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남 장가보내기 작전 개시 당일.
오늘의 주인공 현석 씨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작업실을 찾았다. 주방과 미리 다듬어진 재료를 살펴본 현석 씨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정작 그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
"호, 혹시..."
"생각하시는 그 사람 맞습니다."
"정말 문도준? 여긴 어떻게... 아니, 그보다 이게 도대체..."
어찌할 줄을 모르는 현석 씨의 마음이 이해된다는 듯 해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가루가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들의 반응이 그와 같았으니까.
그러게 이 잘난 남자는 왜 굳이 작업실에 따라와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냐고.
나는 생글생글 웃는 밀가루와 그 앞에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현석 씨를 떼어냈다.
"시간이 없으니 도시락부터 만들어요, 우리."
"아, 네!"
자취경력 5년 차의 현석 씨는 해온이의 지도와 밀가루의 도움으로 서툴지만 정성껏 여자친구를 위한 음식을 만들었다.
향긋하고 고소한 고사리나물 무침,
소담하고 담백한 그녀를 닮은 호박전,
채소 맛과 상큼함이 조화된 무 쌈 말이,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먹는다는 돈가스,
한알 한알 윤기가 흐르는 흰쌀밥,
깔끔하고 개운하게 국물을 낸 콩나물국,
특별히 달지 않게 만든 감귤 푸딩,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생강 레몬차까지.
세 남자가 주방에서 한 시간 반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드디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프러포즈 도시락이 완성되었다.
상자 안에 각 메뉴를 오밀조밀 담은 후 투명한 뚜껑을 닫으니 제법 멋이 났다. 정성껏 포장까지 마쳤으니 이제 편지를 쓸 차례.
나는 현석 씨를 위해 어제 밤을 새며 만든 편지지를 내밀었다. 잘 말린 세 잎 클로버를 테두리에 붙인 편지지를 받아든 현석 씨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토끼풀인가요?"
"혹시 세 잎 클로버의 꽃말, 아세요?"
"글쎄요. 네 잎 클로버는 알지만..."
평범한 편지지를 보고 약간 실망한 기색을 했던 나의 질문에 현석 씨는 머쓱한 얼굴을 하고 머리를 긁었다.
네 잎 클로버야 워낙 유명하지만 평범한 토끼풀에 불과한 세 잎 클로버에 꽃말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행복."
현석 씨의 옆에서 밀가루가 대신 답을 알려주었다. 동글동글한 발음에서 묻어나오는 기분 좋은 감정이 그의 얼굴에 걸렸다.
우리 두 사람은 잠시간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가 불렀던 노래 속 이야기처럼 이제는 현석 씨의 마음속에 있는 보석을 꺼내줄 차례다.
"사람들은 네 잎 클로버라는 행운을 찾느라 행복을 지나치거나 무시하곤 해요. 때론 짓밟기도 하죠."
"아, 그런가...?"
"현석 씨도 직업이 여자친구에 비해 부족하다, 가난하다 등 외부적인 요인으로 자책하느라 정작 자기 안에 있는 장점은 보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현석 씨는 대답 대신 편지지에 붙은 세 잎 클로버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밀가루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어조로 그에게 마지막 말을 보탰다.
"밖에 있는 네 잎 클로버를 찾지 말고, 현석 씨 안에 있는 세 잎 클로버를 꺼내세요."
당신은 부디 행운이 아닌 행복을 선택하길. 당신의 여자를 혼자 두어 불행하게 만들지 않길. 부디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의 행복을 지켜주길.
한동안 현석 씨도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이 다음은 딱히 생각해 둔 것이 없어 살짝 난감해졌다.
그때 휘익, 휘파람을 분 밀가루가 핸드폰을 꺼내 흔들었다.
"편지를 쓸 때는 역시 배경음악이 필요한 법이죠."
잠시 뒤, DJ Moon이 선곡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라는 말을 반복하는 노래가 마치 현석 씨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현석 씨는 그저 들고 있는 편지지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노래 속의 인물과 하나가 된 그의 얼굴에는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노래를 듣고 있던 현석 씨가 이내 마음을 결정한 듯, 가방 속에서 종이쪽지를 꺼내 밀가루에게 내밀었다.
