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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태양이 걷는 순례길
작가 : 에스뗄
작품등록일 : 2017.6.18

인생이라는 고달픈 순례길에서 맞닥뜨린 뜨거운 태양 하나.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그믐달 진해연과 그녀를 쫓는 태양 문도준. 과연 태양과 달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039. 속마음(1)
작성일 : 17-07-13 01:21     조회 : 384     추천 : 1     분량 : 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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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 8

 

 "오케이, 컷!"

 "수고하셨습니다!"

 

  컷 사인이 난 것과 동시에 밀착한 채로 감정을 잡고 있던 남녀 배우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떨어졌다.

  조연출의 외침을 신호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파도가 밀려 나가듯 흩어지기 시작했다.

  매미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린 좁은 골목에서는 촬영이 한창이다.

  밀가루가 찍었던 드라마의 배턴을 이어받아 승승장구하고 있는 차라 스태프들의 얼굴이 더 없이 활기차다.

 

 "읏차."

 

  촬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아빠는 트렁크에 가득했던 상자를 하나하나 내리고서 허리를 두드렸다.

  비록 과일 간식이지만 150인분은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수고했어요."

 

  나는 아빠의 허리를 두드려주고 서포터즈에서 보내온 현수막과 배너를 마저 챙겨서 매니저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저녁 과외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던 나는 마침 촬영장이 근처라 연예인 구경도 할 겸 쫄래쫄래 동행했다.

  간식을 받는 여배우의 팬인 진해온도 따라오겠다고 나섰다가 마늘 더미의 공격에 파묻혀 전사하고 말았다.

 

 "와, 맛있겠다!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니저의 부탁으로 간식을 한쪽에 진열하는 중이었다.

  긴 생머리를 다소곳이 모아 왼쪽 가슴으로 넘긴 여자가 다가와 설탕 한 스푼이 담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저 멍하니 구슬같이 맑고 투명한 미녀를 쳐다봤다.

  검은 긴 생머리에 하얀 원피스가 참 잘 어울렸다. 그녀의 몸 전체에서 자연미인이란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싱그런 자연스러움이 배어났다.

 

 "아, 팬들이 보내준 스티커 속 미녀와 같은 얼굴."

 

  보통은 매니저가 오는지라 본인이 직접 와서 인사하는 경우는 라희와 밀가루 이후 처음이다.

  차승아랬지? 인사도 말도 개념 있는 여자네. 좋은 기사만 따라다니는 사람은 다 이유가 있구나.

  진열된 간식 중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본 그녀가 박수를 짝, 치며 목소리를 냈다. 오색구슬을 닮은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늘해랑! 나 여기 알아. 도준이가 촬영했던 곳 맞죠?"

 

  안 그래도 밀가루가 촬영을 다녀간 이후로 SOUL과 타 그룹 팬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 최근 주문량이 대폭 늘어났다. 이러다 서포트 전문이 되는 게 아닐까 배부른 걱정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팬덤뿐 아니라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알려진 모양이다.

  의아할 만큼 반가움을 표시하는 그녀 덕에 얼음 땡 놀이 이후 애써 덮어두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해연 씨 성격에 돈은 더더욱 안 받을 것 같고. 그렇다면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야 하는데...'

 '듀엣은 그 중 하나예요.'

 

  생각해낸 방법이란 게 이런 걸 말한 거였나?

  이게 바로 밀가루의 파워라 생각하니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네.

  도준이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억지로 붙잡아둔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발딱발딱 뛰는 가슴이 내 것이 맞나 의심스럽다. 이것 참 큰일이네.

 

 "도준이 지인 가게에서 촬영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제가 다른 방송에 스태프로 참여했다가 알게 됐어요."

 "아, 그랬구나. 잠시만요."

 

  유리구슬 같은 두 눈을 예쁘게 접은 그녀가 주머니에서 작은 미스트를 꺼내 공중에 뿌렸다. 허공에서 흩어지는 입자 사이로 자잘한 햇빛이 파고들었다.

