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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16화
작성일 : 19-10-26 20:29     조회 : 13     추천 : 0     분량 : 7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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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풍경은 봄이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는 완전히 상반되어서 비춰지고 있었다. 봄이는 큰 털이 듬성듬성 난 거대한 손에 의해 멱살이 잡혀 들어올려졌다. 그녀와 면식이 있는 뚱보였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패거리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뒤에 더 있었다. 어찌나 세게 들어올렸는지 외투와 셔츠가 밀려 올라가 하복부가 훤히 드러날 정도였다. 봄이는 뚱보의 엄청난 힘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억센 손을 붙잡은 채 한 쪽 눈을 감고 낑낑대는 봄이를 노려보며 남자가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얘기? 얘기 좋지.”

 

  남자가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도 봄이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더욱 강렬하게 남자의 미간을 쏘아보며 이를 악물었다. 떠들썩하던 천막들이 순식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공터의 한가운데서 소란이 일어나자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둘 주위를 빙 둘러쌌다.

 

  뚱보의 손을 붙잡은 봄이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뚱보 역시 봄이의 작은 멱살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양쪽 손아귀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뚱보가 자신의 손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봄이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분이 나빠서 말이야.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면 용서해주마.”

 

  “어, 그거 괜찮네.”

 

  봄이는 그 말을 듣는 척 하다가 번개처럼 뚱보의 손목을 비틀어 날카로운 이빨로 힘껏 깨물었다. 뚱보는 찢어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봄이의 외투자락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꽤나 높은 높이에서 곤두박질친 봄이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기도 전에 매서운 발길질이 봄이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머릿속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다.

 

  온 몸의 장기가 뒤틀리며 진동하는 느낌과 함께 봄이는 콘크리트 담벽으로 날아가듯 튕겨져 나갔다. 견고한 콘크리트에 등을 거세게 부딪치고 주저앉은 봄이는 몇 초 동안이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기침과 메스꺼움이 동시에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두 눈조차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팔뚝에서 흐르는 피를 다른 손으로 움켜쥔 뚱보가 천천히 정신을 잃기 직전의 봄이에게로 걸어왔다.

 

  봄이는 싸움을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또래의 학생들 중에서는 아마도 남녀를 불문하고 외부와 가장 많이 마찰을 일으켰던 학생이었을 것이다. 학교를 다닐 시절에도 봄이는 호전적인 성격 때문에 주위와 마찰이 잦았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격투상황에서 체급의 차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봄이는 이 거구의 뚱보 앞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필연적인 사실이었다. 주저앉은 봄이는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일어서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봄이는 운명의 장난에 어울려주듯 씁쓸한 표정으로 입 안에 남은 뚱보의 살점과 피를 침과 함께 뱉어냈다.

 

  뚱보가 다가와서 봄이의 옆구리를 한번 더 걷어찼다. 봄이는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받고 옆구리를 감싸쥐었다. 욕을 해주려고 연 입에서는 차마 참지 못한 신음소리만이 새어나왔다. 미처 회복할 틈도 없이 뚱보의 거친 두 손바닥이 봄이의 목을 제대로 움켜쥐었다. 봄이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점점 숨통을 옥죄는 눈앞의 뚱보를 쳐다보는 것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너 같은 꼬맹이들을 죽이는 데 편한 게 뭔지 알아? 힘이 별로 안 든다는 거야.”

 

  봄이의 눈앞이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이제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자신을 서서히 덮어오는 운명에 봄이는 몸을 맡겼다. 설사 그것이 비극적인 운명이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봄이는 정신이 희미해지자 단 일순간 자신이 섣부른 판단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했다. 단 일순간뿐이었지만.

 

  눈앞에 닥친 운명을 마주보기 싫어서일까? 봄이는 아직 감기지 않은 눈으로 시선을 힘겹게 오른쪽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자신들을 빙 둘러싼 채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군중들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봄이와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시선을 피해 버렸다. 차마 닿을 수 없는 거리인 건 알고 있었지만, 봄이는 그들에게로 한쪽 손을 뻗어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불난 집에 남은 마지막 불씨가 꺼지는 걸 지켜보는 구경꾼처럼 아무도 봄이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누구도 봄이가 내민 간절한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자기들끼리 수군대며 봄이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봄이는 지금 당장이라도 박차고 일어나 저 멀리 떨어져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한심한 구경꾼들을 때려 죽이고 싶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을 본 체 만 체 하는 군중들도, 자신의 작은 목을 체중을 실어 힘껏 누르고 있는 뚱보도, 자신을 더 말리지 않은 상훈도, 자신을 끝없이 반복되는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세상도, 경솔해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늪에 발을 헛디디고 만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더 이상 견디기는 버거웠다. 봄이가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어디선가 거센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 봄이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자신의 숨통을 힘껏 조이고 있던 뚱보의 악력이 약해지자 그제서야 봄이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뚱보의 거대한 상반신이 봄이에게로 쏠렸다. 체중으로 누르고는 있었지만 그 압력은 누군가를 죽이려고 할 때 생기는 순수한 살의에서 빚어진 힘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뚱보의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 앞으로 쓰러질 때 생기는 단순한 체중의 무게였다.

