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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태양이 걷는 순례길
작가 : 에스뗄
작품등록일 : 2017.6.18

인생이라는 고달픈 순례길에서 맞닥뜨린 뜨거운 태양 하나.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그믐달 진해연과 그녀를 쫓는 태양 문도준. 과연 태양과 달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042. 속마음(3)
작성일 : 17-07-13 01:27     조회 : 370     추천 : 1     분량 : 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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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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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그대로네."

 

  문을 여는 순간 몸을 덮쳐오는 기름 냄새, 네모난 공간 속 서로에게 집중하도록 하는 어두운 조명, 수년간 거쳐 간 이들의 손때가 묻어 가을 느낌이 물씬 나는 벽지까지.

  대학 때 친구들과 종종 들렀던 호프집은 수년이 지나서도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세월이 느껴지는 폭신한 붙박이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노란 전구 아래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마늘 치킨이 도착했다.

  진이가 가지런히 놓아준 두 개의 포크까지 손에 드니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신이 난 나를 바라보는 진이의 얼굴에 살며시 아빠 미소가 떠올랐다.

 

 "치맥은 비 오는 날이 진리지!"

 "그래. 많이 먹어."

 "너도!"

 "아 참, 잊어버리기 전에 줘야지."

 

  진이가 가방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봉투에서 나온 네모난 종이 속 잔잔한 색상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돌조각이 흩어진 길 위로 흩어지는 태양의 꼬리, 이끼가 잔뜩 낀 신비로운 초록 숲길, 안개 낀 새벽의 도시 골목, 속이 드러나 보이는 물길과 보기만 해도 아찔한 낭떠러지.

  특히 사람과 삶이 보이는 시골 풍경, 끝도 없는 밀밭과 포도밭은 내 마음까지도 평온하게 해주었다.

  네모난 세상의 하단에 적힌 주황색 숫자들은 대견하게도 눈 깜빡하면 지나쳐버릴 소중한 순간을 붙잡아 종이 위에 담아냈다.

 

 "우와, 이거 필름 카메라로 찍은 거야?"

 "맡긴 건 한참 됐는데 오늘에서야 찾았어."

 

  사진을 하나하나 넘기며 진이는 길 위에서의 순간순간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단 하나의 기념품이라 했다. 그리고 하나뿐인 기념품을 나와 나누고 싶다 했다.

  한 손에는 잘 익은 치킨을 들고 진이가 들려주는 사진 속 이야기를 행복하게 그려가던 중, 진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내 핸드폰에서도 문자의 도착을 알리는 알람음이 울렸다.

 

 ~♬♪

 -뭐 해요?

 

  참으로 간결한 세 글자. 딱히 어떠한 애정도, 더 덧붙일 것도 없는 말. 그럼에도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이유는 뭘까?

  타닥타닥, 매끈한 자판을 두드리는 손에 자잘한 설렘이 묻어난다. 글자만으로도 무심함을 가장할 수 있는 문자라 천만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진이랑 치맥하고 있어요.

 -어딘데요?

 -동네 호프집이요.

 

  나의 답을 마지막으로 글자로 나누는 대화는 맥없이 끊겨버렸다. 아닌 척하며 까만 액정을 흘끔거렸지만, 액정은 여전히 잠잠할 뿐이다.

 

 "뭐야. 끊을 거면 물어보질 말지."

 

  애초에 친절하게 답해줄 마음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다.

 

 "아, 차승아 씨가 오늘 만나자고 연락해본댔지."

 

  둘이서 만나고 있다가 내 얘기가 나온 것일 수도 있겠구나.

  머릿속에 분홍 솜사탕을 닮은 그녀가 선물한 모자를 쓰고 눈을 동그랗게 휘며 웃는 밀가루의 얼굴이 그려졌다. 보고 싶지 않은 그림이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워버리기 위해 나는 치킨을 입에 물었다가, 새콤달콤한 사각 무를 넣었다가 하는 무의미한 동작을 반복했다.

