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디서 그런 겁 대가리도 없는 배포가 생겼던지 ‘너 정도야 한 주먹도 되지 않아’ 하듯이 도도하게 고함을 질러 버려서 당장 잘못했다고 빌 수도 없었다.
무섭고 난감했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합장해 손바닥이 달도록 비비고 싶었다.
윤부장은 이런 공포에 휩싸인 건 태어나고 처음이었다.
고대리 키와 덩치가 이렇게까지 크고 건장한 지도 처음 알았다.
다가 오는 그의 모습은 한 마리의 성난 호랑이나 사자가 아닌 동네 골목길에서 먹이를 찾아 얼쩡거리던 배고픈 개새끼였다. 그 새끼가 드디어 버려진 음식물을 보고 주위에 다른 개새끼가 있는지 탐색부터 하고는 어슬렁거리며 다가 오는 것만 같았다.
윤부장은 영락 없는 음식 폐기물 처지가 돼 있었다.
오래 전에 처음가본 바다 갯바위에서 본, 금방이라도 온 몸을 덮칠 듯이 몰려 오던 검푸른 파도와도 같았다.
그때는 누군가가 보호를 해주었지만 지금 윤부장은 길가에 떨어진 무슨 동물 뼈다귀 같은 음식 폐기물에 불과했다.
금방이라도 이빨을 드러내 그때 그 누군 가처럼 보드랍게 살짝 핥다 주지도 않고 바로 넙죽 집어삼킬 기세였다.
“이 새끼! 뭐 하는 짓이야?”
윤부장은 아무리 최악의 상황에서라도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걸 새삼 깨닫는 순간을 실감했다.
이건 그때 어느 바닷가서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질뻔할 때 팔을 낚아 채 목숨을 건져 준 그 누군가의 손처럼 따듯한 고함소리였다.
그러나 여긴 그 바닷가가 아닌 물이라고는 생수통 속 물밖에 없는 고층 건물의 사무실이었고 또한 여기는 구멍가게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기업이다.
여기는 윤부장만 부장이 아니었고 고대리만 대리가 아니었다.
철저한 상명하복의 구조는 아니지만 상화관계는 확실한, 위계 질서가 철저한, 창사 50주년이 다 되어가는 그룹의 핵심 계열사였다.
이 회사는 여성도 능력만 있으면 남자와 똑같이 진급을 하는 회사다.
그러나 딱 하나 할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건 이 회사의 잘못이 아니다. 조물주의 결정적인 실수에서 비롯됐다. 같은 두뇌를 심어줬으면 같은 힘도 줘야 했었는데 아마 조물주가 남자였음이 분명한 것 같았다.
자신의 실수를 만회가 아닌 보완을 위해 결정적인 순간에 이 남자 부장을 보낸 것 같았다.
타 부서의 남자 부장 한 마디에 이 놈이 또 내시가 된다. 깨갱! 그래도 할 말은 다 한다. 그 놈의 자존심 때문에 나온 횡설수설로 본전도 못 찾았지만 기어이 주둥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아니! 망망대해 바다에 떠 있는 배가 언제 들어오는 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휴대폰은 뭐 하러 들고 다녀? 쓸데없는 통화한다고 요금 다 썼어? 회사 전화 써”
윤부장이 꼭 하고 싶었지만 방금 전처럼 들이 닥칠까 두려워 주저하던 말을 다른 부서 부장이 거침없이 쏟아내 준다. 고대리가 움찔했다. 간사한 놈.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고대리가 자신이나 다른 동료들에게 저런 씩으로 응대하는 언행들이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이해도 된다.
그래도 그런 언행은 해서는 절대 안될 짓이다.
이 회사는 석유화학제품을 판매하는 회사지 생산하는 회사는 아니다.
선박 회사도 아니다.
종합상사 화학영업 팀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하고 부장까지 달았다.
그렇지만 생산 공정이나 선박 일정을 모르는 건, 구기종목의 세계적인 선수가 그 종목의 공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여기까지는 변명의 소지가 있지만 고대리에게 무시당한 배에 대해서는 변명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또한 변명은 필요하다.
종합상사직원들이 수입되는 화물이 언제 들어오는지, 그 화물의 품질이 정상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굳이 배에 갈 필요는 없다.
세상 모두는 분업돼 있고 그 부문에 전문인 회사에 용역을 줘놨기 때문이다. 회사 또한 분업 돼 있다. 고
대리가 일정을 계속 확인하고 윤부장에게 보고하는 건 당연한 직무고 책임이다. 이 생각들이 윤부장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건 절대 아니다.
‘시건방진 새끼! 내시 같은 새끼!’
졸업과 동시에 이 회사에 입사해서 일반적이라고 말하면 거북스러워 할 여성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반적인 여자들과 똑같이 일하고, 가정을 이루고,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아직이란 말은 이 회사에서 현재까지 현재진행형이다.
직장생활하며 지금까지, 단적으로 말하자면 저 놈! 고대리가 난데없이 기어들어 오기 전까지는 유능하다고 인정을 받았고 남자직원들과 똑같이 진급도 한 상태였다.
이 회사의 장단점 중에서도 최고의 장단점은 남녀 차별이 없고 오로지 실적 위주의 회사라는 점이 장단점이었다. 남자들과 똑같아야만 했다는 말이다.
이 ‘남녀 차별 없는 실적 위주’ 사규는 창립 때 가장 앞줄에 있었고 지금도 있다.
이 사규를 지키며 지금까지 버틴 여자로써의 애로는 절대 말하지 못한다.
6.25 전쟁 때 홀몸으로 내려와 종합상사로 회사를 키운 회장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이 회사에서는 어떤 일이던 앓는 소리는 일체 금기다.
핑계를 대는 그 순간에 회사가 가진 전국 지방 영업소로 발령이 나고 일주일에 2번은 꼭 오전 9시에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본사에 와야 한다.
윤부장은 아직까지 단 한번도 지방 영업소로 발령을 받은 적이 없어 그런 불편은 경험하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회장님은 친 아버님이 살아서 숨쉬고 계시는데도 유별나게 윤부장은 친딸처럼, 어떤 때는 귀여운 막내 며느리처럼, 어떤 때는 젊고 어린 둘째 마누라나 갖고 싶은 욕정이 있는지? 오해할 만큼 윤부장을 살뜰히 챙겨주셨다.
그때는 윤부장도 아버님하고 부르는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도 했다.
그렇게 회장님께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의문을 품고 고개를 갸우뚱할 만큼 아버님처럼 철저히 보호막을 쳐 주셨다.
그런데 그 점이 지금에 와서 약점이 되고 말았다.
특히 방금 전에 낙하산 타고 온 놈인 고대리 같은 놈에게 무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도대체 그 배가 뭐길래? 잘 알고는 있다. 판매를 하는 제품들이 배를 타고 온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굳이 그 배를 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궁금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그 부두에 가서 배에 올라타고 하는 짓은 회사의 출장 경비만 버리는 하나의 요식행위라고 생각했다.
신랑과의 잠자리에서 호기심이나 배려나 격정을 억누를 수 없어 가끔씩 올라 타기는 한다. 그러나 그건 돈이 들지 않는다.
영업 팀에서 잔뼈가 굵은 윤부장 입장에서는 신랑과는 용인이 되었지만 회사에서는 그런 요식 출장은 절대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그게 약점이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혹시나 신랑이 자기 배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칠 때를 약점으로 잡을 까 염려도 들기도 했다. 쓸데없는 생각에 잠시 빠졌다.
“부장님! 회장님께서 들어 오시라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