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하임은 스케치 중이었다. 글은 기대했던 만큼 놀라웠다. 기대했던 만큼...이라니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자꾸 궁금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그의 고운얼굴도 아니고, 눈 밑에 낯설을 만큼 자리잡은 짙은 그늘도 아니었다..
글이었다. 글은... 자꾸만 쓴 이를 절로 궁금하게 하는... 그런 글이었다.
가장 신기한건 이 글에는 배경도 등장 인물조차도 명확치 않은데도 어떤 이야기 인지 상상이 쉽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건 개인차가 있을수 있었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정한 무대에서, 자신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그런 글을 쓰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읽고 그리려니 비로소 이해가 닿았다..
좋은 드라마도 마찬가지라고 하임은 느꼈다. 극본이 탄탄하면은 배경이 탄탄해야 했다. 전혀 상황과 맞지 않는
혹은 어색하기 그지 없는 세트에서 연기를 하면 그 드라마 자체가 재미가 없어져 버렸다. 재료들을 적절하게 배합하는것
그것이 좋은 드라마,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레시피는 완벽했다. 이사람이 적은 레시피 대로
요리를 해 낼수 있는가- 그리고 그 요리가 맛있는가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메인 테마에 맞게 그리려고 노력했다.
이야기에 등장 하는 한 여자에 하임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요정처럼 묘사되는 작고 하얗고 , 또 마르고 , 손대면 꼭 팅커벨처럼
마법의 가루를 뿌릴것만 같은 여자.. 어떻게 이렇게 상큼한 등장 인물을 말도 안되게 무뚝뚝한 그 사람이 창조해 낸건지 믿기질 않았다.
이야긴 초반부였다. 왜 조금씩 주는지 안 물어도 알것 같았다. 10장도 자기가 5장에서 느낀 감정을 그리기엔 부족했다.
스케치는 러프 스케치라고 해서 채색 전에 느낌 정도만 보는 정도로 하려고 했는데 그리다 보니 욕심이 났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한장한장 채워 나가는게 아쉬울 정도였다.. 이렇게 몰두하고 그림을 그렸던게... 연필로 채워 나가서
명암이 극명해 질 수록 아쉬웠던게..... 이렇게 순수하게 그림 그리는것 자체가 행복했던게- 언제였더라.....
하임은 기지개를 쭉- 펴고 팔을 확인했다. 팔에는 흑연이 까맣게 묻어 있었다.. 미술을 처음 배우던 초반에나 있던 일이었다..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리 불공평한 계약이라도 요 몇년 사이에... 이토록 자기한테 생기를 불어 넣는 일이 있었던가...
최근? ... 아니면 이런 기분의 생기를 느낀 마지막은 ...... 그 순간 책장 안에 넣어놓은 , 책으로 살짝 가려둔 어떤것이 자기를 세게
잡아 당기는 것 같았다. 스노우 볼이었다.... 스노우 볼이 , 그럴리 없건만 나를 빤히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생기- 도하와 만난 처음.. 도하와 사귀었던 초반이었다.
순수하고 산뜻한 열정... 열정이라고 해서 다 뜨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뜨거워서 다 태워버리는 그런 열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 아름답고 빛나서.. 눈이 부신 그런 순간도.
열정일수 있었다... 하임은 얕은 숨을 쉬었다.. 아직도 그 기억은, 추억으로 들어서질 못했다.
잊고 살고 싶어서 지금은 그냥 그렇게 했다.
창 밖의 빛은 아름다웠다. 여름은 모든 식물을 살아 숨쉬게 하는 계절이었다.
모든것이 활짝 피고 모든것이 , 녹색으로 덮혀 싱그러웠다..
꽃을 그리려고 하던 찰나- 하임은 작약을 그릴까 조금은 망설였다. 그러다 코에 스치는 여름 향기에 왠지 작약보다
프리지어를 그리고 싶어졌다. 하임은 그림에 담기는 건 늘 그리는 이의 마음 감정 까지 포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릴때의 공기까지 포함 되는 거라고.. 하임은 첫 선생님에게서 그림은 그런거라고 , 배웠다.
