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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반전을 사랑한 남자
작가 : 샤뚜르
작품등록일 : 2017.7.5

강지원, 29살의 젊은 사장은 얼음 왕자라는 별명으로 직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직원들도 피해가는 그에게, 회사의 햇병아리가 어느 날 찾아와 태클을 건다. 그는 그녀가 만만했었다. 이세희, 24살의 인턴 사원. 상상 속 50대 사장과는 다른 조각미남이 나의 상사라니! 사랑 때문에 마음을 열기 시작한 남자와 귀엽지만 반전 있는 그녀의 좌충우돌 연애 이야기.

 
제 19 화. 우리, 연애할래요?
작성일 : 17-07-13 21:11     조회 : 26     추천 : 0     분량 : 1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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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을 사랑한 남자

 

 

 

 

 

 제 19 화. 우리, 연애할래요?

 

 

 

 세희는 지원의 부탁으로 경영지원팀을 찾아갔다.

 

 담당 이사에게 부탁해둔 보고서라, 이사의 명패가 놓인 자리를 기웃거렸으나. 안타깝게도 그 자리의 주인은 부재중이었다.

 

 마침 그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여자 직원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얼굴도 아담해서 인형 같았다.

 

 딱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으니.

 

 눈 밑에 점만 없었더라면 정말 예뻤을 텐데. 그것은 옥에 티처럼 그녀의 인상을 강하게 보이는 데 한 몫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직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기획팀 이세희입니다. 사장님께서 부탁하신 보고서를 가지러 왔는데. 이사님 안 계신가요?"

 

 그녀를 쳐다보는 그 직원의 눈빛에서 강한 포스가 느껴졌다.

 

 "아, 안 그래도 이사님께서 나가시기 전에 부탁해놓고 가신 게 있는데. 여기요."

 

 그녀에게 보고서를 전해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세희보다 훨씬 큰 키에, 패션 센스도 수준급이었다.

 

 그녀에게서 전해지는 강렬한 포스가 옷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세희를 조금 움찔하게 만들었다.

 

 "감사해요."

 

 

 

 세희는 뒤를 돌아서서 그곳을 빠져나가기 전. 직원 카드에 적힌 그녀의 이름을 눈에 담았다.

 

 경영지원팀 인턴 민지수.

 

 인턴인 듯 인턴 아닌 그녀.

 

 뭐지? 사람을 압도하는 저 분위기는?

 

 인턴이면 나랑 동기잖아..

 

 나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

 

 

 

 

 

 막 문을 닫고 나오는 그녀에게 서 이사가 다가왔다.

 

 그는 세희가 강 사장의 직속 직원으로 발령 난 이후로 종종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듣기 좋은 소리를 습관처럼 얘기했다. 세희가 강 사장과 가장 가까운 직원인 것을 알고. 그녀에게 잘 보이면 훗날이 편할 지도 모른다는 안일한 생각에.

 

 오늘도 그는 그녀에게 사람 좋아 보이는 행세를 하며 아부를 떨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이세희 인턴 아닌가! 내가 자네 올 때까지 기다리다 일이 생겨 나온 참이었는데. 나 없는 사이 이렇게 다녀 갈까봐 얼마나 신경이 쓰이던지. 그래, 보고서는 잘 챙겼고?"

 

 세희는 매번 자신을 볼 때마다 과하게 행동하는 그가 좀 부담스러웠다.

 

 재희가 충고해준, '회사에서 아무 이유 없이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없으니 조심하라'는 말이 떠올라 그녀는 그에게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언제든지 필요한 거 있으면 부탁하도록 하게."

 

 

 

 세희가 그에게서 멀어지자.

 

 싱글벙글 웃기만 하던 그의 낯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서 이사, 서종배는 강 회장의 오랜 지기로. 실력은 없었지만 강 회장과 오랜 인연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덕분에, 낙하산을 싫어하는 지원이 그를 해고하려는 것을 이사들을 여러 번 설득한 끝에 명분을 실어 면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는 인물이었다. 지원만 아니었다면 사장 자리는 자신이 꿰찰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다행히, 하늘은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은 듯 했다.