"어떤지 한번 봐주시겠어요?"
쪽지를 펼친 밀가루는 찬찬히 종이를 훑어 내려갔다.
역시 남자의 마음은 남자가 잘 아는 법.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읽어내려가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밤새 고민해서 썼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음, 미사여구가 너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네요. 그냥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의 말만 하는 게 어떨까요?"
"그래도 프러포즈인데 멋진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마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멋짐은 달라요. 굳이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처럼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밀가루의 말을 잠시 곱씹은 현석 씨가 밀가루의 손에 있던 종이쪽지를 지익, 두 개로 갈랐다.
펜을 든 그의 얼굴에 드디어 프러포즈를 앞둔 남자다운 설렘과 긴장이 어렸다.
마음을 나누는 음악과 함께 현석 씨는 세 잎 클로버 위에 마음속에서 꺼낸 말을 한참 동안 써내려 갔다.
"늦었어요. 빨리빨리!"
"잠깐, 레몬 생강차 챙겨가야죠!"
"아차차! 고맙습니다. 요리사님."
"별 말씀을요. 꼭 성공하세요."
편지를 쓰는 일이 생각보다 늦어져 약속 시각이 거의 다 되었다. 버스를 타면 늦을 것 같아 내가 배달차로 현석 씨를 약속 장소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밀가루는 이 와중에도 우리를 따라나섰다.
"해연 씨가 물 먹는 모습을 꼭 봐야겠거든요."
이 못된 흰둥이 시키 같으니.
"아, 저기 있다!"
약속장소인 공원에 미리 나와 있던 현석 씨의 여자친구는 내가 상상한 모습 그대로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단한, 6년간 자신의 남자친구를 믿어준 외유내강형의 여인이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 다 하세요."
"고, 고맙습니다."
"파이팅!"
현석 씨가 여자친구에게 달려간 뒤, 호기심이 충만한 나와 밀가루는 한 블록 떨어진 수풀 뒤 작은 공간에 몸을 숨겼다.
"저리 좀 떨어져요."
"여긴 자리가 없어요."
하지만 겨우 한 사람 정도 앉을 법한 공간에 둘이 있으려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보도 위에는 화단에서 떨어진 흙이 흩어져 있었다.
"읏차."
"뭐, 뭐 하는 거예요?"
돌연 땅바닥에 쭈그려 앉은 밀가루가 내 팔을 잡아끌어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혔다. 거기다 아예 내 무릎을 안고서 어깨 위에 자신의 얼굴을 얹었다.
온몸을 감싸는 온기와 평소보다 짙은 그의 비누 향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심장도 정신을 잃고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몸을 비트는 나를 더욱 꽉 끌어안은 그가 주의를 주듯 속삭였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목을 간지럽혔다.
"쉿! 그럼 거기서 얼굴 다 보일 거예요?"
"윽, 그렇지만 꼭 이런 자세일 필요는..."
"나도 보고 싶단 말이에요."
아무리 사귀는 연기를 하는 사이라도 난 이런 자세로는 도저히 집중이 안 될 것 같단 말이다! 난 너처럼 배우가 아니라서 외간 남자한테 안기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고!
내 마음속 비명을 들었을 리 없는 밀가루가 한 손을 뻗어 화단의 수풀을 헤쳤다. 그 사이로 현석 씨가 여자친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
"......"
하지만 거리가 있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수풀로 더욱 밀착해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오빠."
"기다리게 해놓고 이 정도밖에 안 되어서 더 미안해."
눈을 가늘게 뜨며 집중하자 희미하게 현석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내가 저 자리에 있는 듯 긴장되어 침을 삼켰다. 꼴깍 소리가 밀가루에게 들리지 않길 바라며.
"지금까지 힘든 시간 함께해줘서 고마워.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너라서 고마워."
"......"
