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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태양이 걷는 순례길
작가 : 에스뗄
작품등록일 : 2017.6.18

인생이라는 고달픈 순례길에서 맞닥뜨린 뜨거운 태양 하나.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그믐달 진해연과 그녀를 쫓는 태양 문도준. 과연 태양과 달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040. 속마음(2)
작성일 : 17-07-13 01:23     조회 : 386     추천 : 1     분량 : 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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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나 사인 하나만 받아주라."

 

  도시락이 담긴 상자를 택시에 실어준 해온이가 말했다. 오늘도 저녁 시간에 맞춰 보내야 하는 도시락 때문에 배달을 가지 못하는 녀석의 얼굴에 간절함이 배었다.

  나는 대꾸 없이 택시에 올라탔다.

 

 "팬이라고 꼭 말해줘!"

 

  멀어지는 해온이가 손으로 확성기를 만들어 뭐라 소리치는 게 사이드미러에 비친다.

  내내 얌전히 다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작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스태프들의 점심 도시락을 들고 차승아 씨의 촬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째 전만큼 가볍지 않다.

  원래도 나보다는 그녀가 더 반가워했지만, 해온의 말을 듣고난 뒤 그녀를 보기가 더욱 껄끄러워졌다.

  내 감정을 인정하고 나니 괜한 질투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림은 상상만으로도 참 예뻐서 질투심은 곧 납득으로 변했다.

 

 "오늘도 반짝반짝 작은 별이네."

 

  카메라 앞에 선 그녀는 오늘도 혼자서 작은 골목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다. 160cm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빛이 골목 끝에서 끝을 가득 채울 기세로 뻗어 나간다.

  그녀의 옷차림은 늘 그렇듯 단순하다. 하늘색 블라우스에 하얀 레이스 치마, 포인트로 손가락만큼 가는 갈색 벨트 하나가 전부였다.

  흔한 액세서리 하나 없었지만, 무릎 위로 훌쩍 올라간 하얀 치마의 레이스가 여성적인 그녀의 매력을 한층 높여주었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내렸다. 'How to love me'란 문구가 적힌 넉넉한 크기의 진회색 면티에 무릎이 살짝 찢어진 흰 스키니진, 그리고 검정 스니커즈.

  빛은커녕 골목 벽에 서면 그늘과 동화될 정도다.

 

 "내가 밀가루라도 차승아 씨를 선택하겠어."

 

  이건 뭐, 고민할 거리도 없겠는걸.

 

 "해연 씨!"

 "잘 있었어요? 오늘도 예쁘네요."

 "고마워요. 해연 씨도 오늘 시크한 멋이 있는데요?"

 

  촬영을 마친 그녀가 언제나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꽃잎처럼 팔랑팔랑 다가왔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은 하얀 얼굴이 더 환해 보인다.

  오늘은 무슨 반찬이 있을까 콧노래를 부른 그녀가 도시락을 열자마자 탄성을 내뱉었다.

 

  보기만 해도 든든하고 배부른 왕새우구이

  얇게 저며 부채처럼 펼친 살치살 스테이크

  방울토마토와 단호박, 가지 등의 구운 채소

  새콤달콤하고 향긋한 고추장 매실 장아찌

  과일치즈와 크랜베리를 곁들인 그린샐러드

 

  붉은색으로 알알이 곱게 물든 흑미밥

  바지락을 넣어 더욱 시원한 미소된장국

  방울토마토, 청포도, 파인애플, 오렌지, 자몽

  도시락에선 처음 보는 수제쿠키와 초콜릿까지.

 

 "녀석, 오늘도 힘 좀 줬구먼."

 

  그런데 이건 우리 메뉴보다 더 비싸 보이는데? 자꾸 이런 식으로 사심을 담으면 월급을 깎아야지, 안 되겠어.

  그래도 이 정도로 지극정성이니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줘도 되겠지. 나는 도시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승아 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정말 미안한데, 혹시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해연 씨 이름으로 해줄까요?"

 "'진해온'이요. 제 동생이 승아 씨 팬이거든요."

