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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늦은밤. 마당에서 말소리가 들려 봉식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마당의 작은 평상에는 만석의 어머니 춘옥과 봉이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 “만석이 너는 저런 여우 같은 계집애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 쫓아다녀!”
라며 봉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춘옥이기에 봉이의 손까지 꼭 잡고 얘기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봉식이 눈을 비비며 봉이와 만석 엄마에게 갔다. 그러자 춘옥이 잘 왔다는 듯 봉식을 반겼다.
“아이고 봉식이 일어났구나. 잘 됐다. 이리 좀 앉아봐.”
“안녕하세요. 아줌마,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 있으세요?”
봉식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으응. 그게 너희한테 부탁할게 좀 있어서”
만석의 엄마가 어렵게 입을 뗀다.
“오라버니도 알지? 만석이 며칠 전에 깡패 놈들 만나서 큰일 날 뻔 한거!”
“알지. 그날 또 낙방했다고 술 진탕 먹고 집에 오다가 깡패들 만나서 돈도 다 뺏기고 눈 밤탱이가 돼서 온 날이잖아. 근데 그게 왜요?”
“그게 우리 만석이가 그 뒤로 좀 이상해”
춘옥이 걱정스레 말한다.
“만석이가 그 뒤로 새벽마다 어딜 기어나가서 다음날 새벽이나 되어야 들어온데!”
봉이가 춘옥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그 뿐이니.. 이상하게 그 뒤로 쌀, 보리 떡 이런 먹을 것들이 자꾸 없어져. 아무래도 만석이가 그 놈들한테 계속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
다시 춘옥이 말했다.
“네? 그게 무슨.. 만석 이한테 물어 보신 거예요?”
“내가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도 안하고 그냥 새벽에 들어와서 피곤하다고 드러누워 자버린다니까? 내가 어제 아침에는 그놈이 어디 가는지 알아내려고 뒤를 밟아봤어!”
“그래서? 어딜 가는지 알아냈어?”
봉이가 두 손으로 야무지게 주먹을 쥐며 물었다.
“아니.. 애가 빠르긴 또 얼마나 빠른지 마을 입구 지나자마자 사라져버렸어..”
“에이 뭐야.. 근데 우리보고 어쩌라고 그걸 우리한테 말해?”
봉이가 실망한 듯 말했다.
“니들은 만석이 친구 아냐. 엄마한테는 말 못해도 친구들한테는 얘기 할 수 도 있는 거고, 너희들은 나보다 빠르니까 만석이를 쫓아가도 더 잘 쫓을 거고.. 그니까 니들이 무슨 일인지 좀 알아봐줘 아줌마가 이렇게 부탁할게”
춘옥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석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춘옥에게는 오로지 만석뿐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던애가 요즘엔 책을 보는 꼴을 못 봤어. 내가 도저히 살 수 가없어서 이렇게 너희까지 찾아온 거야..부탁할게 응?”
춘옥이 봉이와 봉식의 손을 꼭 붙들며 말했다. 그녀의 눈엔 일렁일렁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줌마 왜 울고 그래 걱정하지 마 우리가 내일 아침에 만석이 뒤를 밟아서 누구한테 괴롭힘 당하고 있는 건지 꼭 알아낼게. 내가 그놈들 가만 안 둔다! 정말! 그치 오라버니?”
춘옥의 눈물에 놀란 봉이가 다부지게 말한다.
봉식도 얼떨결에 봉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네 아주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따로 물어볼게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리고 이거”
춘옥이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봉이 너 좋아하는 인절미 이거 먹고 꼭 우리 만석이 뭐하고 돌아다니는지 좀 알아봐줘”
인절미를 본 봉이의 입이 귀에 걸렸다.
“뭘 이런 걸 다 가져왔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있어. 나만 딱 믿어.”
봉이가 춘옥을 안심시켜 돌려보냈다.
춘옥이 가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 봉식을 봉이가 불러 세운다.
“오라버니 어디가!”
“응? 자야지. 밤이 깊었는데”
“안되지! 이렇게 인절미까지 얻어먹고! 만석이가 언제 나갈지 모르는데 골목에 숨어 있다가 따라가야 할 거 아냐”
“인절미는 봉이 너 혼자 먹고 있는데..?”