 

 "난 안 가. 너희끼리 다녀와."

 

  기복 없는 표정과 함께 시종일관 상대에게 무뚝뚝하게 일갈한 진이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금방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진이는 큰 동작으로 치킨 무를 입에 넣었다. 아닌 척하지만 5분 전보다 어두워진 표정이 조명에 비친다.

 

 "동혁이 아니야? 무슨 일인데?"

 "그냥. 진영선배 돌잔치 한다고..."

 

  들릴 듯 말 듯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바닥으로 내려간다. 차마 나를 보지 못하고 목을 긁적이는 진이의 얼굴에는 미안한 감정이 스몄다.

 

 "아, 그렇구나.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글쎄. 별로 관심이 없어서."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는 것 같은데, 가지그래."

 "됐어."

 

  진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나는 알고 있다. 2년 전 사건을 목격한 뒤, 유일하게 나의 편에 서준 사람이 진이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살뜰하게 살펴주고, 나에 대한 왜곡된 소문에 세뇌된 이들과는 자신도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동아리 선배들은 물론, 일부 동기들과의 교류마저 줄인 듯했다. 그래서 오늘도 초대를 거절한 것이고.

  나를 아껴주는 마음은 언제나 고맙다. 하지만 나 때문에 진이까지 굳이 선배와 등을 돌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럼 내가 더 미안한걸.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옆으로 놓인 포크의 끝을 보며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있지, 진아."

 "응."

 "나는 지금을 살고 있어. 더는 그때에 묶여있지 않아."

 "......"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 때문에 너까지 그러지는 마."

 

  지금을 살고 있다는 말. 그게 얼마나 어렵고, 큰 의미를 가졌는지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다.

  하지만 내게 지금이란 시간은, 산다는 행위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크고 간절한 것이었다.

 

 "낯선 지구 반대편에 뚝 떨어졌을 때, 처음에는 온종일 아무 생각도 나지 않도록 몸을 굴렸어."

 

  살을 빨갛게 스치는 굵은 모래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쏘다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몸짓, 발짓, 얼굴 짓으로 대화를 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맨땅에 헤딩해가며 몸을 혹사하면서 밤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밤을 맞아 기절하듯 침대에 누우면 기분이 참 묘했어."

 

  내 자리가 맞나 싶어서 다시 일어나 확인을 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공기가, 냄새가 다르니까.

 

 "죽을 만큼 힘들어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도망쳐 놓고도 내게 익숙한 그 공기, 그 냄새를 그리워하는 거지."

 "......"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런 나 자신이 대견했다! 그래도 생소한 오늘을 또 한 번 살아냈구나. 익숙한 어제에 묶여있지 않구나."

 

  비록 어둠 속으로 숨었을지라도, 그 속에서 갈지(之) 자로 휘청거릴지라도. 나는 오늘을 걷고 있구나.

 

 "그 사실이 그렇게도 안심이 되더라."

 

  새로운 하루하루에 익숙해지고, 이방인으로서 현지인들의 삶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즈음 그를 만났다.

  예의 없고, 부끄럼도 없는 데다 완전 제멋대로여서 때로는 재수까지 없는 녀석. 어둠을 찾아다니는 나와 정반대로 자기가 가진 빛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밝히는 사람.

  나를 계속 끌고 다니는 그를 제멋대로라고 욕하긴 했지만, 나와 너무나 다른 그의 빛이 참 따스해서 나도 못 이긴 척 따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조금 과장하자면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함께 불렀던 노래처럼 그를 통해 빛을 보고, 나 스스로 안개를 걷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불안하긴 하지만 나는 이제 나대로 살려고. 그러니 너도..."

 

  가만히 들어 올린 한 쌍의 작은 바다는 고요했다. 대신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안도와 기쁨, 의문, 불안함 그리고 약간의 서운함까지.

  복합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진이가 입을 떼었다.

 

 "누나 변했네."

 "내가 변했어?"

