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아이돌 4화: 어차피 다음 데뷔는 정현진
윤호형이 알려준 그 유치한 방법들이 효과가 있기는 했다.
내가 내 의지로도 시간을 돌릴 수 있는지. 또 그 타임워프의 이유가 이 회사에서 데뷔를 못 하게 될 때 일어나는 일인지, 그게 궁금했던 건데 이로써 확실해졌다. 내가 데뷔를 못할 거 같은 일을 저지르면 시간이 되돌아 간다. 그래, 차라리 아이돌이 되기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믿자. 비록 회사 연습실 거울 좀 깼다고 짤리는 게 현실이지만 이 능력을 가지고 고쳐 나가면 되지 뭐. 그렇게 생각하자고 그래야 좀 살 거 같으니까!
잔뜩 짜증난 얼굴로 밥을 먹고 있으니 제이도 민호도 내 눈치를 살폈다. 형 무슨 일 있어요?
됐어, 니네처럼 파릇파릇한 연습생이 뭘 알겠냐. 뒷방 늙은이라도 된 것마냥 나는 고개를 젓는다. 없어. 일은 무슨.
“형도 학교 다닐 때 회사에서 성적표 가져오게 했어요?”
“어.”
“와.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는 한국말로 책 읽은 것도 개 빡센데. 그냥 나가서 앉아 있는 것도 힘들다고.”
“됐어 인마. 회사에서 관심 가져줄 때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해.”
“오 대박, 제로세븐 선배님들이 여기서 식사를 다 하시네?”
소리에 뒤돌아보니 정말 제로세븐이다. 웬일로 회사 식당엘 왔대. 저 중에 두명이나 나와 연습생 동기였다. 그 중 한명인 진혁은 나와 마지막까지 이 팀 막내로 데뷔하기 위해서 경쟁했던 녀석인데 그때 오히려 더 돈독했었다, 서로의 고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내가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진혁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얘랑은 꽤 붙어다녔었는데 왠지 전처럼 편하게 지낼 수가 없다. 이렇게,
“오~ 정현진~.”
갑자기 녀석이 능글거리는 게 좀 역겹다 해야 하나.
“안녕하세요!”
제이와 민호가 일어나 인사를 한다. 신기하겠지. 나도 회사 들어온지 2년차 땐 선배 아티스트들을 보는 족족 그랬었으니까. 그런데 연차가 쌓이고 동기들이 하나, 둘 씩 데뷔를 하면서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거. 누구보다 절감했다.
내가 괜히 진혁을 거북해 하는 게 아니다. 진혁은 회사에서 데뷔하고나서 눈에 띄게 변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건방져진 거야 말 할 것도 없고 사고치는 레파토리도 워낙 저질이라. 이제 막 스물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회사에서 막은 원나잇 스캔들만 서너 건은 되었으니까. 투어를 다니면서 나라마다 파트너가 있다고 매니저들이 힘들어 하는 걸 들었다. 데뷔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더니, 이젠 당당히 한국대표 남돌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제로세븐은 아티스트로 업그레이드되는 모습이었는으나 이 녀석의 관심은 오로지 여자, 야망, 돈 이런 걸로 보인다 해야 하나. 듣기로는 약까지 한다던데… 그런 거 다 차치해도 애가 좀 이상해진 건 사실이다.
“앉아, 앉아. 뭘 이러나서 인사를 하고 그래.”
“진짜 잘 보고 있어요 선배님. 월드투어 도신 거 진짜 멋있는 거 같아요! 켈리포니아도 다녀오셨더라구요. 마이 홈타운!”
“존경합니다, 선배님.”
민호는 딱 자기답게 진중한 톤으로 아부를 떤다. 아오 새끼들아. 속 보인다. 속 보여.
좀 짜증이 일었지만 이내 참고 만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여기서 삐딱선 타봐야 나만 질투에 열폭인 거니까.
“야, 오랜만이다?”
“그러네. 투어 잘 다녀왔어?”
나 근데 왜 쫄아있니.
“야, 이제 여기 유기농만 나오네? 니네 내가 번 걸로 호강한다.”
“하.하.하.하.”
“맛있네.”
