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은 염려 말라는 말은 들었지만 내심 불안했다. 물론 가장 최악의 응징을 바라고 있는 건 아니란 걸 믿고는 있었다. 대가리라고 하기엔 수리 형님에 좀 부적절한 말이지만 머리에 먹물 좀 들어 갔다고 이 회사 아니 이 세계를 떠날 때 많이 섭섭하고 배신감도 품고 있었다. 방황하던 철없던 어린 시절에 여기에 들어 오게 한 사람이 자기면서 자기만 발을 쏙 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사람이 무섭다. 주먹 질 하는 걸 딱 두 번 봤다. 그때 그의 눈은 같은 주먹질을 하는 본인의 눈에도 살벌했다. 이권 싸움인 영역 싸움에서 그의 눈은 분명히 살인이 목적이었다. 소매치기 가슴에 칼을 꽂힌 칼은 소매치기의 칼은 맞겠지만 꽂은 사람은 저 사람이 아닐 까 의심도 했다. 주먹질을 할 때 그의 눈은 살기로 가득했던 걸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지금도 허허실실 흘리는 농담들도 하나씩 파헤쳐보면 전부 강철 같은 뼈를 가진 의미 담긴 말뿐이었다.
며칠 뒤에 동원은 술자리에 따라가 돈 봉투를 전달했다. 그 자리에 온 사람은 셋이었고 모두를 이 사람에게 조직의 동생들보다 더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한 명은 서로 존칭어를 쓰지 않고 편하게 반 말을 했지만 그 사람의 눈에서는 계속 두려움과 맹목적인 복종을 감지할 수 있었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동원이가 지금까지 접해 본 사람들과의 전혀 별게의 사람들이었다. 시내 한복판에 북적거리며 다니는 사람들과는 약간의 차이를 느꼈다. 도시 사람들과는 달리 순순해 보이면서도 눈매들은 날카로웠고 오가는 대화는 끈적한 습지에서 갓 빠져 나온 사람처럼 축축했다. 딱히 표현하자면 깔끔하게 매듭짓지 않고 아주 미세한 먼지 같은 여운을 남기는 대화 습성이 보였다. 그건 빠져나 갈 구멍을 찾는 행태였다. 책임지지 않고 덮어씌우는 습관이 몸에 벤 사람들 같았다.
잠시 혼란스러웠다.
분명 수리와 같은 직종의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전혀 달랐다. 그럼 수리는 능구렁이란 말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건 본인뿐만 이 직종의 사람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언제 배신할 줄 모르는 인종들이지만 보스와 수리는 그 사건이 발판이 됐는지 아니면 친인척 말고 또 다른 무슨 끈끈한 연결고리가 있는지 모르지만 반 평생을 같이 해온 의리만을 믿기로 하고 용기를 냈다.
“형님! 형님 의도를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 할까요?”
자칫 농담으로 여길 수도 있었지만 그의 요구를 확실히 알고서야 며칠 내내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 앉힐 수가 있었다.
“내 말이 장난인 줄 알았지? 그냥 중간다리만 평생 못쓰게 만들어 버려. 내가 원하는 건 이것뿐이야. 그렇다고 자르지는 말고 뭉개버려. 할 수 있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거긴 뭉개서 뭐 하려고?
“예! 더 이상은 없죠?”
“없어.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할 일이야. 염려 마”
동원이가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완전한 심복이 되기로 결심할 무렵에 서울에서는 고대리가 그들만의 계획된 날이 바로 코 앞에 다가와 아주 많이 들떠 있었다.
전화를 끊은 고대리가 입술에 번진 얄팍한 미소를 그대로 드러낸 채 윤부장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출장 계획서를 다소곳이 책상에 올린다.
“부장님! 내일 모레 이틀 동안 지방에 출장을 다녀 오겠습니다”
뭔가 간절할 때 고대리는 항상 뭘 잘못 쳐먹은 인간이 된다. 내색하지 않은 비웃음을 머금고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윤부장 눈에서 조금 놀란 기색이 띠였고 이를 간파한 고대리가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친절이 설명을 해준다.
“이번에 날씨가 나빠서 우리가 기일 내 납품을 못해서 거래처에 가서 달래야 합니다. 중소 공장들이 우리 제품만 쓰는 게 아니잖아요”
얼마 전에 선박에 대해 모른다는 뉘앙스를 풍긴 말도 있었지만 이 말도 무시하는 말로 들린 윤부장이 계획서를 다시 돌려 주며 절차를 거치라고 한다.
“고대리! 너는 아래 위도 없어? 이 봐! 과장 어디 갔어?”
고 대리 직속 상관인 과장과 차장이 벌떡 일어나 쫓아와서는 계획서를 보고 눈살을 찌푸려 고대리를 노려본다. 움찔한 고대리가 변명을 늘여 놓으려는 데 차장이 말문을 막아 버린다.
“이 새끼! 주둥이 닫아”
고대리가 고개를 잠시 숙이고는 이마 위로 손바닥을 스치듯이 올리고는 머리가락을 잡아 뜯듯이 비틀고 있다. 금방이라도 욕설을 터트릴 기세지만 여기서 고대리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건 벌써 전 직원이 모두 다 알고 있다. 오늘은 회장님도 아들도 모두 다 자기들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윤부장이 이런 점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입술을 깨문 윤부장이 고대리 가슴팍에 계획서를 던져 버리고는 자리로 돌아간다.
윤부장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타 부서에 까지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그때 회장실 안에서는 회장이 수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이! 정군! 자네 말이야! 지난 번에 내가 부탁한 거 말이야. 계획대로 잘 돼가?”
굵직하지만 카랑카랑한 테너에 가까운 음색을 가진 작달막한 키에 검은 콩보다 더 흑색인 머리카락을 가진, 물론 염색머리, 윤부장 회사의 회장님이시다.
“예! 염려 마십시오”
이 말이 끝난 이후로 두 사람 사이의 통화에서는 방금 전에 회장실 밖에서 윤부장이 던진 계획서와 거친 말투로 인해 직원들로 꽉 차 있는 사무실에 흐르는 정적보다 더한, 아주 무거운 흥정의 정적이 두 사람 통화 사이에서 끈적끈적하게 흐르고 있었다.
“자식! 멋대가리 없는 놈! 할 말 더 없어?”
“있습니다. 용역 비 좀 더 올려서 일감 주십시오”
“내 일 하기 싫다며? 그래 놓고 올려달래? 좋아! 얼마나 올려주면 되겠나?”
“5만원만 올려 주시면 지금부터 당장 하죠. 제가 싫으면 제 같은 놈 많아요. 골라 쓰세요”
“안돼! 3만원 정도는 내가 고려해 보지. 자네는 아직 쓸 때가 많아서 그것도 안돼”
“좋습니다. 나중에 다른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3만원 올립니다. 그럼 당장 사용하십시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정형! 자네! 신차장하고 친하잖아. 신차장하고 얘기해”
수리가 입술을 툭 내밀고 콧바람을 횡 소리가 들릴 정도로 휴대폰 속으로 날리며 비꼬는 투로 말을 한다.
“퇴사 했다면서요? 어떻게 직원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세요? 그래서 무슨 그룹을 운영한다고.. 쯥쯥쯥”
“그래? 그랬나? 언제?”
“저도 몰라요. 직원에게 물어보세요. 그나저나 정군에서 정형으로 진급시켜주셨는데 단가도 조금 올려주시고 일감도 다른 데 주지 말고 저한테 이제 몰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