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처럼 또 떠날 것만 같았다. 컴퓨터 앞에 놓은 서류들이 그때 이 사람이 외국에서 보낸 마지못해 쓴 손 편지처럼 느껴졌다.
‘잘 지내지? 나도 잘 있다••••••.. ‘
그때 받았던 편지 속 이야기들은 마주보며 있을 때와 전혀 다른 이별 통지서의 복사본 같았다.
사랑한다고 적힌 글자조차 인쇄된 글자로 느껴졌다. 보는 사람에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억지로, 할 수 없이, 형식인 의례행사처럼 이런 식으로 보냈는가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그 이유를 오늘에야 알았다.
‘아이구 이 등신아’
그러나 그건 수리의 변명이고 실제는 연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것 또한 ‘아이구 이 등신아’ 였다. 생긴 건 말로만 들었던 해적이나 산적의 이미지를 가진 얼굴인데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여렸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생긴 대로
‘야! 그 놈 누구야’
‘안돼! 내 사람이야’
그렇게 말을 했으면 그렇게 서로 상처를 가지고 어정쩡하게 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은 스스로 나를 안을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는지 연어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잡아 당기고 싶었다. 잡아당겨 안았다. 무슨 이유인지 오늘만큼은 놓고 싶지 않았다.
“임마! 마무리 해야지. 일어나”
그 마무리는 그 마무리가 아냐. 헛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용기가 없는 놈이 어떻게 결혼을 하고 애를 가졌을까? 혹시 저 사람 마누라가 저놈을 강제로 겁탈했는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대로 있고 싶어. 방해 하지마”
그런데 따듯한 감촉이 느껴져 눈을 부스스 떴다.
어! 세상이 천지개벽을 했나?
아니면 천재지변이 일어나 세상이 뒤 바뀌어 버렸나?
잠시 그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을 감고 속내만 웃음으로 채웠다.
지금은 단 둘이 있어 이러지만 만약에, 만약에라도 지금 단 둘이 아닌 어떤 남자가 같이 있다고 설정을 하고 그 남자에게 물이라도 한잔 가져다 주면 이 사람은 또 분명히 삐쳐 나갈 위인으로 보였다.
“오빠! 내가 그렇게 좋았어?”
이 사람은 항상 직선적이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때는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 한가지 확실한 건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즉흥적으로 던진 질문에 대응할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무방비 상대로 도발을 한 것 같았다.
‘아! 어쩌지? 만약에?’
눈을 더 세게 감아 버렸다. 기대했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전혀 반대의 예상했던 답에 대한 준비가 덜 된 상태인데 어쩌지?
그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만약에 라는 공포에 휩싸여 언제 이 사람이 소파에 앉아, 언제 머리를 바쳐 올렸는지 모른다.
예전처럼 똑 같은 자세였다.
볼을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때는 복종을 했지만 복종시키고 싶었다.
그의 혀끝이 많이 손상되어 있었지만 아직도 그는 그때 그 남자였다.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목 뒷덜미 잔털이 모두 빨려 이 남자 심장으로 들어 갈 것만 같았다.
소름이 오싹 돋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연어의 신음소리가 그의 귀를 독차지 하고 있었다.
그의 신음소리도 연어 귀를 독차지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그 정군이, 그 정형이 당신이었다면 여기 오고 싶어도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우연찮게 이렇게 다시 뜨거워진다면 언제던 또 오고 말 것이다.
지금이 세상 끝이 아닌 인생의 끝이었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여전히 너뿐이야! 사랑해”
이 겁 대가리 없는 사람이 아직도 자기가 가정도 없는 총각인 줄 착각하고 있나?
그래도 이 말이 듣기 좋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가정 상황이야 피차일반이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이 순간을 어느 놈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누군가 불쑥 들어와 나를 사랑한다며 양보해달라고 하면 이 사람! 아니! 이 놈은 또 자세를 고쳐 앉을 놈이다.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 감미롭다는 걸 느낀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때 이후로 신랑이 사랑한다는 말을 해도 가식으로 들렸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것과 똑같았다.
지금은 그런 가식이 아니란 걸 확실히 알고 있다.
“아!”
‘안돼! 아직은 안돼! 이제 시작이잖아’
연어는 신음소리로 이 말을 대신했고 이 사람도 같이 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렸어도 소리만 들어도 서로의 전부를 아는 사이였으니까 서로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었다.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전율이 끝나고도 그의 마음을 대신한 거기가 연어의 거기서 계속 꿈틀거리고, 연어는 그가 쓰러져 빠져 나가지 않게 점점 더 세게, 꼭, 꼭, 조여, 붙들고 있었다.
이 사람의 거기가 연어 속에서 아주 화가 나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연어는 신경질을 부리지 마라며 꼭꼭 붙들어 싸매기를 반복했다.
연어의 깊은 그 속의 작은 실 핏줄들이 한꺼번에 잠에서 낀 것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그 핏줄에 꽉 끼인 그의 굵직한 그것이 빠져나갔다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많은 갈등 속에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팔을 뿌리치고 도망가듯이 연어의 잔 핏줄을 세차게 두드리고는 나갔다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 왔다.
두 번 다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연어의 거기 괄약 근의 근육들이 불끈불끈 힘을 솟아냈다.
제대로 잡았다는데도 이 놈이 다시 빠져나가 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 새 즐기고 있었다.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워 눈을 마주치고는 장난스럽게 웃기도 했다.
“뽕”, “쌌어?”, “뭐?”, “똥”, “아이 씨! 또 장난•••”, 오랜 옛날처럼 낄낄대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거기서는 연어의 거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연어도 수리의 꿈틀거리는 심장을 느끼고 있었다. 그 속은 심장을 대신 하고 있었다.
연어도 수리도 엷은 신음을 낼 수 밖에 없었다. “아~”’
얼마나 잤는지 모른다. 나른함의 끝이 어딘지 궁금해졌다.
여기가 끝인가?
그가 또 깨웠다.
눈을 뜨지 않았다.
만약에 눈을 뜬 걸 보면 일어나라고 할 것이다.
너무 나른했다.
일어 설 힘도 없었다.
연어는 또 한번 자신에게 놀라고 있었다.
지금 그는 필요할 때 구입해 사용하고 쓰고 난 뒤 창고에 보관해 둔 없어지지 않은 무슨 장비 같았다. 깨끗이 닦고 다시 사용하다 보면 낯설지 않고 친근해지는 그 장비를 연어는 지금 쳐다보고 있다.
그때는 수동이었지만 지금은 시대 흐름에 맞게 자동이 되었다.
이렇게 서로 시대에 걸맞게 자동화가 되어 뜨겁게 불을 붙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