 

 자신이 아는 강 회장은 회사를 키우는 데 관심이 많은 작자였다.

 

 젊었을 때부터 가족은 뒤로 하고 회사에 열중하던 그는. 늙어서도 여전히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한 그라면 자식들을 비즈니스적인 차원에서 좋은 혼처와 연결시킬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강 회장이 요즘 M 호텔 민 회장과 필요 이상으로 자주 만난다고 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작년에는 큰 딸을 그렇게 억지로 국내 최고의 대학병원장 아들에게 시집보내더니. 강 사장의 혼기가 꽉 찼다고, 이제는 호텔 사업에까지 발을 담그려 하는 강 회장이었다.

 

 곧 있으면 M 호텔과 K 그룹의 결혼 이야기로 언론이 떠들썩해지겠군.

 

 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감돌았다.

 

 마침, 훗날을 대비한 보험도 들어뒀겠다. '그 사람'과 거래한 것이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자신도 이 회사에서 좋은 자리 하나를 꿰 찰 수 있을 것이다. 일선에서 물러난 강 회장 덕분에 일을 진행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자신이 사장 후보에 들지도 못했던 그 날을 한 시도 잊을 수 없는 그의 눈빛은 간사하기 그지없었다.

 

 면종복배(面從腹背). 서 이사는 오래 알고 지낸 강 회장과의 의리를 언제든 져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

 

 

 

 

 

 도진은 콧노래를 흥얼흥얼 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오늘, 드디어.

 

 혜빈과 정식으로 재회하는 기념적인 날이 찾아왔다.

 

 그녀를 만날 생각에 들떠서 전날 밤 잠도 설쳤다.

 

 옷매무새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자신이 제일 아끼는 옷으로 차려입은 그는 그녀와 만나기 전. 지원의 회사에 들렸다.

 

 저번에 지원이 술집에서 얘기한 '사람 문제'라는 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자 같단 말이야. 확인해 봐야지. 온 김에 점심도 같이 먹고.

 

 이제는 내려놓은 '한량' 윤도진이지만 나의 본능적인 감은 무시 못 하거든.

 

 시기도 지원의 회사에서 인턴을 뽑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여서, 왠지 그 요주의 인물이 신입 같단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 궁금한데...

 

 

 

 얼굴을 살짝 찡긋거리며 개구쟁이 소년처럼 웃은 그는 장 비서가 사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를 따라 들어가려는데. 사장실에서 나오는 여자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멈칫.

 

 스쳐가는 짧은 시간을 통해 본 그녀의 옆모습에 왠지 호기심이 생긴 그는.

 

 결국 사장실에 들어가려던 생각을 날려버리고. 그녀, 세희의 뒤를 쫓아 따라갔다.

 

 "저기요."

 

 "네?!"

 

 그를 돌아본 그녀의 모습에, 그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고 싶었다. 오, 하느님. 맙소사. 내가 단번에 찾아냈어! 이 여자다!!

 

 강지원의 마음을 흩뜨리기 시작한!

 

 갑작스런 그의 부름에 휙 돌아본 그녀의 눈은 낯선 이의 방문으로 놀라, 동그랬다. 뺨도 말랑말랑 해 보이는 피부가 적지도 많지도 않은 살로 탐스럽게 올라 있었고. 나이가.. 한... 24살 쯤 되려나..?

 

 '이 아가씨 순진하네.'

 

 보통 저 나이쯤 되면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나?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사회 초년생이라 그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맑은 눈빛에, 장난을 치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를 혜빈보다 일찍 만났더라면 혜빈이 아닌 세희에게 빠졌을 지도 모른다. 순진한 건 순진한 거대로 장난 치고 싶고. 묘하게 귀여운 구석이 있어서 옆에 두고두고 예뻐해 주고 싶다.

 

 '내가 이런데 그 놈은 오죽할까. 뭐,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그 놈이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여자니. 나는 장난만 치고 가야지.'

 

 

 

 그는 비장의 무기인 능글거리는 웃음을 달고서 그녀의 코앞에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몇 살이에요?"

 

 "네?! 저기 무슨 말씀이신지.."