맛있겠지 그래. 맨날 셰프 테이스팅 메뉴만 먹다 가끔 라면 먹음 맛있는 것 처럼. 나도 내가 구린 거 아는데 저 녀석의 태도가 배알이 꼴린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진혁은 데뷔 후에 단 한번도 먼저 연락이 없었다. 설마. 정신 없어서 그러겠지, 응원한다던가 하는 말로 먼저 연락을 해봤지만.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한번도 답변이 없을 필요는 있나. 나는 그래도 그렇게 붙어다녔었는데 우리에게 우정이 있다고 생각했었거든.
“빠히는 좀 냄새 나더라. 안 그래도 냄새나서 짜증나 있는데 길 다니다 백인 여자애들이 겁나 따라와서 식겁했어.”
“아 정말요? 아… 곤란하셨겠어요.”
“예쁘긴 한데 몸매가 좀 별로라. 너네도 언젠간 겪을 일이니까. 잘 들어놔. 하하하.”
진혁은 내 옆에 앉아 잔뜩 거들먹 거리다 매니저가 오자 화보 스케줄이 있다며 샵으로 떠났다.
나도 한다, 데뷔. 그리고 너보다 더 떠도 절대 너처럼은 안 돼.
나는 아이돌이 되려고 태어난 사람이니까.
이제부터는 쉬웠다. 어차피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실수를 하면 시간이 돌아가니까. 기분이 더러우면 더러운대로 연습을 게을리 했고 배짱 꼴리는 대로 굴었다.
“현진이 안무 다시.”
“……”
“정현진.”
“…..”
“다시 하라니까? 대꾸도 안하고 뭐하는 거야. 생리하니?”
저 드러운 말투 진짜 싫다고.이 바닥엔 유난히 멘트로 점수 깎아먹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짜증나서 벌러덩 누워버린다. 안무가는 평소처럼 쌍욕을 입에 물었다. 그래 짖어라. 어차피….,
“현진이 안무 다시.”
다시 돌아와서 하면 되니까.
한번씩 이렇게 반항 아닌 반항을 하는 게 재밌긴 하다. 녹음을 가서도 작곡가가 그렇게 싫어하는 자작곡을 마음대로 불러버리고 뭐라고 하던 말던 무시 또 무시. 왠지 나만 할 수 있는 엑스트라 연습시간이 생긴 것도 같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실력도 좋아지고, 내 스트레스도 풀리고. 나 이러다 진짜 데뷔하는 거 아니야?
* * *
[끝나고 커피?]
일본어 선생이 눈치 채지 못하게 나는 몰래 핸드폰을 확인했다. 당연히 가지. 백수현이랑은 언젠가부터 수업이 끝날 때마다 만나 커피를 하는 게 루트다. 우리 둘에겐 요즘이 정말 중요한 시기라 정보교환 비슷한 걸 하는 중이거든. 회사에선 다음 데뷔조를 솎아 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번엔 나도 유력한 후보군이란 얘기를 듣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꼭 좋은 징조만은 아니다. 나처럼 완전 장수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어린 것도 아닌 애매한 연습생은 이번에 데뷔조로 올라가지 못하면 버리는 패라는 말 밖에 안 되어서. 그건 백수현 쪽도 마찬가지라 얘도 답지않게 부쩍 불안해했다. 여자 팀이 먼저 나올지 남자 팀이 먼저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 우리는 동지면서 라이벌이기도 하다. 그나마도 직접적 라이벌은 아니니까 약간의 동맹관계에 있는 적이랄까.
“내 생각인데, 이번에 데뷔조 남녀팀 다 뽑고있는 거 둘 다 나오려고 그러는 거 같아.”
뚜껑을 열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 벌컥 마시던 수현은 운을 띄었다. 왜?
“회사에서 이상한 짓 원래 잘 하잖아. 이 조합 저 조합 괜히 붙여보는 거. 근데 이번엔 처음으로 남자 여자 조 둘 다 동시에 구성한다 더라고. 우리 촬영도 곧 같이 잡힌다던데?”
“사진 같이 찍는 건 거의 처음이긴 하네. 그래도 난 여자 조가 먼저 할 거 같은데.”
“무슨 근거로?”
“제로세븐이 데뷔한 게 이제 3년차잖아. 그렇게 빵 뜬 팀 후속 만드는 거 못해도 4,5년은 걸려. 돈도 낭비고, 이미지 겹치잖아.”
“그렇게 치면 초미인단 선배님들 데뷔한 거 5년찬데, 우리 회사 걸그룹 후발은 아직도 안 나왔거든.”
“그러니까 훨씬 가능성이 있지.”
