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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태양이 걷는 순례길
작가 : 에스뗄
작품등록일 : 2017.6.18

인생이라는 고달픈 순례길에서 맞닥뜨린 뜨거운 태양 하나.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그믐달 진해연과 그녀를 쫓는 태양 문도준. 과연 태양과 달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043. 속마음(5)
작성일 : 17-07-13 01:31     조회 : 374     추천 : 1     분량 : 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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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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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당신이 보고 싶었다고? 그걸 어떻게 확신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반박하고 싶었으나 딱 달라붙은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왔네."

 

  때마침 진이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묘한 기류를 형성한 두 사람은 일단 술부터 주문했다.

  두 장정은 소주도 아닌 맥주로 대작을 시작했다.

 

 "잘 마시네."

 "피차일반이네요."

 

  대화인 듯 대화 아닌 말들이 술잔과 함께 식탁 위를 오가는 동안 나는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시간은 잘도 흘러가 벌써 밤 9시를 넘어서고 있다. 이 두 사람을 어떻게 멈춰야 할까 눈치를 보는 중에 진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무심코 전화를 받은 진이의 코가 찡긋거린다.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상현 선생님의 목소리 역시 심상치 않다.

  통화를 마친 진이는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밤 9시가 넘었잖아.

 

 "지금 이 시각에?"

 "응. 미안해."

 "네가 왜? 상현 선생님이 미안해하셔야지."

 

  진이가 대답 대신 밀가루를 힐끔 쳐다봤다. 술 못 마신다던 사람이 벌써 4잔이나 마시고는 또 한 잔을 주문하고 있다.

  어두운 조명에도 발그스름한 얼굴색이 분명히 보인다.

 

 "다행히 아직은 살아있네."

 

  그래도 지난번처럼 훅 가지 않게 얼른 성진 씨를 부르는 게 좋겠어.

 

 "괜찮겠어?"

 "걱정 마. 나도 이 인간 매니저 편에 보내고 바로 갈 거야."

 "안 되겠어. 나도 매니저 오는 거 보고 갈래."

 "아니야. 일이니까 얼른 가봐."

 

  나의 말에 진이는 영 못 미더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선은 여전히 밀가루에게서 떼지 못한 채로 흘리는 한숨이 제법 무겁다.

 

 "연락할게."

 "응. 오늘 정말 고마웠어."

 

  우리가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밀가루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진이가 문을 나설 때까지 굳은 얼굴로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진이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눈꼬리가 사르르 내려갔다.

 

 "갔나? 갔네. 갔다."

 "그래요. 진이도 갔으니 이제 우리도 가요."

 "가긴 어딜 가요. 나랑 같이 있어요."

 "문도준 씨. 취했어요. 얼른 일어나요."

 "아, 그래. 나 취했으니까 진실게임 할까? 취중진담 이런 거."

 

  그는 취기가 다분히 오른 얼굴로 씨익씨익 웃으며 맥주잔을 돌려댔다. 잔 속에 담긴 노란 액체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잔 안에 생긴 작은 소용돌이의 잔상이 그대로 머릿속에 박힌다. 나한테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당신이 만든 소용돌이는 절대 사양이거든!

 

 "갑자기 무슨 진실게임이야? 싫어요."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도 안 궁금해요."

 "난 궁금해. 당신에게 문도준이란 어떤 존재인지."

 

  '존재'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동시에 그의 눈매가 깊어졌다.

  한층 짙어진 그의 밤하늘에서 별들이 자취를 감췄다. 작은 하늘에는 오로지 깊은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다.

  가라앉은 눈빛과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보자 덜컥 겁이 났다. 어떤 말을 하든 나는 이 게임에서 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먼저 할게요. 진해연 당신은..."

 "하지 마요. 성진 씨한테 전화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가지 마."

 

  그가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핸드폰을 들고 일어서는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아 앉혔다. 얼마나 세게 잡았던지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얼음보다 서늘한 눈을 한 그를 보자 신음이 다시 입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살얼음이 낀 눈을 내게 맞추고 다시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손을 쥐고 있던 힘이 풀리며 그의 몸이 스르륵 내 몸 위로 무너졌다.