 

 당황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위기에 몰린 사슴의 눈망울처럼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이 여자, 은근히 놀리는 맛이 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다양한 표정이 그를 자극했다. 그는 어디까지 그녀가 자신을 즐겁게 할 수 있나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는 세희를 내려다보다, 서서히 허리를 숙이기 시작하며 그녀를 벽으로 내몰았다.

 

 조금 세게 나가볼까?

 

 "나랑 사귈래?"

 

 세희는 처음 보는 남자가 갑자기 능글거리는 얼굴로 다가와 버터로 칠갑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황당했다. 이 남자는 뭐지?

 

 그랬는데 대뜸. 얼굴을 들이대며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ㅁ.. 미쳤나봐!

 

 지금 일어난 상황을 빨리 파악하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그녀는. 그에게 어떻게 대응을 해야할까 갈등이 되었다. 사장님 아시는 분이면 욱하는 성격대로 나갔다, 쪽박만 찰 것이고. 아.. 그렇다고 눈앞에 이 파렴치한 놈을 두고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데... 어떡하지?

 

 "저기요. 이러시면 곤란하거든요? 경찰에 확 신고해 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들이 아슬아슬한 자세로 마주보고 있던 그때.

 

 

 

 때마침 도진의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씨익.

 

 도진은 이제, 세희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지원을 도발하기 위한 쇼 타임~!!

 

 '오늘 기분 정말 죽이는 구나~! 사랑도 찾고. 친구에게 최고의 도발도 날리고. 지원이에게 친 장난들 중에 오늘만큼 짜릿한 건 없을 거야!'

 

 그는 눈을 살짝 거만하게 내려뜨며 얘기했다.

 

 "그래? 그럼 내가 이렇게 하면 신고할 거야?"

 

 그는 뒤에서 그들을 보고 있을 지원에게 확실한 자극을 주기 위해. 그녀가 기대고 있는 벽에 한 손을 턱하고 올린 뒤, 남은 한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려 자신을 마주보게 했다.

 

 그리고 고개를 틀어 서서히 그녀의 얼굴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봤을 때, 입술과 입술이 맞닿아 키스를 나누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기 위해.

 

 천천히. 천천히.

 

 그녀의 입술 언저리에서 도진의 얼굴이 멈춘 순간.

 

 시베리아의 냉기 보다 더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윤도진."

 

 아쉽지만, 장난은 여기까지.

 

 

 

 

 

 ***

 

 

 

 

 

 세희가 사장실에서 나간 후. 장 비서가 들어왔다.

 

 "사장님, 이번 신입 인턴들을 대상으로 하는 브리핑 심사는 언제하실 생각입니까?"

 

 "아. 그건 나도 계속 생각하고 있어.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하니까. 조만간 알려줘야겠지. 마침 괜찮은 주제도 생각이 났으니."

 

 장 비서와 이야기를 끝낸 뒤. 사장실 문을 열고 나온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키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진과 세희였다.

 

 지원은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머리로는 도진이 또 장난을 치는 거라고. 넘어가면 안 된다고 그러는데. 세희를 이용해 장난을 치고 있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R 그룹의 부사장일지라도. 자신의 직원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친구 관계와는 별개로. 단단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것은 마치.

 

 먹잇감을 뺏긴 짐승이 느끼는 그것과 비슷하달까.

 

 아무튼 아직은 그가 느끼지 못한, 복잡 미묘한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아무리 도진이라도 세희를 함부로 다루는 것은 용서 못 한다.

 

 그는 그들에게 뚜벅뚜벅.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도진을 밀어내고 세희의 팔을 끌어 자신의 뒤로 숨겼다.

 

 "윤도진. 아무리 너라도 우리 직원에게 함부로 하는 것은 용서 못 해."

 

 도진이 본 지원의 그 모습은 낯선 것이었고. 어린 아이가 아끼는 물건을 뺏기기 싫어하는 투정처럼 보였다.

 

 도진은 순식간에 자신의 눈앞에 있던 세희를 자신의 등 뒤로 채 가는 지원에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게 정말 직원이라서 그런 거냐? 네 '여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

 

 '흐응~. 이로써 확실해졌네. 아이고, 저 아가씨 불쌍해서 어쩌냐. 저 둔탱이가 각성하려면 시간 꽤나 걸리겠는걸. 아가씨, 나랑 늦게 만난 걸 아까워해야 해.'