  향긋한 내음에 저절로 시선이 따라간다. 눈을 감고서 작디작은 물방울들을 맞고 있는 그녀는 마치 CF라도 찍는 것처럼 청순하다.

 

 "좋은 향기가 나네요."

 "작년 생일에 도준이가 선물해줬는데 향이 좋아서 계속 사서 쓰고 있어요."

 "아, 네."

 "한번 뿌려보실래요?"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이 여자는 왜 자꾸 도준이, 도준이 거려? 불편하게. 나름대로 공통점이라 이건가?

  나를 흘긋 쳐다본 그녀가 머뭇거리며 두 손을 얌전히 모아 쥐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마침내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나온 말은 역시나 같은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혹시 도준이랑 연락도 하시나요?"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공적인 일로만 해요."

 

  명의를 빌려주고 가끔 여자친구 연기를 하는 건 사적인 일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야. 회사도 알고 있으니 공적인 것에 가깝겠지.

  나조차도 헷갈리는 대답에도 그녀의 얼굴색은 확연히 밝아졌다. 두 손을 짝, 마주친 그녀가 불쑥 내 손을 마주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영문도 모른 채로 손을 잡힌 내가 당황하건 말건, 그녀는 예쁜 눈을 초승달처럼 접었다. 옅은 분홍빛을 띤 탐스러운 입술은 꽃잎을 연상시켰다.

 

 "해연 씨라고 했죠? 친하게 지내요, 우리."

 "네?"

 "아까 언뜻 들었어요. 스물아홉이라고. 여기서 동갑 친구 만나기 쉽지 않거든요."

 "마음은 고맙지만 제가 유명 여배우랑 친구할 급은 아닌 것 같아요."

 

  그녀는 완벽한 거절에도 싱긋, 산뜻한 미소를 띄웠다.

  애초에 정색이란 걸 모르는 사람처럼 구김 없는 미소는 보는 이의 마음도 펴지게 했다.

  그녀가 다시 마디 말을 건네려던 찰나, 아까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조연출이 그녀를 부르며 달려왔다.

  그녀는 진한 아쉬움이 담긴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아쉽네. 대신 다음에는 더 친근하게 인사해요, 우리."

 "네. 그럼 촬영 잘하세요."

 

  연예인치고 사람이 괜찮네. 예의도 바르고, 적당한 선도 지킬 줄 알고.

  예쁜 사람은 성격이 안 좋을 것이라는 나의 고정관념을 그녀가 깨주었다.

  유일하게 아는 두 명의 연예인과는 전혀 다른 첫인상을 남긴 그녀를 보내고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빠를 향해 달렸다.

 

 

 *

  이글거리는 태양이 달궈놓은 지면에서 아지랑이가 보이는 오후, 나는 작업실의 작은 방에 앉아 저녁에 있을 과외를 준비하는 중이다.

  거실에서 말린 키위를 정리하다 말고 작은 방에 들어와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있던 해온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박! 차승아 SNS에 또 우리 도시락 인증샷 올라왔다.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지?"

 "네 눈에는 뭐든 안 예뻐 보이겠니."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를 본 날 바로 차승아의 팬카페에 가입해 거의 매일 들락 달락 거리며 팬질 중인 해온이였다.

  그러니 녀석이 그녀의 서포트 도시락에 더더욱 열의와 애정을 쏟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촬영장에 다녀올 때마다 나를 붙들고 그녀에 관해 묻는 통에 몇 대 쥐어박고 싶을 때도 있지만.

 

 "실물은 어때? 완전 여신이지?"

 "응. 연예인 후광이란 게 있긴 하더라."

 "다음엔 내가 배달 가볼까?"

 "제발 그래줘라."

 

  작업실 근처에 드라마 촬영장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꼴로 서포트 도시락 주문이 들어왔다.

  그때마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작은 새를 닮은 목소리로 재잘재잘 내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문도준랑 사귀었다는 소문 있었는데. 문도준이 완전 빠져있었다고 했지, 아마?"

 "도준 씨 열애설은 이번이 처음이라던데?"

