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가 다급히 회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아무리 기업 창단멤버로 아
버지와 오랜 친분을 지낸 사이지만 엄연히 여긴 회장실이었다. 원길이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상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거리며 다그쳤
다.
"왜 발표를 하지 않는건가!!"
"그것만은 제 뜻에 따라주세요..."
"꼭 삼정이 망하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는 사람 같군..."
"상무님...."
"자네를 이해할 수 없어.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렵게 가는 이유가 뭐
야."
"쉽게 가는 길에는 그만한 함정이 있으니까요."
"좋아. 그럼 자네가 가는 길은 안전하다고 보나?"
원길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여태까지 자넬 믿고 따랐던 내 믿음까지 져버리지 말게."
상무는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갔다.
기어이 상무와의 갈등이 터지고 말았다. 원길이 발표를 미루면서 상무의
눈에 들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룹 CEO는 자신이었다. 중
대한 결정과 최종 책임은 본인이란 걸 알기에 언론 발표를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대주주를 속인 건 어쩔 수 없다 치지만 국민 모두를 속이기
엔 자신이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남비서를 호출했다.
"차 대기 시켜. 일찍 집에 가야할 거 같네."
남비서가 안쓰럽게 원길을 봤다.
딩동딩동- 차임벨이 울리고 주방에 있는 미령을 대신해 가사도우미 아줌
마가 나갔다.
"황 박사님이세요."
"황 박사님이요?"
"회장님 진료보시는 의사 선생님이세요."
도우미 아줌마는 전부터 쭈욱 이곳에서 일해왔으므로 황박사를 한 눈에
알아봤다.
"안녕하세요. 여사님."
"네. 안녕하세요. 황박사님."
미령이 흐뭇하게 웃고 쇼파로 안내했다.
"회장님께선 아직 퇴근 전이신데...."
"아... 전 단지 배달만 왔습니다."
"배달이요?"
"낮에 약을 부탁하셨거든요."
미령이 포장된 약품을 받았다.
"어디 편찮으신가요?"
"아뇨... 영양제나 다름 없습니다."
황박사의 입가가 떨렸다.
"네.... 어떻게 약을 드리면 될까요?"
"그냥 찾으시면 드리세요. 그렇다고 자주 드시게 하시면 안됩니다. 꼭 부
탁드립니다. 여사님이 잘 놔뒀다가 드리세요. 회장님이 먼저 드시게 하
지 마세요."
"왜죠?"
".........."
"황박사님?"
"죄송합니다. 그렇게 알아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황박사는 끝내 경직된 얼굴로 방문을 마쳤다.
미령은 약품을 들고 어디에 둘까 고민하다 침실 장롱 윗칸에 넣어두었다.
"회장님 오세요."
황박사가 가고 얼마 안 있어 원길이 들어섰다.
"오셨어요..."
"피곤해서 눈 좀 붙여야겠어요."
"목욕물 받아놓을까요?"
"그래 주겠어요?"
미령이 원길의 정장 윗도리와 넥타이를 받아 장롱에 걸어뒀다. 장롱속 약
품이 눈에 들어왔다.
"참.. 황박사님 오셨어요."
"약 어디 있어요?"
"필요할 때 말씀하세요. 그러는 게 좋다고 황박사님이 말씀하셨어요."
원길도 장롱 속 약품을 봤다.
하지만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자신이 그걸 꺼내긴 높아보였다.
"꺼내줄래요?"
"안된다고 했어요."
"미령씨!"
"글쎄요. 안되요!!"
"나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래요?"
"원길씨......."
미령이 당황해 얼굴이 빨개졌다.
"약 하나도 내 맘대로 못 먹어요? 미령씨도 날 불구자로 동정하죠?"
"그런 말이 어딨어요..."
원길이 고개를 휙 져쳤다.
"조성현... 옛 애인한테 돌아가고 싶죠....."
미령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말해요. 언제든지 보내줄테니까.... 나같은 병신이 당신같은 여자를 갖
는 건 욕심이에요...."
휠체어를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리둥절한 미령이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