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천년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1)
#1. 우주력 5세기. 이번 이야기의 서장
우주 어디엔가 스스로 빛을 내는 행성이 있다는 소문을 전한 이들은 노래를 생업으로 삼는 음유시인들이었다. 행성이란 항성을 모성으로 갖고 항성의 인력에 끌려 궤도를 돌며 항성이 나누어주는 빛을 의지하여 생명을 키우는 별을 말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예의 별은 스스로 빛을 내고 임의의 궤도를 떠돌고 있다고 하여 음유시인들의 노랫말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었다.
노래 속의 별은 우주의 어두운 공간에서 홀연 빛을 발하는 오아시스였고, 모든 지구계 인류의 꿈인 옛 지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별이라고 하였다. 우주 안의 사람들은 그 별이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는 증거로 그 별 생산의 자연산 순수 발효주 장미주(薔薇酒)를 그리 비싸지 않은 값으로 마시고 있었으므로 노래의 사실성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아도 좋았다.
장미꽃의 꽃가루와 꿀을 발효시켜 만들어지는 장미주의 값은 별에 따라 작은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대략 하루의 노동 임금으로 한 병을 살 수 있는 정도라고 하였다. 직업에 따라 소득의 차이가 있으므로 우주 어디에서도 통용되는 직업인 항성간 무역선의 선원을 기준으로 한 절댓값이었는데, 무역선의 선원들이 자신들을 ‘하루 인생’으로 칭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일반 노동자 1년분의 임금을 일당으로 받고 있는 무역선원들의 엄살인지라 시민들로 하여금 시샘만 키우게 한 결과를 낳은 점이 재미있다고 할 수 있었다. 더불어 장미주의 가치를 증명하는 좋은 광고 문안이 된 점은 생산업자의 입장에서는 다행일 수 있었다.
#2. 태양계 제6행성의 위성 타이탄.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은 타이탄의 지배자 장미장원이 외계 여행자를 위해 만든 주점이었다. 취급하는 상품은 명주로 소문이 높은 장미주(薔薇酒)와 장미향수, 장미환(薔薇丸), 장미꽃과 원목 등 장미 관계 상품들 일색으로, 주점 명목의 장미박물관인 셈이었다.
그날 주점 ‘언제나 장미…’에서는 상선 복분자호의 선목 수선013이 장미장원의 여주인들 중 둘째인 샤넬077과 넷째인 엘리자벳023을 상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샤넬077이 자매들을 대표하여 인사를 했다. 엘리자벳023도 함께 고개를 숙였으므로 수선013은 황급히 답례를 했다.
“역시 그랬군요.”
수선013은 전날 장미장원의 다른 두 여주인인 흑장미055와 유라069과의 면담에서 인간 외적인 신성(神性)을 읽었고, 부지불식간에 감복해버린 자신을 납득하지 못하여 밤샘 기도를 드린 끝에 어떤 결론을 얻었다.
“충실한 분인지 시험해 본 것이지만 공연한 일을 했음을 곧 알았습니다. 그렇게 쉽게 감정이 동하는 분은 나쁜 사람일 수 없으니까요.”
샤넬077은 무거운 어조로 설명을 했다. 서늘한 느낌을 주는 초록 색깔 일색의 여성복 정장에 초록색 장미꽃이 가득 수놓인 비단 외투를 입은 이색적인 차림새의 샤넬077은 전날 만나본 두 자매들과는 또 다른 의미의 여신적인 미모를 보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별을 비사법지역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무기로 삼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찾아지지 않았지요. 특히 큰언니는 한 세계를 이끌 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진, 종교적 의미의 성녀가 될 필요가 있었어요.”
엘리자벳023이 설명을 이어갔다. 하얀 바탕의 비단 천에 자주색 장미꽃을 가득 수놓은 옷을 입은 엘리자벳023은 앳된 느낌을 주는 자그마한 몸매의 아가씨였다.