 "소속사끼리 다 막았겠지. 알 사람은 알걸?"

 

  아, 그래서 밀가루에 관해 물어봤던 건가?

  그녀는 나를 마주칠 때마다 지겨울 정도로 밀가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밀가루 역시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나에게 가짜 연애를 제안한 것이었다.

 

 "그럼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차승아씨였나?"

 

  비로소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그랬구나. 소속사."

 

  갑자기 기운이 빠져 연필을 놓칠 뻔했다.

  지난번에 한강에서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한 뒤, 그의 소속사에서 돈이 입금되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해온이의 말에 따르면 바로 내가 두 사람의 연애를 막아주기 위한 유인책이었다.

  중세시대 등 과거에 살수를 속이기 위해 대리인을 세워 현혹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다. 그리고 그 대리인 10명 중 8명은 죽음을 맞았지.

 

 "어차피 돈 받고 도와주고 있는 입장이니 내가 바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막상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니 속은 기분이 든다.

  나한테 했던 말과 행동을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 달콤하게 그녀에게도 했겠지.

  떡 줄 사람은 마음도 없는데 괜히 나만 설레고 떨렸구나.

 

 "그런데 문도준이랑은 어떻게 알았어?"

 "볼리비아에서 모금방송 때문에 만났어. 스페인에 통역하러 간 프로그램에서도 만났고."

 "그러고 보니 누나도 용케 사람들 따라 스페인까지 다녀왔네."

 "그러게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밀가루와의 만남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역시 이성적인 감정이 생기지 않을 거란 말을 믿고 그의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인 게 잘못이었을까?

  나는 손에 든 연필로 하얀 종이를 벅벅 문질렀다. 점점 까맣게 변해가는 종이와 달리 내 머릿속은 점점 하얘지는 기분이다.

 

 "누난 이제 괜찮은 거야?"

 "그럭저럭."

 

  스치듯 물어오는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 집에서 그때의 일을 꺼내는 것은 금기와 같으므로.

  그냥 보면 평소와 다를 바 없지만, 2년이 다 되도록 부모님과 해온이 중 그 누구도 그 일을 말하지 않는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들이 나를 기다려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 스스로 쳐둔 무시무시한 철조망을 거둬내고 나와주기를.

 

 "그땐 너 혼자 감당하게 해서 정말 미안했어."

 "감당할 게 뭐 있어. 난 그냥 학생이었는데. 누나야말로 숨통을 트일 곳이 필요했잖아."

 "응. 살려고, 살려고 그랬어."

 

  사실 살고자 하는 마음이 그리 간절하진 않았다.

  가능하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죽은 듯이 숨만 쉬고 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살아야 했다.

  내 등을 떠미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일어서야 했다. 그게 두 분이 눈물을 삼키며 생살을 떼어낸 노력에 보답하는 길이었다.

 

 "그럼 됐어."

 

  무심하게 대꾸한 녀석이 키위를 마저 골라내야겠다며 지나쳐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서운하겠다 하겠지만, 이것이 녀석의 배려방식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관심 없다는 듯,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한 표정과 무심한 목소리로 안심을 준다.

  왕창 싸우고 난 뒤에도, 아끼는 장난감을 내가 실수로 부쉈을 때도. 빨갛게 부은 눈을 하고 돌아온 녀석은 언제나와 같이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옆자리에 누워서 잠을 잤다.

 

  Trrrrr...

 

 "응, 라희 씨."

 -언니. 차승아한테 서포트 갔어요?

 "응.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SNS에 떠서 알았어요.

 "그렇구나. 사람이 참 괜찮더라고요."

 -그거 다 연기야. 속지 마요.

 

  라희야.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나도 본 게 있잖니?

  바로 그 점이 볼리비아에서 우리가 친해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꾸욱 눌렀다. 웃음을 가까스로 참느라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나쁜 사람이에요?"

 -아뇨. 그런 언니는 아니에요. 다만 예쁜 여자들이 착하게 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랄까. 암튼, 나 다음 주 도시락 주문해도 돼요?

 "그래요. 몇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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