 

 그것은 도진의 ‘착각’이었다. 지원과 도진이 알고 지낸 시간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100%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 강력한 사건(?) 앞에서 그냥 지나칠 바보가 어디 있을까.

 

 

 

 도진은 언제 장난을 쳤냐는 듯. 뻔뻔한 얼굴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의 뜻을 전했다.

 

 "야야~. 좀 봐줘.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쳐다보면 눈물 나잖아. 나도 다 사정이 있었다고."

 

 분위기를 바꾸고자 싱긋 웃는 얼굴까지 해줬건만. 지원은 여전히 도진에게 날을 세웠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온 이유가, 이번에는 우리 직원을 상대로 한량 놀이 하려는 거라면 좋게 말할 때 그냥 가라."

 

 도진은 발끈했다. 지고지순한. 한 여자만 바라보는 사나이를 무시하지 말라!

 

 "아냐 임마! 내가 전에 얘기했잖냐.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 오늘 그 여자랑 정식으로 재회하는 날이거든? 확인할 것도 끝났고.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

 

 세희는 갑자기 나타난 지원의 등장에 한 번 놀랐고. 자신을 그의 등 뒤로 숨기는 행동에 두 번 놀랐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것 같았는데. 심장이 간질간질 거렸다.

 

 별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너무 놀라서 그런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그의 뒤에 있던 세희는 지원에게 식사하러 가자는 도진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제 자신은 빠져줘야 할 것 같았다. 돌아가야지.

 

 "거기, 아가씨. 괜찮으면 아가씨도 같이 갈래요?"

 

 지원이 여전히 세희를 감싸고 보여주지 않자, 도진은 몸을 비스듬히 꺾었다가.

 

 싸늘하게 쳐다보는 지원의 눈빛에, 제자리로 돌아와 그에게 싹싹 빌었다.

 

 "아. 진짜! 미안하다고. 내가 다시는 장난치나 봐라. 근데 저 아가씨가 누구 길래 자꾸 숨기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소개 좀 시켜줘."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강 사장은 계속 그 상태로 있을 것 같아. 그녀는 지원의 등 뒤에서 나와, 도진이 있는 쪽으로 한 발 걸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기획팀 인턴 이세희입니다."

 

 "아, 세희 씨. 반가워요. 지원이 친구 윤도진입니다. 그리고 아까 일은.. 심하게 장난쳐서 미안해요. 그리고 전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서 세희 씨가 저 좋다고 해도 안돼요."

 

 파렴치한 장난을 치던 그가 지원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정말로 나쁜 뜻은 없었다며 해맑은 소년처럼 싱긋 웃어 보이는 그에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진심이 듬뿍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얘기하는 그의 모습이 정말 담백했달까.

 

 화해와 인사의 뜻으로 세희와 도진은 악수를 나누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점심을 같이하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원이 잡을 새도 없이. 세희는 비상구로 나가버렸다.

 

 도진에게 향한 눈빛만 싸늘했지. 지원은 조금 뾰루퉁한 상태였다. 아까 그가 도진으로부터 그녀를 구해줬는데. 한 마디도 없이 쏙 빠져나가버린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진이 아니라도. 그녀만 괜찮다면 점심도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려고 했다.

 

 같이 밥 먹기로 한 사람..?

 

 혹시.. 박재희라는 남자 말인가?

 

 

 

 

 

 ***

 

 

 

 

 

 혜빈은 자신이 아는 선배가 운영하는 갤러리에 들렸다 오는 길이었다. 선배가 운영하는 갤러리에는 초보부터 유명한 작가들까지, 다양한 화가들이 그곳을 거쳐 간다.

 

 강 회장이 그녀에게 개인 작업실 겸 갤러리를 열어준다면 작가들과 얼마든지 교류를 나눌 수 있겠지만.

 

 과연 내가 원치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서 한국에 완전히 터를 잡는 게 옳은 걸까.

 

 난 그런 건 싫어.

 

 

 

 객실 카드를 받기 위해 프런트로 다가간 그녀는.

