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요..."
미령이 서재까지 따라와 원길을 달랬다.
"미령씨... 내가 미령씨랑 결혼하면서 불안했던 적이 많아요... 남들이
다 해주는 일을 내가 못해줄 때... 그게 미령씨에게 결점이 될까봐... 초
조했어요. 근데 그게 현실로 보이니까 자격지심이 일었나봐요. 미령씨는
잘못없어요. 다 내 잘못이에요."
"원길씨....."
어떤 말로 위로해야할지 몰랐다.
위로를 해도 원길 마음 속에 입은 상처는 되돌리긴 어려워보였다.
"참 무능하죠?"
"........."
"미령씨한테 부탁하나 할게요."
"말해봐요..."
"내가 못해주는 일... 그 남자와 해도 되요..."
청천벽력과는 같은 말이었다.
버젓이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라는 말인가.. 그것도 내
남편이 그 소릴 하고 있다는 거야... 어이없고 속상했다.
"어떻게 말해야 믿어주겠어요. 나 그 사람과 오래전에 끝났어요. 믿어줘
요."
"솔직히 말해도 되요...."
"왜 이렇게 꽉 막혔어요!! 왜 내 진심을 받아드리지 않는 거에요!!"
"근데... 즐기고 나면 내 곁에 있어줘요..."
원길은 계속해서 자책하는 말만했다. 미령이 도저히 들을 수 없어 차갑
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욕실로 들어가 수돗물을 틀어놓고 서럽게 울었다.
원길 때문에... 남편 때문에 이토록 크게 울어본 적이 있었나...
늘 남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만만하던 그가 나약한 남자로 되
버린 게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버렸다고... 미령이 스스
로를 원망했다.
그 후 원길은 연희동으로 가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다. 미령도 원길에게
전화하고 찾아가진 않았다. 어차피 겪어야 할 문제라면 얼마의 텀을 두
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도우미 아줌마를 통해 와이셔츠와 속옷, 양말
등은 챙겨보냈다. 그리고 약은 몇 알씩 봉투에 담아 보내곤 했다.
원길이 보내온 약을 삼켰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몇일째 두통이 이어졌
다. 남비서가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 권했지만 약이면 괜찮다고 얼버무렸
다.
"남비서... 그 조성현에 대해 알아봤나?"
"아직... 하지만 곧 연락이 올 것이 같습니다."
"그래... 사이버수사대장한테는 연락이 없었고?"
"없었습니다."
"푸른 눈을 가진 거머리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라고 생각되나?"
난해한 질문이었다.
남비서가 질문을 받고 우물쭈물했다.
"글쎄요... 삼정에 불만이 많거나 한탕주의자 아닐까요?"
"삼정에 불만이 있다... 원한이 있다는 말이군..."
삐- 원길이 필터로 손가락을 갖다댔다.
"회장님. 대한일보 기자가 왔는데요..."
"기자?"
원길이 남비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남비서는 허리굽혀 물러났다.
비서실로 나오자 수염이 텁수룩한 기자가 수첩을 들고 서 있었다. 남비서
가 대신 접대하러 응접실로 갔다.
"회장님을 직접 뵙고 말하고 싶은데요..."
"저한테 먼저 말씀하시면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음....."
시큰둥하던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정 때문에 연일 종합주가지수가 오르는 거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
"발표를 미루는 이유가 뭡니까?"
"그 얘기라면 회장실에서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다르게 질문하죠. 증권가에서는 나노반도체 실험 성공
이 거짓이라고 나돌고 있던데... 사실인가요?"
남비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삼정이 외국기업과 제휴를 하려고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
습니다. 그 중 지난 봄 일본 POA사와 제휴를 맺으려다 실패했죠. 그룹을
물러받은 장회장으로는 내부적인 신임을 얻기 위해 큰 일을 터뜨려야 했
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간단히 얘기해주시겠습니까?"
"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장회장이 고의적으로 주가조작을 했다구
요!"
남비서가 눈에 힘을 주었다.
"말씀 조심하시죠.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말해볼까요? 나노반도체 실험성공을 두고 대주주들을 모았습니
다. 근데 그 전에 주가가 많이 하락되었더군요. 예를 들어 홍콩이나 싱가
폴에 현지 금융사를 두고 매수 주문을 내는 방식이 있습니다. 적당히 하
락시킨 후 다시 매집을 시작해서 초장부터 상한가로 끌어올린 거 아닙니
까!!"
대한 일보 기자의 시나리오는 그럴 듯했다. 정황을 살피면 그렇게 각색하
고 짜맞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비서가 점잖게 말했다.
"말도 안되는 엉뚱한 얘기로 기사를 쓰면 명예훼손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
요."
"오호- 과민반응이 오히려 신선한데요. 얘기 잘 들었습니다."
기자는 수첩을 챙겨 일어났다.
남비서가 나가는 기자를 위태롭게 봤다.
푸른 가진 눈을 가진 거머리....
그 사람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회장님이 모든 걸 뒤집어쓰게 돼....
어깨에 힘이 빠진 남비서가 원길을 애처롭게 봤다. 원길은 무슨 말이라
도 해보라는 듯 응시했다. 남비서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기자의 말을 전했
다. 원길이 갑갑한 듯 타이를 풀고 윈도우 밖을 내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