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서울, 늘해랑 작업실
"우와, 언니네 주방 대박. 나도 이런 주방 있으면 맨날 요리하겠다. 캐부럽."
"요리 좋아해요?"
"완전 완전! 나 먹방 하는 거 봤죠? 그거 연기 아니에요."
베란다를 통해 들어온 햇살이 하얀 공간을 더욱 빛내주는 늘해랑 작업실의 주방을 멀리서 꼼꼼히 둘러본 라희는 언제나처럼 내 팔에 매달려 온갖 탄성을 내질렀다.
라희는 나와 대화하는 중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사근사근한 눈웃음을 던지는 걸 잊지 않았다. 역시 오늘따라 그녀의 말투가 평소보다 양호하게 느껴지는 게 나만의 착각은 아닌 것 같다.
나의 시선 끝에는 해온이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샌드위치 속을 만들고 있다. 그 옆에는 하얗고 기다란 남자 한 명이 조명을 한가득 받으며 유부초밥을 만들고 있다.
"제가 오늘을 위해 개고생을 했나봅니다."
"여기가 내가 누울 자리인가?"
두 명의 훈남 요리사를 바라보는 스태프들의 얼굴에 훈풍이 돈다. 특히 오늘따라 여자의 비율이 많아 꺄르르 소리가 연신 끊이질 않는다.
오늘 하루, 팬들에게 도시락을 만들어 선물하고 싶다는 밀가루의 요청으로 가게를 휴업하고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냥 요리가 아니라 촬영이라는 점이 애꿎은 진해온의 긴장지수를 극대화 시켰지만.
"와아, 젊고 잘생긴 쉐프님이 요리도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뻣뻣한 로못 같기만 한 해온이를 PD는 계속해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여자라 그런가?
쑥스러워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해온이에게서 시선을 옮긴 PD가 이번에는 그 옆의 밀가루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준 씨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에요?"
아, 진부해. 이게 무슨 연애 프로그램도 아니고. 대답 전에 저 PD에게 도시락과 이상형의 상관관계에 대해 300자 내로 논술하라 말하고 싶다.
주방에 있기엔 지나치게 수려한 외모로 고슬고슬하게 양념한 밥을 유부에 넣고 있던 밀가루가 고개를 들고 카메라를 응시했다.
"음, 글쎄요."
여자의 로망 흰색 셔츠를 팔목까지 걷어 올리고 분홍색 체크무늬 앞치마를 두른 그의 모습은 팬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상큼하다.
눈을 굴리며 고민한 그가 손등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얀 이마가 드러나며 조명 빛을 반사했다.
작가들의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를 향해 두 눈을 가늘게 늘리며 웃어준 그가 입술을 열었다.
"음, 일단 머리카락은 어깨를 조금 넘는 반 곱슬이면 좋겠어요."
"남자의 로망은 긴 생머리 아닌가요?"
"저는 아니에요. 그리고 색깔은 초콜릿 색이어야 하고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PD의 질문에 밀가루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독특한 취향이긴 하다.
애매한 길이와 반곱슬은 여자들이 기피하는 스타일 아닌가?
라희에게 물음표를 던지자 그녀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하긴, 넌 매일 관리를 받는 아이지.
유부초밥을 한쪽으로 옮기고 과일을 씻기 위해 물을 트는 밀가루에게 PD가 이번에는 연장선상의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성격은요?"
"음, 자기주관이 뚜렷한 사람이요. 고집은 있되,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깔린 사람."
아리송한 답변에 PD와 작가들의 고개가 다시 한번 갸웃했다. 더불어 나의 고개도 그들을 따라 기울어졌다.
타인에 대한 애정과 자기 고집이라. 뭔가 모순적인 말이다. 예전부터 독특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오늘 이상형을 들으니 확실해졌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데 그가 방금 막 생각난 듯 급히 덧붙였다.
"아, 그리고 막 튕기다가도 제가 조르면 못 이긴 척 들어줘야 해요."
"어렵네요."