“ 우리 자매의 본래 색깔이었다고는 하지만, 신을 모시는 분에게 실례를 했다고 언니들이……”
엘리자벳023은 말끝을 흐리는 독특한 화법을 사용했다. 가뜩이나 앳되어 보이는 외모에 화법마저 그러한지라 부지중에 가엾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수선013은 ‘이 아가씨도 역시…’하고 생각을 굳혔다.
“저는 꽃을 가꾸고 있어요. 농부죠. 그래서 오늘……”
엘리자벳023은 장미 화분 하나와 술병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암갈색 색깔의 꽃을 피우고 있는 장미 원목과 암흑색 장미주가 반절쯤 담긴 투명유리제 용기였다.
“‘화성의 검은 장미1000’입니다. 큰언니의 이름이었죠. 이 아이들이 우주에 나온 이유를 밝혀주세요.”
두 자매는 깊은 어두움을 담은 목소리로 번갈아 청을 했다.
“이 종류의 장미는 우리 장미장원이 타이탄에 오기 전 화성에서 개발한 인조식물입니다. 500년 전의 원종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당시의 모습으로 우주 안팎에 뿌려지고 있어요.”
수선013은 우주시대 초기의 화성에 대해 공부를 할 때 ‘화성의 검은 장미1000’은 화성 이주민이 성공시킨 지구계 인류 최초의 인조식물이라고 배운 적이 있었다. 이산화탄소가 주성분인 대기가 약간 있을 뿐인 화성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이주민들의 호흡기관을 개조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역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농작물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외계형 식물을 소개하는 장에 그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시원의 생물이 장미장원의 첫째 주인인 흑장미055의 뿌리였다? 그렇다면…… 수선013은 전날 흑장미055에게서 느꼈던 신성을 되새기며 장미장원의 여주인 네 자매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키웠다.
“모방 제품이 아닙니다. 먼 과거에 살았던 우리가 빚은 술입니다.”
사넬077의 안색은 한없이 어두웠다. 수선013은 밝히기 힘든 갈등을 감춘 표정이라고 읽고 두 자매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3. 앞 장면의 연속. 원시 행성 ‘푸른 게’별 성역. 상선 장미13호
상선 장미13호는 타이탄의 장미장원이 소유하고 있는 열세 척 우주선의 막내로 유일하게 무장을 갖추고 있는 전투함이었다. 타이탄은 장미꽃의 꿀을 모아 발효시킨 술을 외계에 수출하는 것을 주요 산업으로 하고 있었다. 장미장원은 타이탄의 상품을 외계로 실어내는 창구로 별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고, 무역선 장미13호는 그들의 겉으로 드러난 무력의 전부였다. 그러한 장미13호가 ‘푸른 게’별 성역에 나타난 것은 우주력 5세기 말의 어느 날이었다.
‘푸른 게’별은 별로 불리기는 하지만 아직 별이 되지 못한 먼지 구름의 집합체였다. ‘푸른 게’라는 이름은 푸른빛을 띤 성운이 게의 집게발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우리 장미장원의 식구들은 타이탄을 벗어날 수 없어요. 450년 전 처음 정착할 때 그렇게 협정을 맺었지요. 우주 유일의 비사법지역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강요받은 건데,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지만, 이런 중요한 일에도 용병을 쓸 수밖에 없는 점은 역시 분하군요.”
엘리자벳023이 전망창을 대신한 수정구를 보면서 말했다. 주조종실 중앙에 놓인 원탁의 중심에 떠오른 수정구 속에서는 항성으로 진화하기 전의 성운이 두 개의 집게발을 내밀고 다가오고 있었다.
“450년 전의 일이지만, ‘화성의 검은 장미1000’은 큰언니와 더불어 화성세계의 상징적인 존재였지요.”
엘리자벳023은 농부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본래 미모가 뛰어난지라 한 눈에 여성임을 알아볼 수 있는 어설픈 변장이었다.