 

 "엄마야. 멀쩡하던 사람이 왜 이래? 이봐요, 문도준 씨!"

 "......"

 "어? 내 핸드폰! 으아!"

 

  나를 덮쳐오는 그의 몸을 붙잡느라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서둘러 들어 올린 핸드폰의 매끈하던 액정에는 완벽한 거미줄이 쳐있었다.

  이미 수면의 강을 건넌 밀가루는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답이 없다. 주머니를 뒤져 그의 핸드폰을 꺼냈지만 배터리가 나갔는지 켜지지도 않는다.

  망연자실한 나는 내게 온전히 몸을 맡긴 그의 등을 철썩 내리쳤다. 그러나 아픔도 모르는 녀석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일 뿐.

  그 모습에 나는 끓어오르는 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녀석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아오, 이 밀가루 자식아!!"

 

 

 *

 "와 씨, 진짜."

 

  아닌 밤중에 땀으로 폭삭 젖은 나는 낑낑대며 작업실로 들어섰다.

  씻고픈 마음이 절실했지만 일단은 물먹은 솜 마냥 무겁게 가라앉은 남자를 거실에 있는 소파에 눕히는 게 먼저였다.

 

 "여보세요, 성진 씨? 저 진해연인데요."

 

  두 개의 핸드폰 모두 운명을 다한 판국에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작업실에 있는 고객 전화번호부를 뒤져 성진 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안 그래도 연락이 닿지 않아 똥줄이 타고 있던 성진 씨는 곧바로 달려오겠다고 했다.

  너 이 녀석, 역시 사고 친 거였구나.

 

 "미친 문도준."

 

  소파에 누워 죽은 듯이 잠든 그의 얼굴이 선명하다. 나는 소파 아래로 추욱 처진 팔을 그의 얼굴 근처로 옮겨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다친 손목은 이제 괜찮나?"

 

  섬세한 하얀 손목에 내가 볼리비아에서 선물한 투박한 파란색 팔찌가 대롱대롱 걸려있다.

  내가 그에게 준 유일한 선물. 나는 그의 손목을, 정확히는 그의 손목에 두른 팔찌를 잡고 소파 앞에 주저앉았다.

 

 "나에게 문도준이 어떤 존재냐고?"

 

  글쎄,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처음엔 그저 길에서 만난 이방인이라 생각하고 스쳐 지나가려 했다. 우연이 반복됐을 때는 몇 번의 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인가보다 했다.

  당신을 내 길에 들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길에서는 태양이 뜨지 않아야 하니까.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누군가를 만난다 해도 당신만큼은 아니어야 했다.

  조금씩 열리는 마음의 문을 있는 힘껏 붙잡아봤지만, 필사적인 노력이 무색하게도 당신은 어느새 문 안에 들어와 있었다.

  손 하나 쓰지 않고 들어온 당신은 나를 보며 여유 있게 웃었다. 이제 정말 큰일 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존심이 더 상했다.

 

 "당신 말대로 난 고집만 세. 가진 건 뭣도 없으면서 그걸 어떻게든 지켜보겠다고 아등바등해."

 

  나의 신념, 나의 가족, 나의 사랑이었던...

  그들 중 단 하나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이제는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당신이 좋아하는, 당신을 좋아하는 그 아름다운 사람과는 너무 비교되는걸."

 

  외모를 떠나 그녀에게서 나오는 밝은 빛이 부러웠다. 소중한 이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예쁜 마음이 부러웠다.

  무엇보다도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빛나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그녀에 비해 나는 내세울 것도,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도 없다.

 

 "이런 내가 감히 누굴..."

 

  울컥, 불투명한 액체가 차올라 시야가 울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무릎을 가슴까지 한껏 끌어당겨 얼굴을 묻었다.

  당신을 볼 때마다 이성과 감정이 치열하게 부딪친다. 절대우위에 있던 이성이 힘을 잃어감에 따라 이제는 내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다시는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는데. 더 이상 나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왜 당신은 겨우 다져놓은 마음을 허물어?

  그래, 당신이 뭔데? 얼마나 잘나신 존재라서 나를 이렇게 흔들어?

  난 그런 당신이 너무 밉다.