 

  봄이의 기도와 폐가 제기능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한꺼번에 몰아치는 산소의 기압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기침을 해 댔다. 목을 졸리는 느낌도 고통스러웠지만 조여진 숨통이 트인 순간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뼛속까지 스며들어 몸서리쳐지는 죽음의 중압감에 밀려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분 동안이나 기침을 하고 난 다음에야 봄이는 자신에게 내리쬐는 태양빛의 역광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남성의 실루엣을 올려다보았다.

 

  손에 각목을 든 남성은 익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봄이는 그 말을 듣고 서둘러 뚱보가 쓰러져 기울어진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뚱보의 뒤통수에 난 머리카락이 피에 젖어 짙은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정수리에서부터 검은 빛을 띤 붉은 선혈이 그의 죽음을 증명하듯 흘러나와 하얀 눈바닥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봄이는 이 광경을 보고 자신의 깊은 곳을 잠식하고 있던, 또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질했다. 눈앞의 남자는 각목을 던져 버리고 주저앉아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봄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어나, 떠나야 해. 경찰이 곧 눈치챌 거야.”

 

  “떠나다니, 어디로요?”

 

  눈앞의 남자는 봄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팔을 잡고 일어날 수 있게끔 부축해주었다. 상황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다급하게 떠나려는 남자의 입가에 남아있던 담배 연기로 인해 봄이는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상훈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뚱보의 패거리는 그가 쓰러지자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을 내보인 채 얼떨결에 봄이와 상훈에게 길을 터주었다. 군중들도 상훈이 앞장서서 달리자 모세가 열었던 강물처럼 순식간에 갈라졌다. 자신의 팔을 잡고 달리는 상훈에게 봄이가 소리치듯 물었다.

 

  “잠깐, 내 가족들은요?”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그들은 신속하게 뛰어 검문소를 지나쳤다. 통제소 입구를 지키던 경찰이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다급하게 달려 나가는 이들을 보고 소리쳤다.

 

  “어디 가십니까?”

 

  한참을 뒤도 안 돌아보고 뛰던 상훈이 멈추어 섰다. 가까스로 상훈을 따라잡은 봄이도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 자리에서 숨을 고르다가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다름아닌 상훈이었다.

 

  “대체 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자꾸 여기저기서 널 죽이려고 드는 거야?”

 

  “아저씨도......... 방금 전에 사람을 죽인 거예요?”

 

  상훈이 숨을 몰아쉬다가 방금 전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하는 봄이의 깊은 한 마디에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번이 처음은 아니야.”

 

  봄이는 그렇게 말하는 상훈의 한 마디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렇지만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서 살인의 정당성에 대해 꼬투리를 잡는다면 이어질 뻔한 설교가 눈에 선했다.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살인이라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시킬 뻔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합리화를 하려고 들었단 사실이 역겹지만은 않았다. 봄이는 이 사실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멍청하게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봄이는 상훈의 근심어린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피로가 몰려왔다. 가까스로 찾은 통제소에서는 몸과 마음만 상했을 뿐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떨궜다. 봄이는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운동화와 헤진 스타킹이 보였다. 봄이는 현재 그녀가 직접 볼 수 있는 수준에서의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결국엔 이렇게 되는군. 너 뿐만 아니라 나도 쫓기는 신세가 되겠어. 목격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더럽게 많았으니까 말이야.”

 

  이어지던 정적을 깬 상훈의 말을 듣고도 봄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피곤해지겠어. 네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러서 그 뚱보가 널 죽이려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딱히 알려달라고 캐묻지도 않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런 태도 유지하면 목숨 보전하기 힘들어.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어쩔 뻔했어? 그 뚱보가 널 정말로 죽여버렸으면 어쩔 작정이었냐고.”

 

  봄이는 웬만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말하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봄이는 피 섞인 침을 땅바닥에 퉤 뱉었다.

 

  “죽여버렸으면 죽는 거죠, 뭐.”

 

  “너.........”

 

  “저기요, 제가 지구대에서 개같이 행동했다는 건 알겠는데요, 그 사람이 먼저 시작한 일이에요. 저는 죽기 직전까지 갔었다고요. 좀 밀쳤다고 사람을 그렇게 죽이려 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요?”

 

  “다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그러니까 왜 섣불리 나서고 그래? 세상이 이렇게 된 시점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당장 칼에 찔려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어. 치안이 유지되던 예전 세계에서는 범죄가 없었는 줄 알아?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은행 파산으로 인해서 그들이 믿던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그 여파로 가정은 피폐해지고 마비되어 버렸어.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살아보겠다고 정부 관리하에 있는 통제소에서 간간이 생계유지하는 사람들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어?”

