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말아요.”
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는 힘없이 말했다.
잠시 동안 안 그래도 조용하던 죽음의 땅이 더욱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봄이는 자신이 경솔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말았다.
“이해가 안 되는군.”
“가지 말라구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내가 전부 다 잘못한 거 아니까......... 날 두고 가지 말란 말이에요.”
그러나 상훈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미 늦었어.”
그가 다시 등을 돌리려는 순간, 봄이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한테는 제가 완전히 짐짝으로 느껴졌겠죠. 매번 가는 곳마다 발목만 잡고, 어쩌다 성의를 표시했을 때도 내가 거부했던 거 알아요. 솔직히 지금 전 아저씨 속마음을 이해 못하겠어요. 도대체 아무 인연도 없는 날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건지........ 물론 고맙기는 했지만, 동시에 무섭기도 했어요. 솔직히 생각해 봐요. 이런 세상에서 왜 아무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겠어요?”
상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봄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첫 만남부터 날카롭게 대한 거예요. 두 번째 만났을 때도 그렇고....... 그런데 아저씨한테 세 번째로 도움을 받을 때까지도, 전 아저씨를 위해서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런데도 난 솔직히 얘기해서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어요. 사실 전 죄책감이 뭔지도 자세히 몰라요. 그런데 이상하게..........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봄이는 자신이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말했던 적이 있었나 생각하고 내심 스스로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다음 해야 할 말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봄이의 입술이 답을 내지 못하고 닫혀갈 때쯤 상훈이 입을 열었다.
“고작 그 말 하려고 날 쫓아온 거냐?”
그 말을 들은 봄이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봄이는 진심으로 사죄하면 모든 게 다 부드럽게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눈앞에 있는 자신을 세 번이나 도와준 이 남자는 자신을 이해해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난히 그가 내뱉은 차가운 한 마디가 가슴 속 깊숙이 박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별생각 없이 저질렀던 일들이 남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자 그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봄이는 지금껏 자신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에 해당하는 사람은 깊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아닐까?
“솔직히 생각해 봐. 난 너한테 해줄 만한 건 다 해줬어. 그런데도 아직 부족하다는 거야? 더 이상 내가 뭘 더 참견하길 바라?”
상훈은 더 이상 봄이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 뒤돌았다. 봄이는 그만 땅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또 다시 혼자가 되긴 싫단 말이에요!”
봄이의 그 절규는 메아리가 되어 죽음의 땅 위에 울려퍼졌다.
상훈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비니를 벗고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러고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더니 몸을 돌려 봄이에게로 다가왔다.
상훈이 주저앉아 울먹이는 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쉽게 용서해줄 것 같아?”
봄이는 그렁그렁한 눈가를 소매로 훔쳤다.
“그럼, 어떡해야.........”
“네가 날 위해서 뭘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
봄이는 고민에 빠졌지만, 솔직히 말해서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소녀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뭐든지 상관없어요. 내가 해줄 수만 있는 거라면.”
“정말 뭐든지? 아주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네, 뭐든지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힘없이 말하는 봄이에게 상훈이 몇 걸음 다가왔다. 몇 발자국이 아니라 봄이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럼 귀여운 척 해봐.”
“알겠.........뭐라구요?”
봄이는 당황해서 자신이 잘못 들었던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조용히 바라보다, 갑자기 상훈이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봄이는 그런 그를 멍청한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안 할 거야?”
“아니, 잠깐만요. 갑자기 그런 걸.........”
“아냐, 더 강한 걸 시켜야겠어.”
상훈이 말을 가로막고는 손사래를 쳤다.
봄이의 얼굴이 증기가 새어나올 정도로 뜨겁게 달궈졌다. 또 다시 그의 장난에 놀아나고 말았다는 사실에 수치심과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남의 진지한 감정을 가지고 놀다니........ 봄이는 이 이상 자신의 마음을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
봄이는 씩씩거리며 그에게서 뒤돌아버렸다. 도무지 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저 짓궂은 남자의 짜증나는 얼굴을 주먹으로 몇 대만 때리면 분이 풀릴까?
그러나 상훈은 그런 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녀를 지나쳐갔다.
“관두자. 그럼 난 간다.”
“가긴 어딜 간다는 거예요?”
봄이가 괜히 신경질을 냈다. 그걸 눈치챈 상훈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충 대답했다.
“네 가방 찾으러.”
방금 전까지 얼굴을 달구며 성질을 내던 봄이의 입이 꽉 닫혀버렸다. 상훈은 점점 봄이에게서 멀어졌지만 봄이는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도 답답하지 않았다. 울적하지도 않았다. 아까 전에는 움직이지 않던 자신의 두 다리가 이번에는 깃털이라도 된 듯 쉽게 움직였다. 다 죽어가던 그녀의 얼굴에 밝은 생기가 돌았다.
봄이는 재빨리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어가는 남자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