 "아, 이 도시락을 만드신다는 동생분?"

 

  그럼 더 예쁘게 해드려야지, 라고 중얼거린 그녀가 시원하게 손을 움직여 내려갔다. '항상 맛있는 음식 감사드려요♡'라는 예쁜 메모도 빼먹지 않았다.

 

 "진해온 오늘 계 탔네."

 

  메모를 적던 그녀가 시선을 종이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긋한 음성은 여자인 나의 귀도 녹일 듯 달콤했다.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을 듣는 순간 쌉싸름하게 변했지만.

 

 "혹시 도준이 어떻게 지내는지 아세요?"

 "글쎄요. 저보단 승아 씨가 더 잘 알지 않아요?"

 "아, 그게... 요즘 서로 바빠서 못 만나고 있거든요."

 

  그녀에게서 받은 종이를 들고 동글동글 예쁜 글씨체를 감상하던 나는 밀가루의 사랑을 받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에 물음표를 띄웠다.

  해온이의 말을 듣고 난 이후, 내 머릿속에서 두 사람은 이미 사귀고 있는 사이로 결론이 났다. 얼마나 바쁘면 연인 사이에도 연락을 못 하지?

  음, 며칠 전 SOUL 멤버들과 화보 촬영차 영국에 간다는 말을 듣긴 했다.

  그러고 보니 작업실에서 도시락을 만든 뒤에는 이런저런 일정으로 나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다.

 

 "이것 봐요. 귀엽죠?"

 

  그녀가 내 얼굴 앞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 옆에서 구슬로 만든 작은 인형이 웃는 얼굴로 달랑거렸다.

  동그란 눈에 까만 작은 코, 하얀 털옷을 입은 예쁜 아기곰이란 동요가 생각나는 작은 곰돌이였다.

  요즘에도 핸드폰 고리를 쓰나?

 

 "그렇네요."

 "도준이가 만들어준 거예요. 데뷔 때부터 워낙 허물없이 지냈거든요. 해연 씨랑 있을 때는 어때요?"

 "글쎄요. 우린 약간의 허물이 있는 사이라..."

 

  따지고 보면 약간도 아니고, 허물이 많은 사이지. 돈으로 얽혀있는 사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이유는...

 

 "예의 바르고 진실한 사람인 것 같긴 해요."

 

  그는 언제나 상대를 존중하는 사람이었고, 요행보다는 노력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원했다. 그가 진실한 사람이라는 것은 맑은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내가 나직이 꺼낸 말을 들은 그녀가 턱을 괴고 도로록, 눈을 굴렸다. 곰곰이 생각한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건 아마 할아버지의 영향이 클 거예요."

 "할아버지?"

 "도준이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자랐거든요."

 

  그랬구나. 전혀 몰랐어.

  워낙 귀티가 나는 얼굴이기도 하고, 행동에서도 그는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났다. 그래서 당연히 부모님에게 사랑받으며 부족함 없이 살았을 거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조부모님이 정말 잘 키워주셨구나.

  부모님의 부재에도 그늘 하나 없이 자란 그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눈앞에 있다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로.

 

 "아, 맞다. 해연 씨. 나 좀 도와줄래요?"

 

  도시락과 함께 온 차가운 레몬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손을 모아 손뼉을 치더니 옆에 있던 가방을 열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우아한 손길에 눈이 머무른다.

  눈웃음이 예쁜 여배우 1위에 빛나는 이력, 때 묻지 않을 것 같은 순수한 얼굴, 같은 여자가 봐도 아름답고 단아한 여신이란 수식어는 괜히 따라붙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녀는 지난번 작업실에서 말했던 밀가루의 이상형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허리까지 내려가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우유 푸딩처럼 뽀얗고 탱글탱글한 피부는 분명 그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하지만 그의 이상형은 달랐다.

  무엇보다 그녀는 고집이 세 보이지 않는다. 동그랗게 휘어지는 눈꼬리는 작고 동그란 새끼 강아지를 떠올리게 한다.

