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아이돌 8화: 스멀 스멀 느껴지는 비리 스멜
- 수현아, 남진혁한테 연락해봐
[왜?]
- ....진혁이가 연락 좀 해달래. 급한가 봐
그래도, 백수현만큼은 이 일에서 빠지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진혁의 얘기를 전하지 않아도 봤지만, 그래봐야 다시 일어나는 타임 워프. 하루를 또 반복하고, 머리를 굴려 갖가지 시도들을 해봤지만 그 때마다 번번히 어제로 되돌아간다. 나도 최선을 다했다고. 결국 여러번의 타임워프 끝에 나는 남진혁 뜻대로 얘기를 전했고, 그제서야 굴러가는 시간.
변명이 아니라, 지금껏 내가 겪은 이 타임워프 특성 상, 정답은 이미 정해져있고 나는 그 정답을 유추해내 그대로 하는 게 룰이라 다른 수는 없었다. 솔직히 어제로 시간이 돌아가면, 한번 더 데뷔를 경험하는 거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각오는 했는데, 이게 아무리 좋은 거라도 계속 같은 걸 하니까 사람이 미친다. 몇번이나 첫무대를 끝내고 숙소에 돌아가는 벤에 타 남진혁의 연락을 받는 순간, 싫다고 하면 또 벤이 막 흔들리면서 굉음에 빛에.. 어후. 그럼 아예 얘 연락을 씹으면 될까 싶어서 그렇게 해보니 또 타임워프. 하, 나도 이런 거 저런 거 다 해보고서도 변할 기미가 없으니까 끝내 포기 선언을 한 거다. 마냥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낼 순 없는 거니까.
‘너 진짜 실망이다.’
하..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 나라도 정 떨어지겠다. 아무리 걔가 선배여도 우리 다 같이 동긴데 무슨 빵셔틀도 아니고 ‘진혁이가 연락 좀 해달래.’ 라니. 구리다 구려. 아으. 구려!
“형, 다음 헤메 가야 돼.”
일어나 세수하고 소파에 앉아 멍 때리는 나를 현호가 상념에서 꺼내준다. 일단은 오늘 할일이나 잘하자. 하다보면 뭐라도 되있겠지. 하 참. 언젠가부터 내 신조같다. ‘하다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아이돌방방] 이라는 한창 잘나가는 아이돌 전용 방송을 찍고선 첫 사인회 스케줄도 나갔다.
와, 진짜 너무 신기하다. 나라는 사람을 보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줄 줄 몰랐다. 매니저 형은 놀라서 벙쪄있는 우리에게 이것도 추리고 추려서 100명만 들여보낸 거라고 귀띔을 했다. 아무리 티엠이 덕후몰이를 잘한다 해도, 이렇게까지 열광적일 줄은 몰랐다. 내가 뭐라고 날 이렇게 좋아해주지? 현진아!! 하고 소리를 지르는 누나(?)들을 보니, 감개가 다 무량할 다름이다.
오히려 가수가 더 벌벌 떠는 희한한 광경의 팬싸인회를 마치고 첫 팬들과 함께 단체사진을 남겼다. 이 사람들, 영원히 기억해야지.
이런 매일이 있다보니 백수현이 빡친 것도, 남진혁에게 연락이 왔던 것도 잊을만큼 바쁘고 벅찼다. 세상에 태어나서 먹는 것도, 보는 것도, 하는 것도 다 처음인 갓난 아이처럼 그렇게 모든 기억들이 강렬해서. 핸드폰을 볼 새도 없이 많은 스케줄과 날 사랑해주는 팬들을 겪는 건 지난 5년간의 어떠한 인고도 또 인내해낼 수 있을 만큼 달았다. 나를 필요로하는 사람들에 둘러쌓여 예쁘다 예쁘다 듣는 건 그렇게나 매혹적이라서.
* *
모처럼 간만에 회사 내부 스케줄이 있는 날이다. 활동을 한지 벌써 2주가 지났고 해외 프로모션에 대해 듣는 날.
전에 연습생활 할 때와는 달리 직원들이, 우리가 나타나자 힐끌힐끔 쳐다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구만. 이런 변화들에 솔직히 좀 우쭐해지긴 한다.