 

 "난 그런 당신이 좋은데."

 "응?"

 

  귓가에 감기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느껴지는 다정한 손길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고개가 저절로 들려졌다.

  어느새 눈을 뜬 밀가루가 두 눈을 가늘게 늘이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였던 나는 깊이 가라앉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단단히 묶여버렸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그의 손이 물기에 젖은 눈가로 향했다. 마치 소중한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에 애써 집어넣었던 눈물이 다시금 터져 나온다.

 

 "내가 당신의 그런 모습에 반한 건데."

 

  소파에 기대어 있던 그의 얼굴이 천천히 일어나 내게로 다가온다.

  안 돼. 이제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나는 황급히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에 살포시 와닿은 그의 입술이 뜨겁다. 손바닥에 닿은 붉은 꽃잎과 함께 팔 전체가 화르륵 타들어 가는 느낌이다.

 

 "......"

 "......"

 

  그가 느릿한 동작으로 입술만큼이나 열이 오른 손바닥을 들어 내 손을 감쌌다. 열기에 휩싸인 몸이 점점 바닥으로 꺼지기 시작한다.

  한 톨의 저항 없이 두 개의 손이 내려가자 손등에 가려져 있던 그의 하얀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맙소사.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입술과 손만큼 뜨거운 것은 없을 것이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는 훨씬 더 강렬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이 가라앉은 그의 눈길이 닿은 곳이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붉은 꽃잎을 닮은 입술이 열리고, 바람을 닮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윽고 쇳소리가 섞여 한층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진해연. 당신 진짜 멋진 여자야."

 "......"

 "내가 감당하지 못할까 겁이 날 정도로."

 

  돌연 강한 힘과 함께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이 당겨졌다. 그에게로 무너지기 직전, 나는 온 힘을 다해 소파를 짚어 몸을 지탱했다.

 

 "휴우..."

 "......"

 

  하지만 안심하는 것도 잠시, 순식간에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는 뜨거운 숨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흡!"

 

  말 그대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짙은 알코올 향이 전신을 감쌌다. 예민해진 손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느껴졌다.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숨과 달리 그의 움직임은 눈물이 날 정도로 섬세하고 달콤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내는 그의 손길은 더없이 따스했다.

  어느새 머리카락 사이를 가르고 허리를 감싼 단단한 두 팔이 나를 그의 품 안에 가두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의 옷깃을 붙잡고 바르르 떠는 것뿐이었다.

  달콤한 샘물을 들이켤수록 목이 탄다. 두 개의 숨결을 엮을수록 숨이 모자라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정신을 차린 나는 가쁜 호흡으로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피할수록 더욱 집요하게 따라오는 남자의 짙은 향기에, 한순간도 물러나지 않는 거친 숨결에 결국 나의 몸은 파르르 떨며 서서히 그에게 잠식되어갔다.

 

 

 ♬♪

 이상해 잠이 안 와

 다른 여자 곁에 있는 널 본 후로

 

 사람들 말이 다 맞나 봐

 남녀 사이 우정이란 상상할 수 없나 봐

 

 몰랐던 내 속맘을 알았어

 널 향한 이 맘 사랑이었다는 걸

 해맑은 웃음과 깊은 눈빛 내게만 줄래

 

 어렵게 꺼내는 내 말에 놀라지 않길 바라

 이젠 너의 연인이고 싶다고

 널 사랑해

 

 가슴이 차가운 인형처럼 왜 몰랐을까

 사랑해 사랑해 뒤늦게 알아챈 맘이지만

 이젠 너의 여자이고 싶은 나

 

 내 맘 알아줘

 

 ♬♪ 이하린 - 속마음

 
 
자신만의 이미지를 등록해보세요
과하객 17-07-13 04:31
 
사랑이란 그런거죠. 어느새 다가와 있는 상대를 느낄 때 화들짝 놀라는 거.... 두 사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네요. 이대로 해피엔딩이 돼야 할 텐데... 파이팅 밀가루!
     
자신만의 이미지를 등록해보세요
에스뗄 17-07-15 23:28
 
모든 사랑에는 굴곡이 있죠. 그래도 응원에 힘입어 열일하는 밀가루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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