"프러포즈 하나도 멋지게 못 하는 투박하고 촌스러운 나지만, 너만 괜찮다면 앞으로도 계속 너 하고만 사랑하고 싶어."
드디어 했다, 고백.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한 현석 씨가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냈다. 현석 씨의 손에 쥐어진 손바닥만 한 상자가 상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와, 뒤에 숨어서 지켜보는 내가 더 떨려.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겠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여자친구의 반응을 기다렸다.
밀가루 역시 긴장되는 듯 무릎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등에 닿는 탄탄한 근육이 움찔하며 힘이 들어가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현석 씨의 고백을 받은 여자친구는 나처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에 눈을 질끈 감은 현석 씨에게 다가갔다.
"꺅, 받았다!"
"좋았어!"
밀가루와 기쁜 마음을 나누기 위해 뒤를 돌아본 나는 너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밀가루가 황급히 손을 들어내 입을 막았다.
"쉿! 방금 여기 쳐다봤어요."
바, 방금 부딪칠 뻔한 거 맞지?
종이 하나 스칠 만큼 가까운 위치에 그의 붉은 입술이 있었다. 웬만한 여자보다 탐스러워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그 입술이.
덩달아 놀란 밀가루가 내 머리를 누르는 바람에 나는 입이 막힌 채로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짙은 그의 향기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나는 심장 부근을 꽉 움켜쥐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입 꼬물거리지 마요. 간지러우니까."
"......"
쇳소리가 섞인 낮은 목소리에 나는 급히 입술을 말아 넣었다.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코에서 나가는 숨까지 신경 쓰느라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잠시 뒤, 밀가루가 힘을 주고 있던 팔을 풀어 나를 밀어냈다. 수풀 너머에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이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저렇게 행복한데 저 둘을 도와주려던 나는 왜 이러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랄까. 진짜 물 먹었네, 물 먹었어.
"분위기도 좋은데 우린 이만 나갈까요? 좁은 데 계속 있으려니 힘드네요."
"아, 네. 그래요."
드디어 꼭 붙어있던 두 개의 몸이 떨어졌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던 그의 몸이 떨어진 자리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었다.
살짝 올려다본 그의 굳은 얼굴에도 땀이 송글 맺혔다. 최대한 몸을 숙이고 조심조심 차로 돌아온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우리 둘 사이에는 예전엔 없던 어색함이 맴돌았다.
"......"
"......"
작업실로 돌아오는 길에는 밀가루가 운전대를 잡았다.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나는 보조석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어서 식혀주거라, 바람아.
차에 탄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던 밀가루가 조용히 입을 뗐다.
"직접 만든 도시락이라, 괜찮네요."
"뭐든 마음이 더 중요하니까요."
"나도 만들어줄까?"
밀가루는 답을 달라는 듯 밤하늘을 닮은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도시락을 만들어준다고? 누구... 혹시 나?
평소엔 잘 쓰지 않는 머리를 굴리느라 입만 뻥긋하는 나를 재밌게 바라보던 그가 예의 장난스런 미소를 달고 말했다.
"직접 만들어서 팬들한테 선물할까 봐요."
"아, 팬? 그러시든지."
난 또. 네가 좋아하는 팬들한테 그 역조공인가 뭔가 해서 예쁨 많이 많이 받으십시오. 쳇.
♬♪
어떤 말로 전해야 할까
너를 향한 내 마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면
거창하게 꾸미는 법도
멋진 말도 난 몰라
너무나 소박한 세 마디 말밖엔
나 매일매일 하고픈 그 말
늘 모든 게 다 미안하단 말
늘 해도 해도 모자랄 그 말
또 모든 게 다 고맙다는 말
나 하루하루 아껴온 그 말
널 너무나도 사랑한단 말
되뇔수록 자꾸만 눈물이 나
더 많은 행복 주지 못해서
늘 부족해서 항상 미안해
날 살게 하는 오직 한 사람
너라서 그게 너무 고마워
늘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내 마음 다해 너를 사랑해
나 너에게 해줄 건 이 말밖엔
♬♪먼데이키즈 -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