 

 "아, 고객님. 오늘 아침에 고객님 앞으로 온 카드가 있었습니다. 여기."

 

 호텔 직원이 전해준 작고 세련된 카드 하나를 받았다.

 

 순백색보다는 크림색에 가까운 그 카드는. 새신부의 웨딩드레스처럼. 수줍게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 저번에 말한 약속은 기억하고 계신지요. 오늘 저녁에 만나서 식사해요. 장소는...

 

 '그 놈이다!'

 

 안 그래도. 혜빈은 자신을 구해줬다고 뻥을 치는 그가 연락을 해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 마음에 변함이 없는 그녀인데.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하려던 건 그거대로 괘씸하지만.

 

 정갈하게 쓰인 필체에서 절제된 힘이 느껴졌다. 남자답지만 남자답지 않은 고운 필체에 잠시 호기심이 일었다.

 

 미술을 전공하고 사랑하는 그녀에게는 아름답거나, 고유의 특색이 잘 살아있는 추상물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습관이 있었다. 특히 선으로 표현된 그림이나 글자는 더더욱!

 

 누굴까?

 

 약속 장소에 나갈 생각에 바빠진 그녀는.

 

 빠른 속도로 객실로 올라가 샤워를 하고.

 

 짙은 스모키 화장으로 자신을 가렸다. 짙은 화장은 자신의 분위기를 좀 더 도도하고 강인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자신의 여린 모습들도 가려주니까.

 

 혜빈에게 화장은 가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누군지 궁금하기도 하고..

 

 여차하면 그 '기술'을 써야지.

 

 

 

 

 

 ***

 

 

 

 

 

 도진은 자신이 잡아둔 룸에 가서 음식을 시킨 뒤 혜빈을 기다렸다.

 

 곧 올 시간이다.

 

 두근두근.

 

 고등학생 때 만났던 그녀를 한 시도 잊은 적이 없고. 그때의 두근거림 또한 잊은 적이 없다. 잠깐 보고 다시 놔줄 수밖에 없었던 호텔에서의 밤 이후에도 그녀 생각에 두근거렸다.

 

 잠시 불을 꺼 두었던 그의 심장이 이제. 주인을 찾아 뜨겁게 뛰려고 한다.

 

 드르륵-

 

 그녀다!

 

 바(Bar)에서 봤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짙은 화장과 무릎 위까지 내려와 몸에 착 달라붙는 붉은색 원피스에, 검은색 캐시미어 조끼를 걸친 그녀는 수수했던 지난번과 달리. 강렬하고 섹시했다.

 

 저렇게 몸매를 다 드러내는 옷을 입고 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다른 놈들이 보면 어쩌려고. 뭐, 어쨌든. 역시, 우리 누나. 얼굴도 착해. 몸매도 착해.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의 몸매를 훑어 내려가던 도진은.

 

 헉. ㅇ.. 이게 아니지. 아놔.. 진짜 한량 연기하려다 물들어 버린 게 아닌가 몰라. 이제 그러면 안 되잖아! 정신 차려!!

 

 스멀스멀 올라오는, 본능에 탑재 되어버린 한량끼를 누르기 위해 허벅지를 손으로 꼬집으며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목적을 되새겼다.

 

 "왔어요? 일단 여기 앉으세요. 자세한 얘기는 식사하면서 해요. 이 집 주방장이 제일 자신 있는 요리로 시켰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하하."

 

 "......"

 

 "?"

 

 

 

 문을 닫고 들어와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그녀의 행동에 그는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서 앉으세요. 음식 식으면 맛없어요."

 

 "그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갑자기 훅 다가와 그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네? 무슨..?"

 

 "지난번에 남기고 가신 그 쪽지에 적힌 위험이라는 게 정확이 뭐였나요?"

 

 그녀의 말에, 그는 잠시 그 날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혜빈이 객실에 들어가기 전, 자신이 그녀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 방에 다 왔어요, 누나. 이제 누나는 약속대로 내 여자에요.