매니저들과 함께 컨퍼런스룸에 들어서니 보이는 젝시 팀 매니저 누나들. 맞다, 회사 스케줄이 있단 얘기는 젝시랑 동선이 겹친다는 건데. 곧 젝시 멤버들이 들어오고 백수현이 마지막에 걸어온다. 왜 이렇게 뜨끔한 거지. 수현은 미팅 내내 단 한번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 어떤 일에 이상한 죄책감을 느끼며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다.
회의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백수현 동선 쯤은 이미 욀 정도로 알아서 카페테리아가 있는 2층 비상구 계단에 가 수현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곧 발자국소리가 들렸고 수현이 디귿자 계단을 돌았을 때 마주친다. 나는 반층 아래에서, 수현은 그 위에서.
“…… .”
“백수현.”
수현이 무시하고 카페테리아로 갈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 피하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존나 무섭긴 하지만.
“얘기하려고 기다렸어.”
“무섭다 너?”
“미안. 하하. 커피 마실래?”
“됐어.”
“내가 살게. 아이스 아메리카노지?”
“…….”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현의 기분. 수현은 어이없다는 듯 날 보다가 결국 계단을 내려와 내 앞을 지나쳤다. 이대로 보낼 수 없어 용건부터 꺼낸다.
“미안해.”
“뭐가.”
하면서 나를 노려보는 저 올라간 눈. 미안해. 너가 기분 나빠할 거 알면서, 어쩔 수가 없더라, 이번 타임워프 퀘스트는 너한테 남진혁 메신저 노릇하는 거 였거든.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얘기 전한 거. 남진혁.”
“…하.”
“근데 그 새끼 뭐래? 나 엄청 걱정했었어.”
“이제 와서? 왜.”
“,,….”
“뭐야, 말을 하다 말어.”
“그냥. 걔 좀 사람 빡돌게 잘 하잖아. 짜증나게 잘 하고.”
“알면서, 너는 나한테 걔한테 연락하란 말을 해?”
“미안. 너무 볶아대길래, 급한 일인 줄 알고.”
“그리고 어떻게 너는 걔가 나한테 무슨 말 했는지 지금 물어보냐.”
아. 그러고 보니 나는 내 할말만 하고 수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솔직히 난 그게 더 기분 나빠. 무슨 시한폭탄 던지듯, 넌 너 할 일 다했다는 투로 할 말만 딱 전하고. 걔가 얼마나 이상한 놈인지 니가 모르면 또 몰라.”
“….. . 걔 뭐라 그랬어? 혹시 사장님들. 엮인 거야?”
내가 회사 사장들을 언급하자 수현은 잠깐 놀란 얼굴을 한다. 마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투로 말이다. 나는 이 허점을 놓치지 않는다.
“와 맞나보네.”
“너 어떻게 알았어?”
“백수현, 우리 좀 진지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아. 어렵게 데뷔했는데 이상한 거에 엮이지 말아야지.”
수현이 뭔가 얘기하려는 찰나 전화가 울렸다. 빨리 올라오라며. 우선은 커피부터 사서 가기로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은 방송사에 보낼 영상을 찍어야 해서 회사로 온 거다.
“그래. 일단 올라가자. 나중에 얘기해.”
젝시와는 헤어지고 각각 다른 연습실로 향했다. 나는 무엇보다 이번 타임워프의 방식이 변한 것에 대해 놀라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데뷔 일정이 잡히고나서는 시간이 돌아가는 일이 전혀 없길래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이 게임의 목적은 데뷔니까. 그런데 그 목적을 이루고도 또 다시 타임워프는 일어났고, 심지어 내가 의식도 못하고 있을 때 과거로 돌아갔다. 수십번의 타임워프를 겪으면서 깨달은 게 있다. 시간이 돌아갈 때는 시점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스테이지의 퀘스트를 깨지 못했을 경우, 다음 미션이 오기 전까지는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미션을 해결하면 전 포인트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시간이 흐른다. 이번엔 아마 내가 자고있을 무렵까지 이번 미션을 해결하면 되는 거였을 거다. 내가 그 날 잠들었던 게 숙소로 오고나서 였으니까 대강… 밤 11시 이후. 그리고 일어난 시간이 새벽 4시. 이 사이까지 백수현에게 남진혁의 메세지를 전하는 게 지난 미션의 시점이었단 말이다. 참 이상도 하다. 어제도 오늘도 아닌 그 애매한 시간에 뭐가 달라지나?
