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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태양이 걷는 순례길
작가 : 에스뗄
작품등록일 : 2017.6.18

인생이라는 고달픈 순례길에서 맞닥뜨린 뜨거운 태양 하나.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그믐달 진해연과 그녀를 쫓는 태양 문도준. 과연 태양과 달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001. 안녕 낯선사람(1)
작성일 : 17-06-18 17:25     조회 : 124     추천 : 1     분량 : 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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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11. 볼리비아 남부 산타크루스(Santa Cruz).

 

  공항 주차장 한가운데에 세워둔 차에서 내키지 않는 발을 내딛자 아스팔트 위로 올라오는 아지랑이가 종아리를 간질인다.

  사상 초유의 눈 밑 땀띠를 유발했던 습기는 어느 정도 가셨지만, 계란후라이도 능히 해낼 만한 한낱 열기에 숨이 막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햇빛이 눈을 찔러댔다. 머리 위에 얹어두었던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심통 맞은 얼굴로 하늘을 노려보았다.

  나는 태양이 싫다. 남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지글거리며 비웃듯 내려다보는 저 태양이 싫다.

  같은 하늘에서 내려본다면 차라리 달이 낫지. 적어도 보는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때로는 어둠 속에 나를 숨겨주기라도 하거든. 그래, 적어도 태양처럼 만인 앞에서 낱낱이 벗기지는 않지.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여 피폐해진 딸의 몰골을 보다 못한 부모님이 쥐어준 여권을 들고 비행기에 올랐던 때가 바로 1년 전 이맘때쯤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지구 반대편의 볼리비아라는 나라, 고모부의 지인이 지부장으로 운영하는 NGO(비정부기구/민간단체)의 지부였다. 나는 센터에서 숙식하며 명목상 자원봉사자로 1년을 놀며 먹으며 탱자탱자 살아왔다.

  나름 평화로웠다고 자부할만한 올해, 쩍쩍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지난달. 그 망할 모금방송 때문이다.

 

 "아, 저기! 저 사람들인가보다. 해연아, 플래카드!"

 

  그 흔한 유리문도 없이 뻥 뚫린 출구 너머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비즈니스 가방을 손에 든 남성, 앞서가는 어린아이를 향해 소리를 높이는 중년 여인, 배낭을 메고 한껏 들뜬 외국인 여행자들.

  대체로 잘 익은 무화과 색 피부를 자랑하는 현지인들 사이로 유독 하얀 무리가 눈에 띄었다.

  나는 지부장님의 성화에 못 이겨, 두리번거리며 출구를 나서는 예닐곱의 동양인들을 향해 한국어로 적은 플래카드를 얼굴까지 들어 올렸다.

  플래카드를 알아본 무리가 우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차마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일 수가 없어 플래카드를 더욱 끌어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하하, 이거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남미가 멀긴 머네요. 이틀을 꼬박 비행기 안에서 보내다니."

 "저도 한국 한 번 다녀오면 몸살이 납니다."

 

  자신을 한국 NGO 본부의 간사라 칭한 남자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고 감독을 비롯한 일행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결국, 연말특집 모금방송을 위해 내가 4박 5일간 수발을 들어야 할 촬영단이 도착하고야 말았다.

  애초에 모금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나는 이번을 계기로 모금방송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을 것 같다.

  촬영콘티를 위한 사연을 선정하고, 피드백에 따라 한국 방송의 입맛에 맞도록 내용을 수정하고, 그것을 촬영 대상자에게 전달하고 준비하는 데 꼬박 3주가 걸렸다.

 

  어디 그뿐이랴.

  호텔에 차량에 식사 준비까지. 지난 일주일 동안 새벽 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귀빈도 이런 귀빈이 없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촬영인지 모르겠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질색 팔색하고 뛰었지만, 지부장님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거리가 먼 탓에 경비가 많이 들고, 아프리카에 비해 자극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는 남미인지라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이 이번 촬영의 주인공입니다. 여기는 칼군무로 유명한 국내 최고 아이돌 그룹 SOUL의 리더 문도준군."

