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우, 박하! 그렇게 입만 다물고 있다고 능사가 아니네.”
염라대왕의 거듭된 채근에 박하사차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얼굴엔 깊은 슬픔이 스며있었다.
“어쩌겠나. 내 영혼이 소멸하더라도 전진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끙!”
염라대왕은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오는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한번 물었다.
“박하, 꼭 그래야만 하겠나?”
박하차사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결연한 표정으로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란 걸, 자네도 알지 않는가?”
“아, 모르겠네. 어쩌다 내가 염라가 되어서,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던 차사 때가 좋았네.”
“……. 미안하네.”
박하차사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자리에서 내려와 박하차사의 손을 잡았다.
“이보게 박하, 부탁하네. 더 이상 나 몰래 일을 꾸미질 말게. 더 이상 용납할 수만은 없네. 하늘의 이치가 있다는 걸 자네도 알지 않는가?”
“하지만 난…….”
박하차사는 무언가 항변하려다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박하차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래도 할 테지. 내가 아무리 경고하고 말려도. 자네라면.”
“……. 아마도.”
박하차사의 굳건한 의지를 확인한 염라대왕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염라대왕은 손을 거둬드리고는 일어나 돌아서며 말했다.
“아마, 그 일이 아니었으면, 내가 아닌 자네가 염라 자리에 올랐겠지.”
“…….”
“그럼, 일이 더 쉬웠을 텐데. 안 그런가?”
“……. 아닐세. 자네가 돼서 다행이었네. 난 그럴 자격이 없네. 자격이…….”
둘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내 박하차사는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랬을까? 난 자네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네. 염라 자리에 오르게 되면 사익을 챙길 수 없었기에.”
“……. 자네 말도 맞네.”
박하차사는 염라대왕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럴 테지. 이보게, 박하! 그러니 더 이상 주정뱅이 연기는 하지 말게. 나 하나 속이자고 그럴 것 없네.”
염라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박하차사는 흠칫 놀랐다.
“난 그냥 예전의 자네로 돌아갔으면 좋겠네.”
“…….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잖는가?”
박하차사는 염라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번 박하차사의 마음을 확인한 염라대왕은 쓴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에고, 어쩌나. 자네가 이렇게 나오니. 이보게, 박하,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 몰래 뒤에서 하려 하지 말고, 이젠 내 눈앞에서 일을 진행해 보게.”
박하차사의 눈이 기쁨에 가득 차 둥그레졌다.
“염라! 그게 정말인가?!”
얼른 일어나 염라대왕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염라대왕은 거부한다는 듯 손을 뺐다.
“어허! 이런 모양새 좋지 않네. 훗날 대가를 치를 때 불편하네.”
“…….”
기뻐하던 박하차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알잖는가.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내가 아무리 자네를 좋아한다 해도, 예외는 없네.”
“그렇겠지. 이해하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오갔다.
“아무튼, 날 이해해 줘서 고맙네. 훗날, 결코 원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네. 자넨 정말 좋은 염라대왕이야.”
박하차사는 진심을 다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
염라대왕은 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피곤하네. 쉬고 싶네.”
박하차사는 다른 때와 다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정식으로 예를 취했다.
“염라대왕님! 차사 박하! 물러가옵니다. 편히 쉬소서!”
박하차사가 물러가자 염라대왕은 낮게 중얼거렸다.
“어이하면 좋을꼬? 내 손으로 자네 영혼을 소멸시키게 될 줄이야…….”
*****
염라궁을 나온 박하차사는 낮은 휘파람을 불었다. 기분이 좋은지 얼굴엔 미소가 일고 있었다.
“박하차사님!”
대기하고 있던 계하차사가 박하차사를 발견하곤 뛰어왔다.
“괜찮으세요? 다행히 멀쩡하시네요?”
“어허, 이놈 말하는 꼴 봐라. 내가 어디 반병신이라도 돼야 했냐?”
“아니, 그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러죠.”
박하차사는 허세를 떨었다.
“아우, 진짜! 염라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하우 같은 놈은 한주먹감인데.”
계하차사는 어이가 없는지 비꼬았다.
“그래서, 흑 마법까지 쓰려 하셨어요?”
“떽! 싸움을 결정짓는 건 기세다. 겁만 좀 주려 했을 뿐이다.”
계하차사는 콧방귀를 뀌었다.
“눼, 눼! 그나저나 염라대왕님께선 뭐라고 하셔요? 징계하신대요?”
“왜? 징계 당할까 봐 쫄리냐?”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아웃! 너 탈락이래.”
“…….”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계하차사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자 박하차사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허허 녀석, 탈락은 탈락인데…….”
“?”
박하차사가 말꼬리를 흐리자 계하차사는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아이고 어쩌느냐? 너… 징계에서 탈락인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배시시 웃는 박하차사의 모습에 계하차사는 진의를 확인하려 했다.
“아이고 이놈,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들어. 허락했다고. 이제 더 이상 하우 눈치 안 봐도 된다고.”
“정말요?”
계하차사는 뛸 듯이 기뻤다. 박하차사에게 바짝 다가가며 재차 물었다.
“그럼, 은채님을 바로 데려와도 되는 건가요?”
박하차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안 된다. 다 때가 있느니라.”
“예…….”
“어쨌든, 은챈가 뭔가 하는 아이가 다시 중천으로 돌아오게 되면 난 이놈의 차사직도 때려치우련다.”
자초지종을 알 리 없는 계하차사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꼭 그러세요.”
“이놈이!”