 "응. 잠깐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변했다는 말이 왜 이토록 두렵게 느껴지는지. 내게는 그것이 곧 실망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 떨리는 음성을 가라앉히고 진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싫어?"

 "아냐. 좋네."

 "정말? 그럼 나 조금만 더 변해도 될까?"

 "응. 괜찮아. 누나니까."

 

  스륵, 꽉 묶였던 매듭이 풀리는 느낌이다.

 

 '괜찮아. 누나니까.'

 

  진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마음 속에서 꽁꽁 매어있던 매듭이 풀린다.

  나 스스로 묶고 엮다 끝내 엉켜버려 도무지 풀지 못할 것 같았던 문제의 끈. 그걸 풀어보겠다고 혼자서 얼마나 끙끙댔는데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이야.

 

 "그리고 여기, 내가 있잖아."

 

  진이가 씨익 웃으며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쳤다. 다부진 주먹과 단단한 목소리가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럽다.

 

 "너한테는 항상 고마워."

 "진짜 변했네. 미안하다고만 하더니."

 "내가 그랬나?"

 

  진이는 의미 모를 미소와 함께 먹음직스런 닭 다리를 내 접시에 놓아주었다. 나는 다시 양손에 포크를 들었다.

  온갖 찌질한 모습을 다 보면서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면서도 곁에 있어 준 진이에게 나도 해줄 수 있는 게 있을까?

 

 "기분이다! 내가 소원 하나 들어줄게."

 "내가 뭘 부탁할 줄 알고?"

 "그야 모르지."

 

  뜬금없는 제안에 진이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무엇이든 제한 없이 들어주겠다는 다짐을 듣고 나서야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짐짓 진지한 얼굴과 턱을 문지르는 손길에 고민이 묻어난다. 상진지 최진이 과연 무슨 소원을 빌지 궁금해 나도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드디어 마음을 정했는지 감겼던 눈이 떠졌다. 은근히 긴장되네, 이거.

  침을 꼴깍 삼키는 나를 본 진이는 눈을 가늘게 늘이고 씨익 웃어 보였다.

 

 "즉흥적으로 날릴 순 없으니까 아껴둬야겠다."

 "에이, 김빠지게."

 

  내 김이 빠지건 말건 진이는 싱긋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청량한 소리와 함께 부딪치는 두 개의 잔 안에서 노란 액체가 가볍게 출렁인다.

  어두운 공간, 노란 조명 그리고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맛있는 음식과 한 잔의 술.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편안하다.

  그때였다.

 

 ~♬♪

 -나 해연 씨네 동네까지 왔어요. 어디예요?

 

 "어머, 문도준 씨 여기까지 왔대."

 "누구? 문도준?"

 "응. 뭐하냐고 물어보길래 우리 둘이 치맥 중이라고 했거든."

 

  밀가루의 이름이 나오자 진이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혹시 불편하면 그냥..."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오라고 해."

 

  진이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위치를 찍어보내고 5분도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여름 더위가 무색할 만큼 모자와 마스크를 꼼꼼히 착용했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후광이 따랐다.

  구석에서 나를 발견한 남자는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다가와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가 만들어낸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눈도 마주치지 않은 그가 내 손에 든 잔을 빼앗아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술김에 발갛게 올라오는 두 볼을 감추고자 나는 불퉁한 목소리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와, 정말 왔네. 아이돌 진짜 할 일 없나 봐."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보니 일이 손에 안 잡혀서요."

 

  붉은 혀로 입술에 묻은 알코올을 닦아낸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묘하게 섹시한 자태에 나도 모르게 몸이 슬금슬금 뒤로 빠진다.

  느릿한 동작으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가 나른한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아래에서부터 내 몸을 따라 천천히 올라온 새까만 눈이 내 얼굴을 오롯이 담았다.

 

 "해연 씨도 내가 보고 싶었잖아요."

 

  그의 입술 끝에 매달려 있던 미소는 이미 증발한 지 오래.

  다 알고 있으니 거짓말할 생각 말라는 듯한 말투와 눈빛에 압도된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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