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를 만난 원길이 일식요리에 반주를 곁들여 식사했다. 좀처럼 입이 무
거운 상무였다. 원길은 싱거운 얘깃거리로 허허 웃었지만 상무는 그리 달
갑지 않은 듯 했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내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왜요? 횟감이 좋은데... 그만 드시겠습니까?"
원길이 알면서도 모른척 물었다.
"우리가 지금 남에 걱정이나 할 때입니까?"
"상무님......"
둘만 있을때는 원길이 상무에게 존칭을 써주었다. 그도 그럴것이 상무는
이제 지긋하게 나이든 노인네고 삼정 기업 창단 멤버이기도 했다. 아버지
와 함께 사업을 시작했고 이만큼 키울때까지 함께 있어준 사람이었다. 그
에 비해 상무 직함은 작았다.
"회장님....."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흠.... 모레 있을 주주총회는 어떻게 할 건가?"
"취소하려고 합니다."
"뭐야! 자네 제 정신인가?"
상무가 버럭 화를 냈다.
예상했다는 듯이 원길이 실없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삼정을 이대로 무너지게 할 참이야?"
"이게 아버지 뜻 아닐까요? 삼정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요...."
"자넨 몰라. 명예보다 삼정이 생존을 하느냐 마느냐인데... 명예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명예는 삼정이 살고 그 위에 있는 거야!"
어린 애를 꾸짓듯 나무랐다.
"그럼 상무님도 거짓 사실로 삼정을 몰아넣자는 겁니까?"
원길도 가만히만 있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네. 짧게는 한 달내로 끝날 수 있어. 나노반도체 실험은 오
차 발견으로 성사되지 못했다고 재발표를 하면 그만일세... 근데 곤두박
질 치고 있는 주식은 어떻게 되나... 당장 한 달 후면 휴지조각으로 될
판이라네..."
원길이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한 순간의 결정이라는 걸 명심하게."
"상무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상무도 진정시키려는 듯 술잔을 비웠다.
"모레 있을 주주총회에서 표결은 없는 거네. 그 자리엔 대주주들만 모실
거야. 그리고 그들에게 나노반도체 실험이 성공되었다고 발표할 거야..."
"주주들까지 속이자는 겁니까? 우리 편을요?"
"그래야 언론이 속을 거야. 가만히 생각해 보게. 대주주들이 가만히 있
을 거 같아. 물불 앞가리고 주식을 팔려고 할거야. 그들이라고 왜 못해.
당장 휴지 조각이 될 판인데 싼 값이라도 팔고 싶어할거야... 하지만 실
험이 성공했다고 발표하면 끌어 모으는 데 힘을 쓸 거야."
속이 불편한지 원길이 허리춤을 잡았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없네!"
단호한 상무의 대답이었다.
연희동으로 오는 차 속에서도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우리 편까지 속여가며 거짓 발표를 해야하나...
파란 눈을 가진 거머리가 정말 한국인이라면... 골치가 아팠다.
"남비서...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나?"
비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룸미러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