PD의 말이 맞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니? 그냥 화면 속 여인을 만나는 것이 편할 듯. 넌 그러다 평생 혼자 살아야겠다.
"아직 어려서 뭘 모르네."
"오빠가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라요."
라희가 자몽에이드에 꽂은 빨대를 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희 너도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둘 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데뷔해 매니저를 비롯한 주변 사람의 손길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이기적으로 보일 만큼 버릇이 없다가도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너무 어렵다면 앞의 것 다 취소해도 돼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앞서 말한 내용을 지워낸 밀가루가 여유 있게 주방을 둘러봤다. 그러다 카메라 뒤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가 카메라를 보는 것인지 나를 보는 것인지 모를 시선과 함께 묘한 미소를 띄웠다.
"그저 햇살을 닮은 미소로 날 바라보고, 달빛처럼 은은하게 감싸 안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면 돼요."
말을 마친 밀가루는 작정하고 여심을 홀리려는 듯 붉은 입술을 한쪽으로 말아 올렸다. 작가들의 행복한 비명이 귓가를 때렸다.
그와 동시에 카메라를 통과하지 않은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피하고 또 피해도 그의 시선은 집요하게 얽혀 들어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격에 나는 그 자리에서 얼음처럼 얼어버렸다.
"잠깐 쉬었다 갈게요."
샌드위치와 유부초밥, 과일이 전부인 도시락이어서 조리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거기다 해온이의 도움으로 시간이 훨씬 단축되었다.
제 임무를 수행하고서 긴장으로 녹초가 된 해온이는 작업실에 딸린 작은 방으로 피신을 갔다.
이제 겨우 두 달 된 햇병아리 요리사가 촬영이라니 힘들만도 하지.
지친 해온이를 대신해 내가 쉬는 시간 동안 창고에서 도시락 상자를 챙겼다.
"6개라고 했지?"
나의 키를 고려하지 않은 선반의 맨 위에 있는 뚜껑을 꺼내는 건 언제나 곤욕이다. 정작 도시락 포장은 거의 내가 하는데 말이지.
마음의 준비를 마친 나는 발꿈치를 들고 최대한 팔을 높이 뻗었다.
그때 바로 등 뒤에서 이제는 익숙해진 어떤 향기가 풍겼다. 그리고 향기의 주인이 선반 위의 뚜껑을 내려 내게 내밀었다.
"여기요."
"아,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런데 뚜껑이 오질 않는다? 아무리 힘을 줘도 밀가루의 손에 들린 뚜껑은 요지부동이다.
내가 낑낑대자 머리 꼭대기에서 짓궂은 웃음소리가 흘러내려 온다. 이 자식이 또!
나는 밀가루가 내민 뚜껑을 뺏어 들고 곧장 창고를 나서려 했다. 하지만 그가 마치 럭비 선수처럼 나를 막아서는 바람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내가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 또 오른쪽으로 막아섰다. 대체 왜 이러나 싶어 올려다봤더니 이놈이 선반에 손을 얹고 또 탄산수 미소를 던진다.
두르고 있던 분홍 앞치마를 벗고 왔는지 얇은 흰 셔츠 한 장만 달랑 남았는데, 그것이 속이 비칠 정도로 얇은 데다가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쳐 여자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나 어땠어요?"
"음, 요리하는 남자는 역시 매력 있네요."
"이런, 나한테 반하면 곤란해요."
"뭐래."
멋지긴 했다. 브라운관을 통해 보는 것도 나름의 멋이 있었지만, 카메라 모니터를 속 아직 정제되지 않은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반할 정도는 아니었다. 분홍분홍한 앞치마 역시 팬들이나 좋아할 아이템이지, 내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의 워너비 귀요미 고창석 님이 둘렀으면 또 모를까. 가래떡 같은 녀석이 두르니 분홍 앞치마의 매력이 반감됐다.
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심한 대꾸에도 자신감 충만한 표정의 밀가루는 내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나한테 폭 빠진 눈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감도 과하면 병이랍디다."
"흐흥."