 

 기억이 났나? 내가 한 말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도진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거요? 어떤 '놈'이 아가씨를 룸으로 데려가려고 하길래 제가 손써서 숙소까지 모셔다 드렸잖아요. 술에 엄청 취해 있으셨는데. 기억이 좀.. 나셨어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혜빈은 한 번도 끊겨본 적 없는 머릿속 무언가가 '톡'하고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정신줄.

 

 저렇게 순진한척. 아무 것도 모른다는 척 하고 있는 것들이 제일 나쁜 놈이야. 프랑스로 건너간 뒤, 끈적한 시선으로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는 남자들을 상대하는 데 익숙한 그녀였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놈들을 떼어내느라 이골이 난 그녀는. 자신의 집 근처에 태권도와 호신술을 가르쳐주는 도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매일 칼을 갈았더랬다.

 

 

 

 "그 '놈'이 너 님이 아니구요??"

 

 "무슨..."

 

 지원도 모르는 혜빈의 특기.

 

 "너 같은 놈 갱생 시키는 데는 이게 최고지!"

 

 그녀는 호신술을 도진에게 시전하려고 몸을 움직였다가 그만.

 

 !!!!!!

 

 도진의 위에 엎어져, 그의 품속에 갇혀 버렸다.

 

 '이.. 이게 뭐야아아아아~~!!!!!'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자세가 상당히 위험한 자세라는 것 정도는 아무리 어른들의 연애에 무지한 그녀라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로 열기가 쏠렸다.

 

 도진이 그녀가 갑자기 달려와 당황한(?) 나머지. 그녀에게 살짝 발을 걸어 자신의 품 위로 넘어뜨린. 완벽하게 고의적인 자세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도진은 그가 뒤로 넘어가게 된 자리에 있던 푹신한 방석 덕분에 등에서 느껴질 고통은 면할 수 있었다.

 

 '후유. 뭔가 무서운 짓을 할 것 같던데.'

 

 갑자기 왜 저랬을까? 아니지. 아니지. 그건 밥 먹으면서 서로 풀도록 하고.

 

 여기 이렇게 직접 기회를 주셨는데. 이걸 마다하면 내가 아니지.

 

 싱긋-

 

 "무섭잖아요. 누나."

 

 "누나?! 이봐요, 언제 봤다고 반말이세요?"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는 모르지만. 혜빈은 씩씩거리고 있었다.

 

 화내는 모습도 그의 눈에는 예쁘게만 보이니. 중증도 이런 중증이 없다.

 

 "에이~. 우리 누나 기억 안 나나 보네~. 정말 나 기억 안 나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혜빈에게 씨익 웃어준 그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일어나 앉은 덕분에 혜빈은 그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 기억 해줄래요?"

 

 그는 혜빈의 얼굴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쌌다. 그녀를 정말 사랑하고 아껴서. 배려하는 마음이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절절 묻어났다.

 

 너무 놀라 동그랗게 떠진 그녀의 눈을 마지막으로. 그는 한 손을 그녀의 뒷목으로 가져간 뒤, 눈을 감으며 고개를 틀었다.

 

 굳게 닫혀 있는 여리디 여린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촉촉한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여러 번 닿을 때마다 쪽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입술에 도둑 키스를 하고 뛰쳐나간 고등학생 윤도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풋풋했던 그 시절의 고등학생 윤도진은 어느덧, 한 여자를 보듬을 수 있는 듬직한 사내가 되었다.

 

 부디 자신을 밀어내지 않게 해달라는 마음으로 부드러운 입술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던 그는.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말캉한 그것으로 그녀의 입안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는 그녀의 약한 힘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안 놔 줄 거야.

 

 웬일인지 혜빈이 저항하던 것을 순순히 포기하자, 그녀를 살살 달래던 그의 입맞춤은 점차. 그녀의 숨결 하나 놓치지 않을 것처럼 농밀해져 갔다.

 

 그들이 재회의 인사를 나눈 지 얼마나 지났을까.

 

 붉어질 대로 붉어진 혜빈의 얼굴을 쳐다보며 도진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쪽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했다.

 

 이제는 얼마든지 볼 수 있고. 할 수도 있으니까. 누나를 위해서 내가 한 발 물러나야지.

 

 그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제 기억났어요?"

 

 "......"

 

 "우리, 연애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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