“화성은 불모의 땅이었어요. 우리는 생계를 위하여 풍토에 적응할 수 있는 식물을 기르고 있었는데……”
엘리자벳023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전망창 가득히 선체 전부를 황금색으로 장식한 우주전함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 앞 장면의 연속. 원시 행성 ‘푸른 게’별 성역
“타이탄의 상선 장미13호는 항로를 이탈했습니다. 즉시 성역 밖으로 물러나 주십시오. 은하연방 정부의 공식명령입니다.”
잘 정돈된 외모의 장군이 장미13호의 통신 스크린에 떠올라 명령을 내렸다. 크고 깊은 눈매에 우뚝한 콧날, 시원한 이마가 명문의 후예임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명령을 전하는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
“모방 주조(酒造)가 범죄행위라는 규정은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타이탄의 독립된 행정권이 손해를 보았다는 귀선의 주장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말씀하신 사안에 대해서는 충분한 조사를 약속하겠습니다.”
장군의 말투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냉엄함이 있었다. 수선013은 준비한 답변을 전하면서 공연한 수고라고 체념하고 있었다.
“본선은 지구교의 선교선으로 일시 차용되었습니다. 저는 지구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로서……”
장미13호는 장미주를 노래한 음유시인들의 자취를 찾아 ‘푸른 게’별까지 오는 동안 수없이 많은 황금전함의 검문을 받았다. 대소를 막론하고 황금전함의 함정들에는 같은 외모의 장군이 함장으로 승선하고 있었고, 같은 의미의 경고를 발하여 수선013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엘리자벳023의 조언을 힘입어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는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냉정 그대로의 반응을 얻었을 뿐이었다.
“‘푸른 게’ 별 성역에는 보호받아야 할 영혼이 있습니다. 본인은 지구계 종교 연합회의 추천을 받은 공식 선교사로서…”
수선013의 어설픈 변명은 장군의 다음 말로 입막음 되었다. 장군의 입체 영상은 통신 스크린 속에서 걸어 나와 원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수선013이 제시한 서류를 훑어보며 차갑게 말했다.
“본 성역은 계엄 상황에 있습니다. 귀선의 소속이 일시 변경되었다 해도, 본 함대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장군은 예의를 갖춘 답변을 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장미13호의 희망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관례대로의 선물인 장미주까지 반송하며 원칙을 강조하는 데에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수선013 이하 장미13호의 간부들은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우선 저들의 감시권 밖으로 벗어나도록 합시다. 궁리를 내는 건 다음의 일입니다.”
책임자 격인 수선013이 내린 결정이었다. 장미13호는 황금전함에서 발진한 초계정들의 감시를 받으며, ‘푸른 게’별의 중력권 밖으로 선수를 돌렸다. 예의 장군이 ‘푸른 게’별 탐사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 앞 장면의 연속. 원시 행성 ‘푸른 게’별 성역 인근. 상선 장미13호
“저들은 은하연방 제일의 명문가 류우(劉愚)가의 사설전함입니다. 우리 타이탄은 저들과 협정을 맺고 있어요.”
‘푸른 게’별 성역권에서 벗어 난 후 엘리자벳023은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농부 차림으로 변장을 했다고는 하지만, 본래의 미모에 손색을 주는 것은 아니어서 엘리자벳023은 여전히 앳된 모습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우리는 모두 ‘화성의 검은 장미1000’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생체예술의 실용화를 이룬 화성생명법인 출신으로……”
이어지는 엘리자벳023의 말이었다. 화성생명법인…… 수선013은 타이탄을 떠나 ‘푸른 게’별까지 항해하는 도중에 장미13호의 항해일지를 조사하여 단편적이나마 화성생명법인에 관한 우주비사를 알고 있었다. 그는 엘리자벳023의 말을 들으며 장미13호의 항해일지에 기록된 화성생명법인에 관한 지식을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