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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9년 헌종 친정 8년
어두운 밤 강녕전의 궁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연신 탕약을 데려오느라 소란스럽게 뛰어다니는 궁녀들에게 상선 설인관이 소리친다.
“탕약만으로는 안 될 것 같다. 어서 어의영감을 모셔 오거라!”
“네 상선.”
인관의 불호령의 궁녀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진다.
“잠깐!”
인관이 뛰어가는 궁녀를 불러 세웠다.
“네?”
“대비전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네 상선.”
궁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발걸음 소리를 낮추며 뛰어간다.
궁녀들이 사라지고 인관이 방 안을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그 안에는 헌종 환이 식은땀을 흘리며 눈도 뜨지 못한 체 누워있다.
각혈을 하여 기력이 전부 빠진 탓이다. 이번 달 들어 벌써 세 번째다.
헌종 환이 저리 자리 보존하고 누운 것이 말이다.
처음에는 가벼운 고뿔, 배앓이 정도라 했는데 점점 그 증세가 심해지더니 발병하는 시기도 짧아지고 있다.
심지어 요즘엔 각혈까지 하고 있다. 저렇게 환이 일어나지 못할 때마다 인관은 어떻게 해서든 대비전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만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혹 환에게 조금의 틈이라도 보인다면 분명 차기 보위에 대해 떠들어댈게 분명해서이다.
그리고 그땐 후사가 없는 환에게 대비전에서 어떤 칼날을 겨눌지 뻔히 보이는 인관이었다.
인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왕을 보좌하고 보호하려 하지만 저리 힘없이 누워있는 왕을 볼 때마다 동정과 원망을 느꼈다.
“이제 어쩌실 것입니까.. 의원이 지어준 약도 더 이상 듣지를 않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백성들이 원하는 세상을 전하께서도 원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며칠 전 그나마 기운을 차려 대비마마의 방에서 조정의 새로운 인사개편을 논하고 돌아온 뒤부터 헌종은 계속해서 매스꺼움과 복통을 호소했다.
>>>>>>>>>>>>>>>>>>>>>>>>>>>>>>>3일전>>>>>>>>>>>>>>>>>>>>>>>>>>>>>>>>
“마마 새로운 인사개편안 입니다.”
“네 주상”
헌종 환이 이제는 대왕대비가 된 순원왕후에게 개편 안을 건네려다 잠시 멈칫한다.
“왜요 주상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번 개편 안이 제가 할마마마께 보여드리는 마지막 문서가 될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주상?”
“그동안 소자가 미령하여 친정을 하면서도 할마마마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이제 소자를 믿고 편히 쉬시지요.”
“그러니까 주상의 말은 이 늙은이는 이만 뒷방으로 물러나라. 이거군요?”
“아닙니다. 마마. 제가 친정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8년이 지났습니다. 응당 정사의 일은 저에게 맡기시고 좋은 곳도 다니시며 편히 지내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순원은 코웃음을 쳤다.
“이리 할미를 생각해주시니 역시 주상뿐입니다. 그럼 마지막 문서를 보시지요. 할미가 문서를 읽을 동안 주상은 차나 한잔 드시고 계세요. 날이 추운데 몸을 좀 녹이세요.”
대비가 손을 내밀었다. 환이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문서를 건네준다.
문서를 건네받은 대비가 환에게 차를 마시라는 의미로 눈짓을 한다.
환은 잠시 머뭇거리나 이내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대비는 그런 환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고 건네받은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개편 안을 읽어 내려가는 대비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주상 이 문서를 제가 어찌 받아들여야 합니까?”
“보신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환이 차를 마시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정녕 이 할미의 팔다리를 끊어놓겠다 이거군요. 이것이 나를 뒷방으로 물러나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대비가 소리 질렀다. 늘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녀에게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환은 잠시 놀라는 듯 하였으나 이내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 인사개편에서 보신 것이 그게 전부입니까? 고작 마마의 친인척 김 씨 몇 명을 제외한 것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럼 무엇입니까. 어디 말씀해 보시지요.”
“거기 새롭게 등용된 자들은 근 3년간 과거에 장원을 한 수재들입니다. 허나 모두 김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조정에 발도 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외된 김씨 일가들은! 백성들에게 무리하게 세금을 거둬드리고.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아넘기던 자들입니다. 황구첨정부터 백골징포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젖도 떼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도 세금을 거둬드리고 이미 죽어 썩어문드러진 백골에게도 세금을 받는 게 지금 제가 아니 마마가 다스리고 있는 이 나라라고요 아시겠습니까! 어디 모른다 해보시지요!”
이번엔 환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환이 친정을 시작한 후 외척의 세력을 축소시키고자 하는 몇 번의 시도 때문에 대비와 종종 언쟁은 있었으나 이처럼 분노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다.
환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놀라 있는 대비를 향해 다시 차갑게 말하였다.
“그리고 한마디 더 드리겠습니다. 청연 조성현을 조정으로 불러드리고자 합니다.”
환의 입에서 청연의 이름이 나오자 대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건 절대로 아니 될 말씀입니다. 주상 그가 대역죄인 이광과 어떤 사이였는지 주상께서는 잊으셨단 말입니까?”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역모에 가담한 사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저희 할바마마 되시는 순조대왕께서 그를 얼마나 아끼셨는지는 할마마마가 더 잘 아실 것입니다. 허니 그를 조정에 불러들이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비가 흐트러지는 인상을 간신히 부여잡고 떨리는 입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제 할마마마가 저의 그늘로 들어오시라는 것입니다.”
“뭐요?”
“소자 어릴 적 제게 하신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할마마마의 그늘에서 힘을 키우라고 하셨지요? 네 이젠 할마마마께서 제 그늘에서 편히 쉬시길 바라는 마음이옵니다.”
대비가 코웃음을 친다.
“주상의 그늘이요?”
“네 마마. 허면 소자의 뜻을 전했으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주상의 그늘이 나를 쉬게 할 만큼 넓지도 견고하지도 못합니다. 주상은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쉬십시오.”
환이 화가 나서 소리치는 순원을 뒤로한 체 나와 버렸다.
대비의 방을 나와 강녕전으로 가는 환 역시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가 없었다.
‘할마마마의 욕심은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나를 끝까지 할마마마의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 생각이신거군. 하지만 난 절대 이렇게 당하지 않아.’
“윽-”
그때 환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인관이 달려온다.
“전하 또 배앓이를 하시는 겁니까?”
“아니다 괜찮아. 금방 괜찮아질 것이야. 소란피울 것 없다.”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소란 피울 것 없다니까 그러는구나. 잠시 쉬면 나을 것이야.”
“전하 혹.. 오늘도 대비마마가 건네는 차를 드셨사옵니까?”
“설 내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윽-”
“아. 아닙니다. 전하. 소인이 부축할 테니 어서 침전으로 가시지요.”
그 뒤 금방 괜찮아질 것이라는 말과는 달리 환은 며칠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