“아무튼, 고마워요. 전 정말 멋진 차사가 되고 싶어요. 정말 신나요!”
계하차사는 차사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고 있었다. 모든 일을 마무리 짓게 되면 박하차사의 영혼이 소멸되는 줄 꿈에도 모른 채.
*****
한편, 보검선비와 돌석이를 비롯한 우리 일행은 어둠이 내린 후에야 산채로 접어들 수 있었다.
“어서들 오거라!”
이미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우리를 반겼다. 산채는 천연요새였다.
들어오는 입구를 제외하면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그렇다고 좁은 면적은 아니었다. 농사를 지으면 제법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홍 만석이라고 합니다.”
풍채 좋은 남자가 우릴 향해 인사를 했다. 산적 무리 두목으로 보였다. 스승님은 이미 그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를 소개했다.
“이분은 홍길동 의적의 살아남은 유일한 핏줄일세.”
“헤헤, 저희 고조부는 세상을 바꾸려 했다는데, 이 못난 후손은 이렇게 산속에서 숨어 살고 있습니다. 오시느라 다들 고생하셨을 텐데, 식사 준비됐으니 함께 하시죠.”
홍 만석은 우릴 식사 자리로 안내했다. 연대감 일행은 벌써 배를 채웠는지, 행복한 얼굴로 우릴 보며 말했다.
“어서 먹어, 어서! 산채 음식도 제법 맛나다.”
꼬르륵!
음식을 보자 배가 고파왔다. 나는 허겁지겁 달려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거친 산채 음식들이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먹고 있는데, 깨작거리고 있는 보검선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나와 눈을 마주쳤다.
“…….”
나는 그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
그러자 보검선비는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는 자리를 떴다.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돌석이를 쳐다봤다.
“다녀와.”
돌석이는 쿨하게 말하고는 음식 먹는 것에 열중하는 척했다.
“금방 다녀올게.”
나는 일어나 보검선비를 따라나섰다. 보검선비는 바위 턱에 앉아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더 드시지 않고요?”
“……. 입맛이 없구나.”
“…….”
나는 옆으로 가 앉았다.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하구나. 널 지키지 못해서.”
“이미 지나간 일인걸요.”
“그런데……. 난 아니구나. 널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마음이 아프구나. 돌석이는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널 지키려 했는데.”
보검선비는 고개를 숙였다. 돌석이가 신경 쓰이는 게 분명했다. 하긴, 나의 태도 또한 그랬으니…….
하지만 난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돌석이의 죽음을 겪으면서 각성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나약한 여고생 고 은채가 아니었다. 그래서 보검선비를 향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선비님,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 없어요. 제 목숨은 이제, 선비님도, 돌석이도, 그 누구도 아닌 제가 지킬 것이니까요.”
“!”
보검선비는 나의 패기 어린 말에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이 전쟁의 끝을 아는 사람은 저뿐이에요. 이 전쟁! 제가 끝내요.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 모두 지킬 거예요. 그때까지 서로의 감정은 잠시 묻어두어요. 그렇게 하기로 해요.”
“…….”
전쟁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 난, 보검선비와 돌석이 사이에서 애매했다. 누구 한 명에게 마음을 쏟기엔 스스로 불편했다.
“아무튼, 전 변할 거예요. 더 이상 나약한 고 은채, 아니, 개똥이는 없어요. 이 전쟁이 끝나면 그때는…….”
더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7년이란 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을지, 두려움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 난 변하고 있었다. 누군가에 의지하는 삶이 아닌, 내 의지대로 행동하는 걸크러쉬 진정한 힙합 걸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
변하고 있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개똥이 또한 변하고 있었다.
일진들의 납치를 겪고 난 개똥이는 결코 이곳이 아름답기만 한 세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일진들과의 일화는 한때 뉴스에 크게 이슈 되었지만 그뿐이었다. 권력 있는 집안과 어린 나이의 초범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이건 말이 안 돼. 내가 살던 시대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물볼기라도 쳐야지!”
개똥이는 분노했다. 하지만 어쩌랴. 한갓 여고생 신분에다 세상에 적응하기도 벅찼다. 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분노는 계속 쌓여만 갔다. 학교에 가면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가해를 했던 그들과 함께 두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꿈꾸었던 완벽한 세상, 하지만 그 안은 자신이 살던 양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 분노했다. 가진 자는 여전히 그 권력을 누리며 제 맘대로 살고, 가지지 못한 자들 또한 여전히 노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세상을 향해 개똥이는 목 놓아 외치고 싶었다.
“이 거지 같은 세상! 이제 변할 때도 됐잖아~!”
허공에 대고 외쳐도 보았지만, 그럼에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띵동!”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
메일을 확인했다.
Show Me The Money! 측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은채가 죽기 전 신청했었던 거였다.
“어머니 이게 뭔가요?”
“응? 뭔데?”
순덕이는 초대장을 살폈다. 바뀌기 전 자신의 딸 은채가 생각났는지, 어느새 순덕이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건……. 젊은 사람들이 세상에 대고 불합리한 것을 외치는 프로야. 예전 네가 힙합을 좋아했어.”
“힙합?”
“그래, 이젠 그렇지 않으니, 무시해도 돼. 삭제할게.”
개똥이는 메일을 삭제하려는 순덕이의 손을 막았다.
“아니오! 지우지 마세요. 저 이거 참가할래요.”
“뭐?”
“세상에 대고 말할 게 있어요. 꼭 참가할 거예요.”
메일을 살피는 개똥이의 얼굴엔 굳은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참가 신청 OK 버튼을 눌렀다.
- 1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