 

 "문도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옆에는 건강미 넘치는 섹시 아이돌 그룹 Red Wine의 막내 채라희양."

 

 "안녕하세요."

 

  사람 좋아 보이는 촬영감독이 뒤에 선, 핏기마저 말라 보이는 두 남녀를 소개했다.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남녀 아이돌이 한 명씩 온다더니 이건 뭐, 밀가루 두 포대가 도착했네.

  그래도 요즘 애들은 흰 셔츠에 물 빠진 청바지만 입고도 귀티가 흐르는구나. 자연 태닝 한답시고 새까맣게 그을려놓은 피부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트렁크와 뒷좌석까지 짐을 싣고 두 연예인에 스타일리스트, 매니저, 촬영감독, VJ, 기자, NGO 간사까지 앉으니 좀 전까지만 해도 널찍했던 12인승 차가 꽉 들어찼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느라 지쳤을 텐데 일단 식사부터 해야겠지? 예약해놓은 식당에 미리 연락해야겠다.

 

 "아, 대박. 개더워."

 

  멍멍?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저렴한 단어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백미러를 통해 발언자를 찾는 동안 선글라스 위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여긴 에어컨 없어요?"

 "방금 틀었으니까 조금만 참아요."

 "뭐야, 언니. 안 더울 거라며! 나 더운 거 완전 못 참는 거 알잖아!"

 

  발언자는 여자 밀가루였다.

  인형 같은 예쁜 외모에 발랄하고 야무진 이미지의 여자아이는 지부장님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스타일리스트를 상대로 협박 아닌 협박을 가하고 있다.

  여름이 시작될 즈음이라 더운 게 사실이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나? 아니, 아직 어려서 말을 가려 할 줄 모르는 건가.

 

  촬영감독이 라희라는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백미러로 나와 눈이 마주친 간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도준이란 남자는 아예 선글라스를 꺼내 끼고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우리 둘 다 선글라스를 끼긴 했지만 방금 눈 마주친 것 같은데. 아니야?

  요즘 것들은 싸가지를 밥에 싹싹 비벼 먹었나. 아님 이 세대의 예의는 내 세대와는 다른 것인가. 이미 구세대가 되어버린 내가 신세대들과 함께할 일정을 생각하니 한숨이 딸려 나온다.

 

 

 *

  촬영팀의 첫날은 무리한 일정 없이 시내를 돌아본 후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로 가기로 했다.

  내가 짠 일정이지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랬으면 아까 그 어린아이의 불평을 바가지로 들을 뻔했다.

  나는 시내에서 그들과 헤어지고 현지인 직원 다니엘라(Daniela)와 함께 센터로 돌아왔다. 내일 있을 촬영을 위해 아동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시내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걸려 작은 읍내로 들어와 버스처럼 정해진 노선을 도는 택시인 뜨루피(Trufi)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약 40분 후, 센터가 자리한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병원도 약국도 없고, 학교는 초중고 합해 하나 있고, 마트 대신 구멍가게만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인근의 4개 마을 중에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밤이면 집에서 나오는 불빛보다 달빛이 더 환한 곳. 마차와 오토바이가 나란히 줄 서 있는 곳. 손으로 만든 벽돌이 대표적인 생계수단이라 '붉은 진흙의 마을'이란 별명이 있는 곳.

  인구가 2,000명도 되지 않아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지만 사람들이 가진 이야기는 여느 도시 못지않게 다양하다.

 

 "Luna! (루나!)"

 

  마당에서 빨래하고 있던 여자아이가 싸리나무로 만든 담장에 붙어 기웃대는 날 발견하고는 눈으로 호를 그리며 달려 나왔다.

 

 "Hola, Mi chiquita. Como estas? (안녕, 꼬마 아가씨. 잘 있었어?)"

 "Bien. (응. 잘 있었어.)"