 

 '한 번이라도 그냥 네, 라고 하면 지구가 멸망해요?'

 '정말 어려운 여자라니까.'

 

  여러 번 구박을 들은 나에 비하면 이 여자는 밀가루가 하는 말에 언제나 싱긋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줄 것만 같다.

  뭐, 이상형은 아니라도 이 정도면 완벽하지. 모든 남성이 원하는 여자 친구상이랄까. 그러니 좋아하는 거겠지.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니까.

  그래. 같은 여자가 봐도 이렇게 예쁜데, 남자는 오죽하겠어.

 

 "이 둘 중에 어떤 게 더 나아요?"

 

  그녀가 가방 속에서 두 개의 모자를 꺼내 들었다.

  검정색 바탕에 각각 빨간색과 파란색 자수로 브랜드명을 박은 것이었다. 예전에 내가 썼던 밀가루의 스냅백과 비슷하게 생겼네.

 

 "도준이가 모자를 워낙 좋아하잖아요."

 

  그랬던가? 나는 정말로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없구나.

  밀가루는 하다못해 츄러스라도 사다 줬는데. 그것도 이태원에서 제일 맛있다는 집에서.

  그녀가 두 개의 모자를 번갈아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선물하기 위해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내 입은 왜 이리 쓸까?

 

 "역시 빨간색이 나을까? 예전에 같은 색 팔찌를 선물해줬는데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요."

 "아..."

 "도준이는 언제나 열정적이니까."

 

  이 사람이었구나.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팔찌를 선물해준 사람이.

  나는 모르는 밀가루와의 시간을 공유한 그녀는 그에게서 열정을 보았나 보다.

  열정이라는 말을 담은 그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고, 설탕을 녹인 홍차처럼 붉고 달콤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좋아했던 사람이 준 거라서요.'

 

  미소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슴이 묵직해졌다. 왜 하필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 걸까. 마음을 사르르 녹이는 분홍색 솜사탕을 닮은 그녀 때문에 속이 상한다.

  이 여자를 위한 연극이라는 것, 이미 알고 시작한 일이잖아. 차곡차곡 통장에 쌓이는 금액이 우리의 관계를 증명해주고 있잖아.

  서운해하지도, 나쁘게 생각하지도 말자. 이미 임자가 있는 사람은 애초에 마음에 담지도 말자. 그게 맞는 거야.

 

 ~♬♪, ♬♪

 -뭐해요?

 -나 지금 귀국했어요.

 

  딩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까만 액정에 두 개의 문장이 연달아 떴다.

  정말 귀신같다. 어쩜 이런 시점에 딱 맞춰 연락을 하는지.

  그와 연결된 두 문장에 심장이 다시금 콩닥콩닥 뛴다. 그가 사랑한다는 여자를 앞에 두고도 눈치 없이 뛰는 가슴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얼음 땡 놀이를 했을 때와는 다르게 온몸에서 기운이 빠진다. 밀가루고 차승아 씨고 뭐고 간에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다.

 

 "문도준 씨 한국 왔나보네요."

 "응?"

 "방금 도착했대요."

 "아, 그래요?"

 "전 이만 가볼게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밝았던 그녀의 얼굴에 아주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 사라졌다. 그녀가 풍성한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고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속눈썹이 가린 오색 구슬을 닮은 눈이 서늘해지자 나는 순간,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인형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 모자는 승아 씨 뜻대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승아 씨가 주는 선물이잖아요."

 "그래도..."

 "자기를 생각하면서 고른 거라면 분명 좋아해 줄 거예요."

 "고마워요. 오늘 만나자고 연락해봐야겠다."

 

  그녀의 눈에 깃들었던 서늘함은 금세 사라졌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는 그녀를 뒤로하고 돌아섰다.

  그늘을 나서자마자 나는 해온이를 위해 받은 종이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비가 오려는지 숨이 막힐 정도로 습한 공기와 더위가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다.

  평소라면 산책할 겸 걸어서 갔을 테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안 될 것 같다.

 

 "머리도 비울 겸 오늘은 버스를 타고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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