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자발적으로 얼음 동상이 되어가던 그때, 밀가루의 뒷편에서 반갑고도 고마운 낭랑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언니, 저 물 좀 주세요."
"라희 씨?"
나의 구세주 라희가 간절한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 나타났다. 덕분에 나는 극적으로 얼음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 너머에서 빼꼼 얼굴을 내민 라희에게 잠시 시선을 옮긴 밀가루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채라희."
"단 걸 먹었더니 목이 말라."
"괜찮아요! 이쪽으로 와요!"
"해연 씨, 잠..."
나는 얼른 밀가루의 손을 떼어놓고 후다닥 창고를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그가 얼음이 되어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곧장 주방으로 달려가 라희에게 시원한 물을 따라주고 나도 차가운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드득 아드득, 입안이 얼얼하도록 얼음을 가득 물고 굴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파래질 때까지 씹어 먹을 생각이다.
달라던 물은 마시지 않고 창고 쪽을 가만히 보고 있던 라희가 툭 던지듯 말했다.
"두 사람, 그새 엄청 친해졌네요?"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아까 보니까 대화도 편하게 하고, 열도 재어주고."
아, 그걸 라희가 봤구나. 혹시 여자친구 어쩌고 한 걸 듣진 않았겠지?
라희는 여전히 창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깨를 으쓱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객관적으로는 열을 재는 행위일 뿐이지만 누군가 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금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저기, 아까 그건..."
"하긴. 오빠가 워낙 스킨십을 잘하는 편이긴 해요. 그래서 괜히 자기한테 관심 있는 줄로 오해하는 애들 많았어요. 어휴, 모자란 것들."
"아, 그래요?"
뜨끔.
한심하다는 눈짓과 함께 혀를 쯧쯧 차는 라희를 보며 나는 괜히 찔리는 맘에 다시 찬물을 들이켰다.
원래 스킨십을 좋아하는 성격이구나. 아무런 감정 없이 한 행동에 나만 숙맥처럼 어쩔 줄 몰라했네. 설마 티가 많이 나진 않았겠지?
"걔네가 오해할 만도 해요. 오빠는 친절하게 대하는 것뿐이라고 하는데, 그 친절이 남을 들었다 놨다 하는 줄은 모르거든요."
"도준 씨가 잘못했네."
"응응. 완전."
본의 아니게 여러 차례 들렸다 놓인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농담을 건넸다. 라희가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느긋한 동작은 나 혼자 하고 있던 얼음 땡 놀이의 완벽한 땡을 쳐주었다. 고맙다, 라희야.
"그런데 언니는 조금 다..."
"라희! 의상 확인하려면 지금 출발해야 해."
라희의 매니저가 다가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깡마른 몸만큼 딱딱한 말투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은테 안경 너머의 날카로운 눈매는 다시 한번 손목시계로 향했다.
매니저의 재촉에 라희는 뜨거운 냄비처럼 얼굴을 벌겋게 달구고 신경질을 냈다. 고양이를 닮은 눈매가 바짝 올라갔다.
"아, 짜증! 아무튼, 저 오빠는 내가 쉬는 꼴을 못 봐요. 저 먼저 가봐야겠어요."
"아, 라희 씨. 잠깐만."
나는 얼른 작업실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종이가방 하나를 들고 나왔다.
가방에는 해온이에게 부탁해 미리 만들어둔 도시락과 라희가 좋아하는 자몽 청이 들어있다.
"어제 과외 끝나고 챙기느라 편지 쓸 시간은 없었네."
얼른 가방 속을 살핀 나는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희에게 가방을 내밀었다.
"선물."
종이가방을 들여다본 라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안 그래도 큰 눈이 길게 뻗은 아이라인 때문에 나의 세 배 정도는 된 것 같다.
"언니이..."
라희는 커다란 눈 가득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가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진작 챙겨줄 걸 그랬나 봐.
"대박! 언니 이러기예요? 대박 감동, 미친 감동!"
"또 먹고 싶으면 언제든 전화해요. 라희 씨는 특별히 예약 없이도 갖다 줄게."
"꺄악! 언니 사랑해요!"
라희는 나를 있는 힘껏 꼬옥 껴안았다. 하이탑 슈즈를 신어 나보다 훨씬 위에 있는 그녀이지만 오히려 내 품에 쏙 들어왔다. 마치 고양이 한 마리를 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라희는 매니저의 재촉에 소리를 한 번 빽 질러주고는 총총 문밖으로 사라졌다.
"나 참, 저러니 남자들이 안 반해?"
나는 현관에서 라희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다가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온 해온이에게 물었다.
"있지. 나도 라희처럼 애교가 있다면 어떨까?"
"그런 말 하지 마라. 상상만으로도 무섭다."
나는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팔꿈치로 정확히 해온이의 명치를 가격했다. 녀석은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엄살을 피웠다.
그러게 어디 하늘 같은 누님을 공포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하긴, 해온이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애교도 젊고 예쁜 애들이나 해야지. 나 같이 나이 들어서는..."
라희를 배웅하고 돌아온 작업실 안에서는 어느덧 쉬는 시간도 끝나고 촬영이 재개되었다.
반소매 티셔츠와 7부 바지로 가볍게 갈아입은 밀가루도 다시 조리대로 돌아와 팬들에게 전할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아, 저 이 꽃 알아요. 오렌지꽃! 이 꽃에도 추억이 있는데..."
스페인에서 가져와 말린 오렌지꽃을 붙인 카드에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는 그의 모습을 카메라가 놓치지 않고 담는다.
편지 쓰랴, 카메라를 향해 이야기하랴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쁘다.