오늘은 촬영 때문에 적당히 맞춰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어. 어쩜 사람이 이토록 근거 없는 자신감에 싸여 사는지 모르겠네.
스태프들을 봐도 죄다 여자라 내가 아니고는 저 도끼병을 고쳐줄 사람이 없어 보인다. 왠지 모를 사명감까지 생기는 순간이다.
그가 샐쭉한 표정으로 입을 내밀었다. 하지만 입꼬리는 곧 스르르 올라갔다.
그가 고개를 살짝 내려 입술을 내 귀로 가져왔다.
"정말 어려운 여자라니까."
"그쪽 이상형만 할까."
"내 이상형이 뭐 어때서요?"
"그런 여자는 아마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걸요."
"그건 두고 봐야죠."
밀가루가 선반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와 내가 바로 붙어선 바람에 그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스쳤다.
어깨를 조금 넘어선 머리카락의 끝을 동글동글하게 매만진 그가 말을 덧붙였다.
"혹시 알아요? 이미 만나고 있을지."
아, 맞다. 이 사람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지.
또 깜빡했다. 만약 그 여자를 돌려서 표현한 거라면 말이 되겠구나.
지켜주고 싶다길래 여리여리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분도 보통이 아니네.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밀가루랑 쿵짝이 아주 잘 맞겠어.
아주 짧은 순간, 햇살과 달빛을 모두 가진 그녀가 부럽다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흐음."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돈 밀가루가 창고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는 도시락 상자뿐 아니라 편지지에 붙일 꽃을 말리기 위한 도구, 스티커 등을 하나하나 훑었다.
"여기가 바로 내 여자친구가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이라 이거지."
달콤한 여자친구란 단어가 귓속에 들어오지 않고 공기 중을 떠돈다.
한쪽에 말려둔 꽃잎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얼굴에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부딪쳐 반짝반짝 빛이 난다.
눈부시지 않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빛. 나는 또 멍하니 그의 몸 주위에서 빛나는 작은 조각들을 바라만 보고 있다.
이상하다. 난 빛나는 거 정말 안 좋아하는데. 사람 만나는 것도 진짜 싫은데. 왜 자꾸 이 사람만은 예외가 되는지 모르겠다.
지난번에 나와 같이 물을 먹고 싶다고 했던가. 그건 오산이었다. 오히려 그가 마치 댐을 뚫고 쏟아져 들어오는 물처럼 매섭게 치고 들어온다.
"땡땡땡! 정신 차려, 진해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잖아. 진짜로 설레버리면 정말 답 없어. 또다시 악몽 같은 시간을 겪고 싶은 건 아니지?
상념을 털어버리고자 고개를 도리도리,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휙휙 소리에 나를 돌아본 밀가루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디 아파요?"
"아뇨. 전혀요."
"얼굴이 빨개요."
"아니라니... 아야."
키가 큰 밀가루와 마주 서는 걸 피하고자 뒷걸음질 치던 나는 그만 선반에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그 덕에 손쉽게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커다란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보드랍고 시원한 손바닥에 나는 덜컥 마음을 내려놓고 만다.
두 손으로 자신과 나의 이마를 번갈아 짚던 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얼굴을 내민다.
"왜, 왜?"
선반에 등이 붙어 더 갈 곳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다시 얼음이 되어 눈을 깜빡이는 것뿐.
당황스러울 만큼 가까워진 그가 이마를 아프지 않게 콩 부딪쳤다. 손바닥만큼 시원한 그의 이마가 내 열을 앗아간다.
"약간 열도 있는 것 같은데? 손은 또 왜 이리 차? 쉬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네 놈의 얼굴만 치워주면 열이 훨씬 금방 내릴 것 같아.
차마 걱정을 한가득 담은 얼굴에 모진 말을 할 수도 없으니 답답하다.
이마를 맞댄 채 손을 만지작대는 그의 작은 움직임에도 입이 마른다.
조금만 움직여도 어느 부위든지 여지없이 닿을 것만 같아 얼음 상태로 열만 확확 오르고 있다.
해온아, 라희야!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와서 땡 좀 쳐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