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한 뒤에 씁쓸한 미소를 흘리면서 수리를 쳐다보고 있다. 무슨 의미인지 눈치 챈 수리가 똥 씹은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면서 주머니 깊숙이 박아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한다.
“회장님! 지금 고동우가 울산에 와서 배 주위에 얼쩡거리는데 거기 있지 말고 수금 좀 해오라고 해 주십시오. 제가 받을 회사들 바로 쏴 드릴게요. 우리도 요즘 좀 힘듭니다. 이번 작전을 필요한 차 기름 값 좀 싸 주십시오. 자칫 잘못하면 자전거 타고 작전을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기가 찬 권태가 전화를 끊은 수리 머리를 한대 쥐어 박고는 눈살을 찌푸려 노려본다. 수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권태에게 다가가 귀속말로 무슨 말을 하고 권태는 만족한 듯이 빙긋이 웃는다. 귀속말로 보고를 마치고는 동원이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차분히 지시를 내린다.
“동원아! 겁 대가리 없는 신출내기 몇 명 양복 잘 입혀서 보내. 명함은 아직 남아있지? 그거 아무데나 쓰지마. 누가 그 명함보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바로 들통 나잖아. 너도 지금 그 화물 이름 모르잖아. 그게 어디 사용하는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거야? 그 명함은 그 날 딱 하루만 써”
“예! 명심하겠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동원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모습을 보고서야 안심이 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원이와 권태를 번갈아 보며 설명을 시작한다.
“만약에 그 놈들이 한번만 눈감아 달라고 돈을 주면 그건 너희들이 가져도 되니 보고할 필요는 없어. 공돈이잖아. 그리고 형님! 지금부터는 화물이 더 세나가는 걸 막아야 하는데 내일이면 육상에 들어 온 수량 검사가 완료되고 통관시킬 겁니다. 애들에게 최대한 많이 감량 처리하라고 해뒀으니 그만큼 보험처리 해버리면 됩니다. 지금부터 동원이 네가 할 일은 내가 실제 입고 수량에 대한 자료를 받을 거야. 그러면 중간에 잔챙이들이 빼간 수량도 나온단 말이지. 애들에게 그 잔챙이 회사를 덮쳐서 죽지 않게만 손을 봐 주라고 해. 그럼 바로 소문이 날 거야. 강성호나 김경일 같은 거물들은 건드릴 필요가 없어. 알아서 기어 나오지 않으면 그때 손봐도 늦지 않아. 가능하면 그 회사 감사 팀 인척해야지. 주먹질부터 먼저 하면 안돼. 분명히 현금을 내놓을 거야. 방금 얘기했지. 그건 너희들 몫이니 보고할 필요 없어. 특히 여기 큰 형님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 너희들이 알아서 쓰던 저축을 하던 알아서 가지란 말이야. 잡는 게 목적이 아니고 소문을 퍼트리게 할 목적이야. 그게 애들 할 일이야. 알았지?”
수리하는 말 중에 농담에는 만성이 돼 그 말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데 오히려 수리가 무슨 반응이 오기만을 기다렸듯이 힐끔 쳐다본다. 권태가 반대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려버린다. 동원이가 빙긋이 수리를 쳐다보고 웃으며 걱정 마라고 한다.
“아이 참! 형님! 제가 하루 이틀 했습니까? 철저히 교육시켰습니다”
“그럼! 동원이 너만 믿어. 가능하면 내일 출발과 동시에 끝내버리자”
“당연하죠”
“그럼 부탁하고 먼저 간다. 형님!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가능하면 이제 오지 말고 메일로 보내라”
수리는 보스에게 대견하다는 듯이 엄지를 한번 축 치켜들고는 허리가 굽도록 고개를 숙이고는 콧방귀를 한번 툭 치고 밖으로 나가는 데 동원이가 따라 나와 수리가 보스에게 했듯이 똑 같은 자세로 배웅을 해준다.
윤부장은 수리가 가고 난 뒤 정리해준 데이터를 보면서 밤을 거의 꼬박 새워야 했다. 어느 정도 보람은 있는 것 같았다. 9시 01분이 되자마자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아가씨라면 당연히 관심이 갈 젊은 친구가 또 데리러 온다는 전화였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차에 올라 타 졌고 석유화학저장소인 보세장치장으로 가는 동안 여유 있게 어젯밤에 본 자료들을 다시 봤다.
이번 출장은 철저한 비밀이어서 경비실을 아무 검사 없이 그냥 통과할 줄 알았는데 그건 이런 일에 처음인 윤부장의 착각이었다. 주민등록증을 주고 경비가 사무실에 확인하고 거칠 과정은 다 거치고 난 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만큼 시간도 조금 필요했다. 경비의 안내를 받고 들어가면서야 이런 걸 표시 나지 않게 평범한 방문처럼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안내 받은 부서는 고객지원부였다.
“안녕하세요. 말씀이라도 하고 오시죠”
담당자가 너무 친절히 반갑게 맞이 해주는 것도 약간의 부담으로 느껴졌다. 사근사근한 말투와 생김새가 얼핏 고동우를 연상하게 해서 벌써 거리감이 느껴졌다. 만약에 고동우를 몰랐다면 이 담당자의 친절에 전혀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겠지만 너무 유사한 점이 많아 벌써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경계해야 할 부분은 이 담당자는 이미 고동우와 잘 아는 사이라는 확신에 찬 짐작이었다. 고개를 씩 돌려 둘러 보았다. 수리 같은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데 담당자가 한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사람이 벌떡 일어서 다가왔다. 방금 전에 담당자가 한 말과 똑같이 말을 하고는 겸연쩍어 했다.
“말씀이라도 하고 오시죠”
이번 출장은 비밀이었는데 벌써 들킨 것 같아 그렇게 썩 반갑지는 않고 오히려 탐탁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담당자나 이 사람들을 통해 버리면 비밀은 없어져 버리고 암행 출장의 목적도 퇴색해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말 안하고 온 제가 잘못이죠. 일 보세요. 다른 데 출장 중에 잠시 들렀어요. 고생 많아요”
여유 자리가 그렇게 많지 않아 책상 한 귀퉁이에 앉아 이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리를 떠올렸다. 잠시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공과 전혀 무관한 이런 일은 어떻게 알고 했을까?
그때 계산기를 다 두드리던 윤부장 회사의 용역을 받는 검정회사 직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 왔다.
“부장님! 큰일 났는데요. 감량이 너무 많이 났습니다”
며칠 동안 해후상봉으로 부둥켜 안고만 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계산기 좀 주세요”
눈이 휘둥그래져 놀라는 모습에서 윤부장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졌고 그 미소를 본 이 사람이 더 놀라는 것 같아 승리감마저 밀려와서 자칫 잘못하면 이 기분에 도취돼 밤새 배운 계산법을 잊어버릴뻔할 것 같아 정신을 다시 똑바로 차렸다.
놀란 눈으로 멀뚱히 쳐다보던 검정회사 직원이 얼른 계산기를 건네 주었다. 배운 데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렸고 다시 한번 더 확인을 했지만 이 사람 말대로 500톤이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모자란다는 말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모자란다는 걸 다시 확인하고 마치 자신이 이 사람과 같이 계속 선박에서 상주하며 하역이 마칠 때까지 검사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이 사람과 똑같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은 스파르타 식 교육에서 절대 당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떠올라 침착하게 용역회사 직원을 쳐다 봤다. 스파르타 교육을 받은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