그래 일단, 나처럼 백수현이 눈에 든 어떤 투자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 사람의 시차가 한국과 다르다면 얼추 아다리는 맞춰진다. 아니면.. 남진혁이 지금 해외에 있다는 거 일지도. 이 타임워프를 시작한 지도 어언 9개월 째라 나한텐 덤으로 추리능력까지 생긴 모양인가 보다.
우선은, 수현과 또 만나서 얘기를 해봐야 할 거 같다. 그 전에 일단 오늘일을 열심히 끝마쳐야 그럴 시간도 오겠지. 나는 열심히 추리를 하며 다음 스케줄로 이동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게 이런 거구나.
연습에, 라디오에, 화보에, 광고에, 예능 끝 또 연습 연습. 이 스케줄을 소화하지 못하면 제 아무리 잘나도 아이돌이 될 수 없다. 신인이면 뭐 말할 것도 없지. 이렇게들 바쁜데 대체 사람은 언제 만나고 연애도 하고 스캔들도 나는 거야? 알 수가 없다. 어서 빨리 뭐라도 해야 한다. 계속 이런 일정을 보내다간 이번 퀘스트 해결은 못 한다. 언제 또 시간이 돌아갈지 모른다고. 오늘 마침 드디어 제로세븐과 또 다시 스케줄이 겹쳤다. 직접 대면하는 게 제일 편하지 아무래도.
방송국에 도착해 나는 호기롭게 남진혁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할말 있어. 비상구로]
제일 먼저 스타일링을 하고 매니저에게 화장실 간다고 말하고 비상구로 직행. 반신반의 했는데 진혁이 먼저 나와있었다.
“요게 선배를 다 불러내고. 다 컸네, 정현진.”
진혁은 내가 데뷔한 후로 묘하게 태도가 또 바뀌어 있었다. 이렇게 내 목을 껴안으며 친한척을 하는 거나 말투를 보면.
“아야, 잠깐만요 선배님. 머리 망가져.”
절대 마음에서 우러나온 처신은 아니다.
“그래, 할말 뭔데. 나도 빨리 들어가야 해.”
“너 혹시 해외에 있었어 얼마전에?”
“어떻게 알았냐?”
오호, 하나 맞췄고.
“그건 됐고, 백수현.”
“백수현?”
“그래. 수현이.”
진혁은 갸우뚱하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 아! 야 넌 그게 언젠데 아직도 그 타령을 하고 있어. 뭔가 했네.”
하고 기분 나쁘게 웃는 미소은 덤.
“뭔지 알아야겠어. 너 말 전하고 계속 맘이 안 편해. 뭐야, 또 해외 투자 건수야?”
“푸하하. 야 몇번 말해, 우리 회사, 그냥 친목이어도 여자애들은 절대 안 건들여. 큰일 날 일 있냐?”
“그럼 뭔데.”
아 이걸 말해 말아. 하고 진혁은 거들먹대며 웃었다.
“야, 됐다. 나중에 너도 시간 지나면 알 수도 있고. 뭐~ 니가 사장 라인 탈 거 같진 않다만. 열심히 해봐. 현진이도 더 큰 사람 되어야지.”
하고 내 가슴을 툭 치고 비상구 문으로 향한다.
“야아, 뭔데. 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
“열심히 머리 굴려봐. 고 작은 머리로 어디까지 상상하나 구경 좀 하게. 아하하. 형 먼저 간다, 있다 방송에서 보자?”
“힌트라도!”
“힌트? 푸하하. 노력이 가상해서 하나는 주지 뭐. 백수현이 직접적으로 해야 할 건 없어. 하다못해 너처럼 문자나 그런 것도. 너무 걱정 말아라.”
백수현이 직접할 건 없다니 일단 한시름 놓는다. 백수현이 ‘직접’ 해야 하는 건 아니라니까… 직접.. 직접이라는 말이 왜이렇게 쎄하지? 나는 곧 있을 온에어를 위해 일단은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대본을 보면서도 오로지 이 퀘스트가 내게 말하려는 게 뭔가, 그 생각만으로 가득찼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