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지갑 도둑 (상)
다음 날 아침, 제로는 일찌감치 일어나 롱기누스 저택을 빠져나온다.
그는 떠나면서 어제 문을 열어줬던 메이드에게 자기 대신 부모님께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한시라도 빨리 이 답답한 저택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친가를 나온 제로는 곧바로 브라우니 타운 남쪽 항구로 향한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겨온다. 그와 동시에 수평선 너머까지 주욱 펼쳐진 장대한 푸른 바다의 모습도 들어오는데.
"후아, 좋다!"
제로는 숨을 크게 들였다 내쉬며 가슴 속에 묵은 공기를 신선한 바닷바람으로 환기한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제로는 매표소에서 동부로 가는 배편을 알아본다.
"동부로 가는 배편이요?"
매표소 여자 점원이 잘생긴 제로의 얼굴을 흘깃흘깃 훔쳐보며 되묻는다.
제로가 대답한다.
"네. 제일 빠른 거로 알아봐 주세요."
"잠시만요..."
여점원이 오늘의 출항일지를 뒤적이더니, 잠시 후 말을 잇는다.
"세인트 폴 조지호가 오전 9시에 출항 예정이네요. 동부까지 가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3박 4일 정도니까, 10월 30일쯤 도착할 겁니다."
"그렇군요. 세인트 폴 조지호 탑승권 하나 주세요."
표를 산 제로는 출항 1시간 전에 'St. Paul. George'호에 올라탄다.
세인트 폴 조지호는 굉장히 큰 호화 여객선이었다.
온갖 상류층 사람들이 차려입고 나와 갑판을 차지하고 있었다.
꼭 영화 타이타닉을 보는 느낌.
갑판을 조금 둘러보다가 제로는 자기 선실을 찾아 배 안으로 들어간다.
'편안한 여행이 되겠어.'
이렇게 생각하며 배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제로.
그런데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문 반대편에서 무언가 조그만 것이 튀어나와 제로의 배를 들이받는다.
"아얏! 뭐야?!"
배를 움켜쥐고 뒤로 물러서는 제로.
그의 눈에 낡은 갈색 모자를 뒤집어쓴 남자애의 모습이 보인다.
"이봐! 앞을 똑바로 보고 다녀야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로가 호통을 치자 소년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한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다시 쏜살같이 달려가 버린다.
"쳇... 뭐 하는 녀석이람?"
툴툴거리며 옷을 털어내는 제로.
그런데 뭔가 느낌이 싸하다.
"엉? 내 지갑... 지갑 어디 갔어?"
바지 주머니에 있던 지갑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화가 나서 갈색 모자 소년이 달려갔던 쪽을 돌아보며 외친다.
"짜식이 감히 내 지갑을!!"
"???"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제로를 쳐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로는 씩씩거리며 소매치기 소년의 행방을 찾는다.
압도적인 키에서 내려다보는 제로의 레이더망.
하지만 갈색 모자를 쓴 아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뚜 – 우 ->
잠시 후 배가 출항한다.
결국 제로는 지갑을 도둑맞은 채 어머니가 계신 동부를 향해 울적한 항해를 시작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구입한 1등 선실의 표는 손에 들고 있었다는 것 정도...
그는 지나가는 선원들에게 지갑을 훔쳐간 꼬마를 잡아달라고 인상착의를 열심히 설명하며 부탁했지만, 선원들은 귀찮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건성으로 "네~네~"거릴 뿐이다.
소득 없이 선실에 들어온 제로는 푹신한 침대에 드러눕는다.
새하얀 천장을 노려보며 그가 생각한다.
'반드시 그 꼬마 녀석을 잡고야 말겠어. 지갑 안엔 학생증과 돈, 현금 카드가 들어있단 말이야. 3박 4일 안에 반드시 녀석을 붙잡아서 내 지갑을 토해내게 만들겠다...
그런데 그 애가 아까 배에서 내렸으면 어쩌지? 우쒸! 짜증나게 이게 무슨 일이람?'
그는 짐을 풀고 일어나 선실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는 마치 동물원 술래잡기의 술래가 된 기린처럼 무시무시한 포스를 내뿜으며, 소매치기 갈색 모자 소년을 찾아 배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한다.
Savior. 2007년 10월 29일 (목)
세인트 폴 조지호가 출항한 지 이틀이 지났다.
제로는 아직도 소매치기 소년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그 갈색 모자가 언뜻 언뜻 눈에 띈 것도 같았지만, 그 자리에 가서 확인해보면 어디론가 사리지고 없었다.
결국 오늘도 제로는 소년을 잡지 못한 채 허기진 배를 이끌고 식당으로 향한다.
다행히 배표에는 식사비가 포함돼있었기에 제로는 돈이 없어도 굶지는 않았다.
식사를 받아들고 구석진 자리에 앉는 제로.
오늘의 저녁은 맛있는 포크 커틀렛이다.
하지만 제로의 식욕은 제로에 가까웠기에, 참새가 모이 쪼듯 깨작대며 돈까스 부스러기만 잘라먹을 뿐이었다.
"오호호호호~ 제 쓰리 사이즈는 34-27-35랍니다!"
옆 테이블에서 웬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 하나가 야시시한 분홍 드레스를 입은 채 남정네들을 홀려놓고 있었다.
평소 같았음 제로도 같이 홀렸을 상황.
그러나 지금의 제로는 무작정 여자한테 헤벌레거리는 멍청이가 아녔다.
청합제 이후 왠지 쿨하고 도도해진 데다가, 머릿속엔 온통 지갑을 훔쳐간 도둑 꼬마를 잡는 생각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툭>
"꺄악!"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옆 테이블에서 익숙한 레퍼토리의 소동이 들려온다.
제로가 번개같이 빨리 고개를 돌려 옆 테이블을 바라본다.
작은 웨이터 소년이 분홍 드레스의 귀부인과 부딪혔는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다.
제로는 웨이터 소년의 손이 스르르 자기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며 무언가를 챙겨 넣는 걸 확인한다.
"됐어요. 앞으로 조심해요."
귀부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웨이터 소년은 얼른 어디론가 달려가 버린다.
'저 녀석이다!'
제로가 눈빛을 번뜩이며 그 뒤를 쫓는다.
"꺄악! 내, 내 다이아 반지가~!"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귀부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이젠 확실해졌다.
저 웨이터 소년은 이틀 전 제로의 지갑을 훔쳐간 갈색 모자 소년과 동일인물인 것이다.
제로의 발걸음이 한층 더 빨라진다.
식당 밖으로 달려나간 소년은 기다란 복도를 지나 어느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몰래 소년을 뒤쫓던 제로도 슬며시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간다.
이곳은 물류 창고인지 커다란 상자들이 블록놀이처럼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그 녀석 어디로 간 거지?'
제로가 발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창고 안을 살피고 있는데, 저쪽 깊숙한 곳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로는 살금살금 다가가 귀를 기울인다.
하프 엘프의 뛰어난 청력 덕분에 저들의 대화를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