 

  호세 마리아(Jose Maria)는 통통한 젖살에 옴폭 패인 보조개가 예쁜 9살 난 여자아이. 처음 만난 날부터 나를 살갑게 잘 따른 탓에 내가 아끼는 아이 중 한 명이다.

  호세 마리아의 남동생 루디(Ruddy)는 날씬한 몸매만큼 날렵한 몸놀림 덕에 8살의 나이로 동네 축구를 제패한 실력자다.

  남매는 옆 마을에서 두 집 살림하는 아버지, 돈을 벌기 위해 2년 전 스페인으로 떠난 어머니를 대신해 외갓집에서 친척들과 함께 살고 있다.

 

 "Donde esta Ruddy? (루디는?)"

 "Se fue a jugar fubol. (축구하러 가버렸어.)"

 "Le he dicho que haya cuidado su salud. (조심하라니까.)"

 "Todavia El es chico. (아직 어린애인걸.)"

 

  1살 터울 동생을 두고 어린애라 말하는 9살짜리 누나의 얼굴에 그 나이답지 않은 미소가 떠오른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아 아주 잠시 마음에 물기가 스몄다.

  공 하나로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던 루디가 돌연 병에 걸렸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신장에 이상이 생겨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평생 투석을 하며 살아야 한단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다달이 보내오는 어머니의 월급만으로는 수술비용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외할머니와 이모 가족이 다 함께 생활하는 집에서 평생 투석할 비용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다.

 

 "Ya sabes que van a venir los coreanos mañana. No? (내일 한국인들 오는 것 알고 있지?)"

 "Si. Estoy lavando una ropa para ponerme mañana. Porque a mi me gusta la ropa. (응. 그래서 내일 입을 옷 빨고 있어. 아끼는 거거든.)"

 "Bien, chiquita. (잘했어. 꼬마아가씨.)"

 "Entonces, mi hermano podra sanar. No, Luna? (이제 내 동생 건강해질 수 있는 거지, 루나?)"

 

  설렘과 기쁨으로 격양되었으나 마음속 떨림은 감출 수 없는 여린 목소리. 옆자리에 앉아 팔짱을 껴오는 아이에게서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난다.

  가장 아끼는 옷을 빨아 입을 정도로 정성을 쏟는 9살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

  촬영만 하면 엄마보다 더 멀리 있는 한국인들이 자신의 동생을 고쳐줄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이.

  아버지는 옆 마을에서 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남매를 보러온 적이 없다.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법도 한데 얼굴 한 번 비추지도 않는다.

  차라리 없거나 멀리 떠났으면 모를까. 기대 아닌 기대에 점차 말라가는 남매를 볼 수가 없어 내키지 않지만 방송 사연으로 선정했다.

  다만 한국에는 차마 아버지의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 다른 나라에 가셨다고 거짓을 말했다.

 

 "Este, Luna! (있잖아, 루나!)"

 

  호세 마리아가 기대에 찬 얼굴을 바짝 갖다 댄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동그랗게 뜬 눈과 한껏 올라간 광대가 제 자리를 찾을 줄 모른다.

 

 "Como son los Coreanos? son guapos? (한국인들은 어때? 예뻐? 잘 생겼어?)"

 "No tanto. (그냥 그래.)"

 "La niña se ve muy linda en las fotos. (그 여자애 사진에서는 되게 예쁘던데.)"

 

  입이 걸어.

  물론 나는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눈을 반짝이며 기대하고 있는 아이를 실망하게 할 수는 없으므로.

  뭐, 어차피 아직 스페인어로 내 생각을 다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도 하고. 스페인어를 모르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는 또 처음이네.

  때마침 동네 강아지 한 마리가 마당으로 유유히 들어오더니 앞발을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모으고 잠에 빠졌다.

  어쩜 저렇게 귀여운 아이를 그렇게 걸쭉한 단어로 내뱉을 수가 있는지. 요즘 애들은 정말 어렵다.

  그래도 촬영할 때는 다르겠지. 오늘은 피곤해서 그랬을 거야.

 

  그러나 훗날 돌아보니 이 날은 아주 미약한 시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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