그런가. 수현은 삐죽대며 혼잣말은 했지만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여자팀이 먼저 데뷔하게 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수현은 분명 될 거고 그랬으면 좋겠으니까. 이건 진심이다. 내 능력과는 상관없이.
“아까 남진혁 온 거 봤어?”
“아, 응. 내 자리 와서 밥 먹고 가더라.”
“걔는 왜 갈수록 이상해지냐 애가.”
진혁이 나와도 동기이니 수현과도 동기인 건 마찬가지. 우리 셋은 꽤 친했었다. 다이어트 중에 몰래 나와 라면을 먹다 회사사람들 보고 화장실로 도망간 기억도 있고 뭐, 그런 저런 남들 학창시절의 추억같은 게 우리 셋에게도 꽤 있었으니까.
“냅둬. 그러다 말겠지.”
“그러다 말긴… 말을 말자.”
수현은 무언가 말하려다 짜증이 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궁금하긴 했지만 일단은 넘겨야지. 수현은 입이 무거운 편이라 이런 건 기다려줘야 한다.
커다란 츄리닝을 입고 아무렇게나 똥머리를 올린 채로 짜증난다 툴툴대는 수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요즘 내가 이상해. 어차피 다 질러도 돌아간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뭘 봐아, 그렇게.”
“하하. 화장 안해도 예뻐서.”
“뭐야.., 왜 이래 느끼하게.”
갑자기 분위기 멜로? 나도 이게 서사에 하나도 맞지도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내가 너한테 관심있는 건 사실이니까.
“나 너 좋아했었어. 지금도 그래.”
나도 안다. 지금 지인짜 개연성도 낭만도, 아무것도 없이 얘기한 거. 싫든 좋든, 당황했는지 위로 올라가 눈의 수현의 눈동자가 모처럼 토끼처럼 동그래진다. 걱정마, 어차피 잊을 거야. 그 얼굴을 빤히 보며 미소지었다. 역시는 역시. 한번의 멀미를 겪자 방금 전으로 돌아와 있다. 연애 안된다는 거지, 운명아. 적어도 얘랑은 진짜 안된다는 거고.
나는 이렇게 과감해졌다. 어떤 일을 겪어도 일단은 내 마음대로 해버리고 다시 돌아와서 정답을 찾는 형국. 처음엔 시간을 돌리 때마다 죽을 것 같이 어지러웠는데 이런 것도 익숙해지는지 차차 그 고통에도 무뎌져갔다. 치과도 가다 보면 좀 나아지고 군대도 입소일이 제일 힘들지 있다보면 좀 나아지는 것 처럼 말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거지.
졸리면 출근도 안 한 채 양껏 자고, 먹고싶은 거 있으면 칼로리 계산도 안하고 다 먹고 보고. 엄마가 보고싶은 날엔 또 마음대로 거제도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 얼마나 편리한 기능인가. 자도 시간은 안 가, 먹어도 살은 안 쪄. 5시간을 달려 엄마를 보고 와도 연습은 다시 할 수 있었다. 이런 소소한 일들이 하나하나 켜켜이 쌓여서 내가 데뷔를 할 수 있게 되는 거였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신기하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날 아이돌로 만들려는? 어떤 전지 전능한 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꼭, 나 정현진을 데뷔시켜야만 하는 역사적인 이유라도 있나. 나 뭐 그런 거 되나? 방탄소년단 처럼 빌보드 점령? 아니면 나의 존재로 인해 한반도의 평화가 지켜진다던가… 해외무역에 외교적으로 작용이라도?
이런 게 아니라면 그냥 나 하나 연예인 만들자고 이렇게 좋은 기능을 옵션으로 주었다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반복된 타임워프에 좀 익숙해질 무렵, 호옥시나 하며 로또나 주식을 해보려 했다. 웃긴 건 그런 이유로 시간을 돌리려 무슨 짓을 해봐도 시간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순차대로 시간이 돌아가더라도 내 기억속에 외워둔 그런 류의 정보들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타임워프의 목적은 이토록 뚜렷했다.
아무래도 나는 정말 아이돌이 운명인가봐.
어차피 다음 데뷔는 나야, 정현진. 어데정.
이쯤의 나는 이렇게 우쭐해 있었다. 앞으로의 반복된 타임워프들로 어떤 일들이 닥쳐올지는, 요만큼도 감 못 잡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