 

  “그래요, 그렇네요. 그냥 이 멍청한 꼬맹이가 죽게 내버려뒀으면 거기서 꽁무니 빼고 달아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참 유감이네요. 나 때문에 쉴 곳도 없어지고 경찰한테 쫓기게 된 기분이 어때요?”

 

  봄이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신경질을 냈다. 상훈은 그런 봄이를 질렸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난 네 말대로 사람을 죽인 적도 있고, 시체도 수도 없이 봤어. 난 이런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널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어.”

 

  “이제 도와주지 않을 거라면서요!”

 

  순간적인 감정에 이성을 잃었던 봄이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하지만 막상 내뱉고 나자 아차했다. 생명의 은인에게 해야 할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상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황한 봄이는 재빨리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으려 했다.

 

  “저, 미안해요. 제가.........”

 

  “솔직히 꼬마에게 보답 따위는 바라지도 않지만, 넌 정신머리부터 고쳐야 할 것 같구나. 그런 상태로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야.”

 

  봄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네가 그리도 바란다면....... 더 이상 내가 도울 건 없을 것 같구나. 이제 서로 갈 길 가자.”

 

  감정에 휩쓸려 아무렇게나 마구 짜증을 발산한 봄이였지만 상훈의 결단은 결코 그녀에게 반갑지 않았다. 상훈은 말을 마치고도 한동안 봄이를 바라보다, 등을 돌려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봄이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내뱉었지만 어째서인지 마음 한 구석이 솜에 꽉 막힌 듯이 답답했다. 분명히 봄이는 마치 학교 선생님처럼 자신을 상대로 끝없이 설교나 해대서 듣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상훈을 비꼬려고 자신이 심술을 부렸다는 건 인정했다. 사소한 부주의에서 시작된 말다툼이 점차 불씨가 커지듯이 번져나갔고, 그 커져버린 불씨는 봄이에게서 상훈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이제 어쩔 것인가? 이미 물은 엎질러져 버렸다. 어차피 별로 마음에 안 들었는데, 갈 테면 가 버리라지!

 

  상훈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봄이는 그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걸음 내딛으려던 발자국은 조금도 불어오지 않는 눈보라에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 봄이 자신도 자신의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봄이 자신도 자기가 왜 망설이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돌아보지 못했던 상훈과의 첫 대면의 때가 눈앞에 떠올랐다. 암시장에서 자신을 붙잡은 빵 장사꾼에게 담뱃갑을 내밀었을 때도 떠올랐다.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눈앞에서 역광을 받아 장대하게 비춰진 그의 어깨도 떠올랐다.

 

  해가 지기 전에 움직여야만 했다. 봄이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녹다 만 질퍽한 눈밭에 고정이라도 된 듯 단단히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 그에게 미련이 남은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봄이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봄이는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의식 속에서는 자신을 몇 번이나 구해준 그 고마운 남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 가로막은 것도, 누군가가 그러지 말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저 봄이 스스로가 감정을 드러내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봄이는 낯선 사람의 호의 같은 건 절대로 받지 않겠다고, 설사 남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무엇이든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때, 보답 같은 걸 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봄이가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명확했다. 그녀가 인연으로서 이어진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도 그녀의 삐뚤어진 성격에 일조했을 것이다. 봄이의 무의식 속 떠나간 상훈에 대한 그리움은 점차 불안감으로 바뀌어갔다.

  봄이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봄이의 보폭이 점점 빨라지고 넓어졌다. 발걸음은 끝없는 심연 속에서 빠져나오기라도 하듯 점점 그녀를 재촉했다. 봄이는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리는 방향은 결코 상훈이 사라진 방향의 반대쪽이 아니었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봄이의 뺨에 굵은 눈송이가 스쳐 시려왔다. 매서운 칼바람을 그대로 가로지르며 받아낸 귓가가 빨갛게 물들었다. 눈썹에 눈이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거친 호흡으로 인해 생겨난 입김이 그녀의 눈앞을 가렸다.

 

  쉬지 않고 달려온 결과 점차 봄이의 눈앞에 희미한 남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봄이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천천히 걸어가던 남성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남성은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봄이의 몰골을 한 번 훑어보고는 전과 다른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놓고 간 물건이 있었던가?”

 

  봄이는 차마 그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까칠하게 대했던 태도가, 커다란 대형 스크린처럼 눈앞에 떠오르는 상훈에게 진 빚 앞에 산산이 짓밟히는 것을 느꼈다. 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어깨를 떨며 남자의 앞에 멈추어 서서, 지금까지 그녀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는 한 마디를 꺼냈다.

 

  “가지 말아요.”

 

 
작가의 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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