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이 골프채를 들고 닥치는대로 물건들을 부셨다. 악에 받친 듯 지칠
줄 몰랐다. 소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만 좀
해...... 뻥긋거릴 뿐 소리도 못 질렀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
럼 실내는 어수선했다. 성현은 기운이 다 떨어져 골프채를 내려놨다.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마....."
"오빠. 오빠한텐 미령이밖에 없어? 난 뭐야...."
"너도 어차피 날 사랑하지 않잖아...."
소라가 멈칫 섰다.
"한번만 내 눈 앞에 띄는 날엔 아니.... 너와 삼정그룹이 연관되는 날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 거야. 농담으로 하는 소리 아냐. 당장 떠
나!!"
무서운 소라가 허겁지겁 트렁크에 짐을 샀다.
성현이 매섭게 노려보고 나갔다.
미령이 비서실 앞에서 머뭇거렸다. 남비서가 일찍 알아보고 유리문을 열
어주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뵐 수 있을까요..."
"여쭤보겠습니다."
남비서가 회장실로 들어가고 미령은 비서실 책상을 내려봤다.
이소라... 소라 명패는 물론 책상이 비어있었다. 미령이 의아해 마침 지
나가던 경비요원한테 물었다.
"아... 이 비서님이요. 그만 둔 걸로 아는데요..."
"그만둬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허탈하게 미령의 책상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남비서가 굳은 얼굴로 나왔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알겠어요. 그럼 이거라도 전해주세요... 여름셔츠 몇 벌 담았어요.."
"네... 어떻게 지내시는 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학교 다니고 있어요..."
미령이 옅게 보조개를 피웠다.
미령은 오후 강의를 듣기 위해 강의실에 앉았다. 복학생이라 마땅히 친
한 친구도 없었다. 그냥 언론을 통해 미령을 먼저 알게 된 과친구들이 말
을 걸어오거나 했을 뿐이었다. 지루한 약리학 수업이었다.
"다음 시간에는 정신분열증에 관한 약물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정신 분열증....
여전히 원길은 그 약을 복용하고 있겠지....
약 성분을 의뢰받고 원길에게 약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원길이라면 어
디서든지 약을 구할 수 있으리라.... 황 박사와 짧게 통화를 했었다.
//회장님이 원하신 약입니다//
미령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무엇 때문에...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힘들었을까...
어쩌면 원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떳떳할 수 없었다.
"언니. 저녁 먹고 들어갈래요?"
복잡한 고민에 수업도 제대로 못 들었다. 그나마 자주 움직이는 과 친구
가 말을 걸어와서야 정신이 들었다.
"미안... 집에 들어가야 할 거 같아..."
"아쉽네요... 근데요. 언니... 너무 우리랑 벽을 두려고 하지 마세요.."
"벽?"
"우리와 신분이 다르지만... 언니랑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많아요... 호
기심이 아니라... 정말 따뜻한 친구요......"
"고마워..."
친구... 따뜻한 친구.... 그런 친구가 내게 있었을까....
원길마저 등을 돌리고 날 보려 하지 않는데....
문득 성현이 보고 싶어졌다.
내가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성현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미령이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열어 번호를 눌렀다.
".........."
그쪽에서 이미 받았지만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미령이니?"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