에 놓인 어깨를 붙잡았다.
한 손에 폭 들어오는 작고 동그란 어깨가 흠칫, 떠는 것이 느껴졌다. 손안에서 시작된 작은 파동이 온몸을 진동시켰다.
"어디 가요?"
"아, 저기... 내가 지금 좀 바빠서... 앗!"
이번에는 어디 가느냐는 질문에 동문서답이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양 시선을 피하는 그녀가 서운하다. 아니, 서운하다 못해 밉다.
나는 그대로 그녀의 팔을 낚아채 비상계단을 마저 올라 시현이와 함께 쓰는 대기실로 돌아왔다. 마침 대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탁-
반강제적으로 문에 기대어 선 그녀가 다시 도망가지 못 하도록 한 팔로 문을 짚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였다.
"어, 어... 저기..."
몸으로 만들어낸 작은 공간 안에 더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들어왔다.
며칠 새 어두워진 얼굴과 눈가에 묻은 피곤함이 거슬린다. 무엇보다도 겁먹은 표정이 맘에 걸린다.
하지만 어느 것도 그녀에게로 향하는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비스듬히 얼굴을 내려 그녀의 향기를 맘껏 들이쉬었다. 내내 꽉 막혀있던 숨이 단번에 트이는 것 같다.
나는 말려 올라가는 입술을 그대로 둔 채, 마치 늑대 앞에 선 것처럼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바드르르 떨고 있는 토끼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쥐었다.
"드디어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