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거인, 잠을 깨다 (3)

　#9. 타이탄. 지구력2104년 4월.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지구연방의 전 수상…… 아, 실례했습니다. 작고하시기 전에 더 권력이 높은 통령이 되셨다지요. 전 통령이셨던 선대 류우님의 아드님이신 당대 류우님을 이렇게 모시게 돼서 유감이군요. 불편하시더라도 어두움을 감수해 주셔야겠습니다.”

　 “너희들은?”

　 “선생의 친구 김진욱씨를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그 분의 덕택에 지하 갱내에서 탈출했지요. 선생도 잘 아시는 타이탄의 유형수들이 우리들이지요.”

　 “그는 어디에 있나?”

　 “우리의 대장 되시는 김진욱씨는 선생과의 친분 때문에 나서기를 꺼리시더군요. 우리에게 전권을 맡기셨으니 선생께서는 우리에게 협조하시어 주둔군과의 협상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셔야겠습니다.”

　 “내가 협조하리라고 생각하나?”

　 “그러시리라고 믿습니다. 아시다시피 선생은 우리의 인질이고 우리는 선생이 선생 자신의 인격을 무척 존중하는 분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하찮은 타이탄의 유형수들과 함께 도매금으로 죽기에는 선생은 무척 아까운 인물이지요.”

　 “당신, 말을 제법 잘하는군. 이름이 뭔가?”

　 “김진욱입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나그네족 중에는 김진욱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제법 된답니다. 편의상 B계열로 불리는 김진욱 중의 하나가 저입지요.”

　 “내가 아는 김진욱은 어디 있나?”

　 “글쎄요, 말씀드릴 수 없어서 유감이군요. 지금쯤 우주 밖으로 나가셨을 수도 있고, 당신의 면전에 있는 내가 그일 수도 있고.”

　 “…….”

　 “결정이 어려우시면 잠깐 주무셔도 좋습니다. 우리에게 식량과 무기와 인질이 충분한 만큼 어떻게 해결이 나겠지요.

　 아, 그렇군요. 그 유명한 장미주도 넉넉하고, 장미주를 따르며 권주가를 불러줄 미인들도 있지 싶군요.”

　 “…….”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소생은 심심파적으로 밖의 경비병들과 총싸움 연습이라도 하고 오겠습니다.”

　 “잠깐, 협상하겠다. 조건은?”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시간이 우리 편이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셨군요.”

　 “목소리가 높군. 밖은 타이탄주둔군의 세상, 내 친구 김진욱 아닌 자에게까지 베풀 호의는 없다. 한번뿐인 기회이니 잘 연구해야 할게다.”

　 “우리의 조건은 간단합니다. 타이탄을 떠날 수 있는 우주선을 줄 것. 물론 공항까지 가는 동안 선생이 호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마는.”

　 “이 주점의 여주인들도 같이 가나?”

　 “모르셨던가요? 실은 여성과 노약자는 진작 풀어주었습니다.”

　 “속였군. 하지만 약속은 지키겠다. 주둔군사령부를 불러 달라.”

　 “고맙습니다. 저쪽에서 자꾸 보채고 있으니 곧 통화가 될 것입니다.”

　 “한 가지 기억해 둘 게 있다. 나는 류우다. 너희가 탈출에 성공하여 우주 끝까지 도망가도 내 이름을 듣게 될 것이다.”

　 “역시 마음에 드는 말씀입니다. 꼭 그 이름을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10. 2104년 4월. 타이탄의 우주 공항

　 타이탄의 공항에는 지구와 화성을 오가는 무역선과 지구 정부에서 보내오는 죄수 호송선 등 많은 우주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우주선의 선원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류우의 경호원들과 싸움이 붙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대거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그 와중에 인드라 광산을 탈출한 죄수들이 섞여 들어 류우의 경호원들을 제압하고 주점을 점령한 것은 잠시 전의 일이었다.

　 죄수들에게 인질로 붙잡힌 류우가 타이탄주둔군의 사령관에게 명령하여 탈출용 우주선을 주도록 명령했다. 일단의 죄수들이 류우의 자유와 교환한 우주선을 타고 타이탄을 떠난 것은 지구력 2104년 4월의 어느 날이었다.

　#11. 2104년 4월. 태양계. 목성과 토성 사이의 우주

　 우주선 두 척이 타이탄을 떠나 목성 궤도를 향해 달리고 있었고, 멀리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서는 일단의 전함들이 출항 준비를 갖추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대의 사령관의 이름은 ‘도살자 헨리’였다.

　 ‘도살자 헨리’는 기분이 좋았다. 타이탄을 탈출한 중범죄자들이 반드시 나타날 곳을 자신이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명목상으로 자신과 동격에 있는 타이탄 주둔군사령관인 마덕의 코를 납작하게 누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벼락출세를 한 촌놈 따위에게 뒤질 수는 없지.)

　 마덕은 류우와 동족인 동양계 출신으로 명문 류우가(劉愚家)의 후원을 받아 타이탄 주둔군사령관이 된 자라고 했다. ‘도살자 헨리’는 지구통일전쟁 때의 전공으로 계급장의 별의 숫자를 늘여온 자신과 한낱 벌가(閥家)의 청지기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목표물이 레이더에 잡혔습니다. 타이탄 측에게 통고 받은 대로 한 척의 죄수 호송선과 한 척의 무역선입니다.”