“내가 지금 인절미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 오라버니는 만석이 친구인데 걱정도 안 돼? 그 나쁜 놈들이 만석 이한테 나쁜 일이라도 시키면 어쩌려고! 그리고 방금 오라버니도 춘옥 아줌마 앞에서 알아봐 준다고 약속 했잖아.”
봉식이 한마디를 하자 열 마디도 더 하는 봉이었다.
봉식이 그런 봉이를 보며 졌다는 듯 웃어보였다.
“끝까지 그 인절미 나눠 준다는 얘기는 안하지?”
“아니.. 오빠 인절미 안 좋아하잖아.”
“빨리 가자! 만석이 잡아야지!”
봉식이 웃으며 봉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봉이도 웃으며 봉식을 따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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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 다리 저려. 오늘은 안 가는 거 아냐?”
봉식과 봉이가 만석의 집 앞 골목에 숨어 있다.
봉이는 잘 기다리는가 싶더니. 춘옥이 준 인절미가 다 떨어지자 툴툴거리기 시작한다.
“쉿! 이러다 들키면 지금까지 기다린 거 다 헛수고 되는 거야 졸리면 나한테 기대서 좀 자고 있어.”
봉식이 봉이를 달래며 말했다.
“하- 암 그럼 나 잠깐 눈만 감을 테니까 만석이 자식 나오면 말해줘. 아무튼 그 만석이가 문제라니까?”
봉식이 하품을 하며 봉식의 어깨에 기댄다.
얼마쯤 지났을까 잠든 봉이의 쌔근쌔근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주위를 살피며 밖으로 나오는 만석이 보였다.
뭘 그리 잔뜩 챙겼는지 만석의 옷 주머니가 불룩하다.
“봉이야. 일어나봐 만석이 나왔어.”
봉식이 작은 목소리로 봉이를 깨웠다. 봉이가 부스스 눈을 뜬다.
“으응? 이제 나왔어?”
“그래 지금부터 따라붙어야 하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봉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봉이와 봉식은 만석의 뒤를 밟았다. 근데 만석의 행동이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몇 발자국 걸을 때마다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 지나치게 경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팔을 좌우로 마구 휘두르며 걷고 있다.
“오라버니.. 만석이 미쳤나봐”
봉이가 걱정스레 말했다.
“쉿, 마을을 벗어난다.”
봉식이 봉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고 다시 만석을 따라붙는다.
마을을 벗어난 만석의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춘옥 아줌마가 놓칠 만도 하네.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는 거야.’
이윽고 만석은 거의 뛰다시피 해서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허름한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봉식이와 봉이는 이제 풀숲에 숨어 만석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만석은 그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주머니 가득 담아온 떡이랑 주먹밥을 마루에 꺼내놓는다.
그리고 능숙한 행동으로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마당을 다 쓴 후에는 걸린 빨래들을 걷어 가지런히 정리도 해놓는 것이 아닌가.
“오라버니! 그놈들이 만석이 잡아다가 일 부려먹나 봐. 어떻게 빨리 데리고 나오자.”
봉이가 깜짝 놀라 말했다. 봉식도 그런 만석의 모습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윽고 만석은 걸레를 가져다 마루를 닦아내고 다시 마당으로 나와 아까 걸으면서 췄던 춤을 추기 시작했다.
팔을 이리 저리 흔들며 만석은 거의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었다.
“오라버니.. 만석이 어떡해...”
봉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봉식도 이젠 만석이 과거에 떨어진 충격에 정신이 나간 게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때 방 안에서 웬 남자가 나왔다. 그 남자는 빠른 행동으로 마당에 있는 빗자루를 들어 만석에게 다가갔다.
만석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춤을 추고 있다. 그때 그 남자가 빗자루로 만석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저 새끼 미친 거 아냐?”
봉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만석에게로 뛰어갔다.
“봉이야 안 돼!”
봉식이 봉이를 말리려 뛰어갔다.
하지만 봉이는 이미 사내의 집까지 들어가 버렸다.
“야! 너 뭔데 만석이 머리를 때려!”
봉이를 쫓아 마당으로 들어온 봉식은 만석의 머리를 때린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봉식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