그래도 탄산수를 닮은 미소를 팡팡 터뜨리는 그의 모습은 카메라 안에서 더욱 빛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자자, 바로 이동할게요!"
수많은 카메라와 조명이 철수하고, 기계를 연결한 선들을 감는 손들이 분주하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로 밀가루는 도시락을 들고 밴에 올라탔다.
드디어 끝났나 했더니 밀가루는 이제부터 완성된 도시락 들고 팬들에게 직접 배달을 간다고 했다.
"그럼 이 촬영은 언제 끝나요?"
"현재 시각이 오후 3시인데, 자정까지 배달을 마치는 게 목표예요."
알고 보니 SOUL의 5명 멤버들이 모두 25명의 팬을 위해 각각 다른 선물을 준비해서 감동을 주는 이벤트라고.
"요즘 팬들은 참 좋겠네."
"그렇죠? 우리 때는 이런 게 없었잖아요."
예고 없이 짠! 하고 나타난 오빠가 나만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건넨다면 아마 평생의 소중한 추억이 되지 않을까?
"아이고, 이건 또 언제 다 치운다니?"
"좀 쉬었다 해. 몸살 나겠다."
촬영 장비와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한차례 태풍이 지나간 듯하다.
밀가루도 제대로 인사할 틈도 없이 카메라와 함께 쓸려나갔다
예정에 없던 인터뷰까지 한 해온이도 한 시간만 자야겠다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 청소해야 하는데."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기운이 빠진다. 정말 몸살이라도 걸리려고 이러나?
나는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가 나가고 난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매일 보는 조리대가 오늘따라 유독 비어 보인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감정소모가 많았던 하루다.
어릴 때 친구들과 했던 얼음 땡 놀이를 마음속에서 한바탕하고 나니 머리가 멍해졌다.
~♬♪
-조리대 옆으로 가봐요.
떠난 지 5분도 되지 않아 밀가루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조리대 옆에 뭐 두고 간 게 있나?"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지령을 따라 도착한 자리에는 아까 만든 도시락 하나와 약 봉투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도시락 위에는 오렌지꽃 편지지가 붙어 있었다.
「소원 13. 서로를 위한 요리 해주기. 다음엔 해연 씨 차례예요.」
동그랗고 길쭉한 글자들이 흐트러짐 없이 줄지어 섰다.
보통 글씨체는 글 쓰는 이의 성격을 드러내 준다던데 차분하고 정직한 그의 글씨는 내가 아는 밀가루와 조금 달랐다.
이렇게 오늘도 그의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볼 때마다 새로우니 다음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그나저나 이 도시락을 날 위해 만들었다는 건가?"
팬들 선물을 준비하면서 내 것까지 신경써 준 그의 세심함에 아주 조금 감동할 뻔했다.
"그런데 이 약은 뭐지? 이거야말로 놓고 간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아픈가? 운동으로 다져진 몸과 생글생글한 미소는 평소 아픈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는데.
~♬♪
-내가 몸살 났을 때 먹는 약이에요. 밥 먹고 30분 후에 먹으면 돼요.
"아, 이것도 나 주는 거야?"
초록색 십자가가 그려진 약 봉투를 열어보니 꼼꼼하게 아침, 점심, 저녁이라 적어놓은 투명한 줄봉투에 담긴 환이 있었다.
"으으, 엄청 쓰게 생겼어. 단 것 좋아한다더니 약은 엄청 쓴 거로 먹네."
환을 한입에 털어 넣고 부르르 떨며 잔뜩 찡그린 그의 얼굴이 상상되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자가 어쩜 이렇게 세심한지.
"고맙다고 답장이라도 보내줘야겠다."
그러나 연달아 날아오는 문자에 답장을 적으려던 손은 다시 멈춰섰다.
~♬♪, ♬♪
-얼굴에 열나고 손도 차던데 얼른 약 먹고 일찍 자요.
-내일 봐요.
두 개의 문자를 보는 순간, 가슴 한쪽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 온몸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얼음물로 간신히 가라앉힌 얼굴이 다시금 발그레하게 물든다.
모르는 사이 배시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핸드폰을 던지듯 떨어뜨렸다. 설마 내가 지금 밀가루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그 녀석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녀석이 날 들었다 놨으면 난 그냥 얌전히 내려가면 되는 거야.
그런데 왜 자꾸 그 녀석의 웃는 모습이 생각나는 거야?
왜 녀석만의 향기가 떠오르는 거야?
대체 왜 이 심장박동은 가라앉질 않는 거야?
"말도 안 돼. 미쳤어, 진해연."
눈길을 두는 곳마다 분홍 앞치마를 두른 밀가루가 홀로그램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조리대, 냉장고, 창고, 잠시 쉬겠다고 앉았던 거실 소파까지.
하필 적막함마저 감도는 작업실에는 땡을 쳐줄 사람도 없다. 그럼 나 혼자라도 칠 거야!
"정신 차려, 진해연. 땡땡땡땡땡!!!"
♬♪
네가 내 옆을 휙 지나갈 때
방긋 웃는 미소로 날 볼 때
그때 어떻게 되는지
네가 내 머릴 쓰다듬을 때
네가 내게 '안녕'이라고 인사해줄 때
그때 어떻게 되는지
내 몸이 꽁꽁 얼어붙어 버려
나 혼자 얼음 땡 얼음 땡 얼음 땡 얼음
누가 쳐주지 않는지
혼자 한동안 얼음 땡 얼음
늦은 밤 네 문자에도
Tonight 네 전화에도
어쩌다 마주친 눈에도
나 혼자 자꾸 얼음 땡 얼음
♬♪ 최낙타 - 얼음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