　 참모의 보고였다. 전망 스크린에는 타이탄 주둔군의 상징이 선명한 죄수 호송용 우주선 한 척과 무역용 상선 한 척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다린다. 최대한 접근을 허용한 후에, 십자포화로 일거에 가루로 만든다.”

　 두어 시각 후, 목표로 했던 우주선 두 척을 산산조각으로 만든 ‘도살자 헨리’는 자신의 전공에 대한 포상을 받았다.

　 “쓸데없는 일을 했군. 당신의 지휘권을 박탈하겠어.”

　 통신 스크린에 나온 류우가 표정도 변하지 않고 말했다.

　#12. 2104년 5월. 타이탄.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오덕양이 흑장미002에게 탈주 소동 이후의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그는 김진욱의 영통회에 소속된 자유노동자였다. 지구정부 소속 광석운반선의 선원으로 타이탄에 온 후 ‘타이탄의 유형수들’의 탈출을 돕는 외곽 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오늘 입항한 수송선으로 새로운 죄수들이 충원되어 전과 다름없이 인드라를 캐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배로 타이탄을 떠납니다. 타이탄은 지옥입니다.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흑장미002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는 이번 탈출 사건을 계획한 류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를 인질로 잡으시오. 다음 일은 스스로 계책을 세우시기를.”

　 부하들을 시켜 난동을 부리고 선원들을 끌어들여 타이탄 전역을 소동으로 몰아넣은 후에 일부러 탈주자들에게 잡힌 류우의 덕택에 ‘타이탄의 유형수들’은 탈출선을 탈 수 있었다. 죄수들이 탈 우주선과 교환되기 위해 공항으로 끌려가는 류우를 보는 흑장미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난 말이오. 아예 잊히는 것보다 조금은 인연을 남기는 것이 덜 고독하리라 생각했소. 그들에 대한 우정 같은 것은 남지 않았지만, 그들이 인드라 광산에서 죽을 경우 당신의 내게 대한 감정은 가장 나쁜 것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소?”

　 류우와 교환되어 타이탄을 떠난 ‘타이탄의 유형수들’이 ‘도살자 헨리’의 매복에 걸려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잠시 전이었다. 소식을 전한 오덕양은 류우의 집념에 대해 치를 떨었다.

　 “그 사람, 역시 호의로 도운 건 아니었습니다. 놓여나더라도 다음 그물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에 순순히 교환에 응했던 것입니다. 조금쯤 희망을 준 후에 더 큰 절망을 마련해 둔다…… 아주 질이 좋지 않은 복수 방법입니다.”

　 흑장미002를 비롯한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네 자매가 침통해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내 짐은 미리 공항에 보내 두었습니다. 부탁하신 화물도 틀림없이 전하겠습니다. 그럼……”

　 오덕양이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난 날 저녁, 흑장미002의 네 자매는 지구를 바라고 출항하는 죄수 호송선을 공항까지 나가 눈으로 전송했다. 인드라광산에 소용될 새로운 죄수를 내린 후 광석을 화물로 싣고 지구행을 하는 그 우주선의 이름은 신천지호였다.

　#13. 2104년 6월. 지구 - 타이탄 정기 우주 항로

　 그날 태양계 제6행성의 위성 타이탄을 떠난 죄수 호송 전함 신천지호에서는 선상 반란이 일어났다. 자유노동자 오덕양이 이끈 일단의 선원들이 지구군 경비병들을 제압하고 우주선을 장악했다.

　 “새로운 몸을 준비해 두었네. 즉시 수술준비를 하도록.”

　 중간물질 인드라가 들어 있는 납제 캡슐 속에서 나온 파란 눈의 재생의료학자가 역시 납제 캡슐 속에 있던 몇 사람의 인드라 중독자를 치료하기 위해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에서 보내 온 화물 상자를 열었다. 화물 상자의 내용물은 왕년에 ‘교수’가 화성의료법인에서 사용하던 각종 의료 장비였다.

　#14. 지구력2105년 4월. 우주력 제1년. 해왕성이 보이는 우주. 이번 이야기의 종장

　 한 척의 우주 전함이 태양계를 떠나 외계 우주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선수에 꼽힌 깃대에 해골 깃발이 선명한 해적선 신천지호의 외계 우주행 항진이었다.

　 모니터 화면을 통해 멀어지는 태양계의 경치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움 일색이었다.

　 “이 배로 외계 우주로 나갈 수 있을까?”

　 아무도 소리 내어 묻는 이는 없었지만 모두들 그러한 질문을 듣고 있었다. 결과를 알 수 없는 여행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가봐야지. 태양계 안에는 우리가 찾는 ‘그 무엇’이 없는 걸.”

　 누군가 답변한 것 같은 데 실제로 입을 연 이는 없었다. 전망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다가오는 우주는 어두움의 연속이었다. 외계 우주는 첫발을 내딛는 인간에게 암흑이라는 장막을 환영사로 내어, 비교가 불가능한 소외를 선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