마침 집 앞에는 예쁘고 포장을 깔끔하게 해주는 꽃 집이 있었다. 아까 조깅하다 발견한 곳이었다. 하임은 팔에 묻은 흑연을 씻어내고
물감이 군데 군데 묻었지만 아직도 너무나 몸에 편하게 스며드는, 린넨 셔츠를 걸쳤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어서 오세요-"
꽃집 안에 있는건 젊은 여성이었다. 인상이 조용했다. 꽃집 안은 화려하진 않지만 너무나 고즈넉하고 좋았다.
한눈에도 꽃이 싱싱한 것을 느낄수 있었다. 하임은 갖가지 꽃에 , 행복했다. 꽃은 어찌 이리도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지...
"저.. 프리지어를 좀 살까 하는데요-"
"아 그러세요? 선물용인가요?"
"아뇨- 꽃병에다 꽃을까 해서요-"
여자는 나를 보고 싱긋 웃더니 프리지어 한 아름을 꺼내서 깔끔히 손질을 했다 투명한 비닐로 싼 뒤에 하늘빛 리본까지도 묶어 준다
"아.. 리본은 괜찮은데요- 선물용이 아니라서.."
"아뇨- 지금 입은 옷이 하늘색이셔서- 제가 해 드리고 싶어서요-"
"... 아 고맙습니다"
싹싹하니 상냥하다- 프리지어의 향기가 짙게 풍겼다.
"여기 있습니다- 예뻐 해 주세요 많이-"
"네?"
하임이 조금은 놀란듯이 반문하자.. 여자는 살짝 웃으며 수줍은듯 덧붙여 말했다.
"꽃을요- 꽃도 예뻐해주면- 더 느리게 지고 더 오랫동안 향기를 내거든요-"
그러고는 여자는 해사하게 웃는다- 밝은 여자다-
"고맙습니다-"
"자주 오세요- 이건 처음 오셨으니까 제가 드릴께요-"
그러고는 분홍빛으로 만개한 장미 한 송이를 내민다 탐스럽게 맺힌 꽃봉오리가 아름답다-
"고맙습니다-"
여자의 미소를 뒤로 하고 나는 꽃 다발을 안은채 여름의 바람을 잠시 만끽했다. 그리고는 사탕을 여러개 사서 주머니에 넣고선
하나를 할짝할짝 핥으며 다시 빌라로 들어서는데... 어쩌다 보니 계단으로 온 탓일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미처 나를 발견 못한듯한
작약과 강비서를 보았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느라 내가 있는 줄도 모르는 듯 했다.
인사를 하려고 다가가다가....
그러고 난 그 자리에서 깜짝 놀래 굳고 말았다.
작약은... 목발을 짚고 집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리가 조금이 아니라 많이 불편해 보였다.
목발에 의지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몸이 목발에 아에 실려 있었다..
금방 다친 상처는 아닌듯 했다 , 깁스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아까 입은 옷 그대로였다. 말끔한 그대로 였다.
그럼 저 목발은.... 뭐지...?
맙소사.. 그런데 전엔 어떻게 그렇게 멀쩡히 걸은거지?? 다리가 아프다고?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강비서의 언질에 뭐 골다공증이 약간 있나 했었을 뿐이다...... 비오면 쑤시는 정도를 말하다니
이 사람도 참 걱정도 팔자셔 했었을 뿐이었는데....
그게 이걸 말한다는 사실은 몰랐다.....
나는 숨소리를 죽이고 코너를 돌았다.
작약의 뒤를 보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날 발견은 못한듯 했다. 나는 숨었다. 대체 왜 인진 모르지만.. 입을 살짝 막았다,
그때 지혁이 강비서를 보며 되 물었다-
"어디서.. 프리지어 향기 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