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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라니에스는 정말 라니에스인가
작가 : 사로야
작품등록일 : 2020.8.3

소설에서나 흔하게 겪는 일인 여자주인공한테 빙의를 했다.
원작 남자주인공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신이 사랑했던 여자주인공인 라니에스는 이제 없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9.
작성일 : 20-08-05 18:06     조회 : 24     추천 : 0     분량 : 4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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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오늘 아침은 이상하게 조용한 아침이었다. 잠을 푹 잔 건 아닌데 기분 나쁠 정도로 정신이 맑았다.

 마치 오늘 뭔가 일어날 거라고 이야기해 주는 듯 상쾌한 아침이라 일어나자마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날씨도 좋고, 몸은 상쾌하고 정신도 맑은데…. 왜 기분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에드워드 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 도대체 어떤 예의도 없는 사람이 연락도 없이 이런 이른 시간부터 와?”

 

 “그게…. 베르한 셰리카 님이십니다.”

 

 “왜 라니에스의 아버지가 이 시간에…….”

 

 불안함은 태풍이 되어 내 마음을 휘젓고 다녔다. 설마 라니에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 하고 급하게 세수만 하고 내려갔다

 어차피 그쪽도 예의 없이 먼저 쳐들어왔으니 이 정도 무례는 봐줄 거라는 계산이 없지 않았다.

 응접실로 내려가자 베르한 셰리카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인사도 없이 바로 본론부터 내놓았다.

 

 “내 딸 아이를 어디로 숨겼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모르는 척하지 마! 내 딸 아이가 사라졌어! 분명 여기로 숨은 거겠지!!”

 

 베르한의 말이 머리를 강하게 쳤다. 온 사방의 소리가 윙윙 울리는 것 같았다.

 라니에스가 사라졌다니? 어디로?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충격이 크면 말이 안 나온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라니에스의 아버지가 뭐라 소리쳐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이나 소리 지르던 베르한은 결국 제풀에 지쳐 응접실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자리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라니에스가….”

 

 그 여자가 사라졌다. 이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여자가. 라니에스의 몸을 한 여자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뭐가 그녀를 집에서 도망치게 만든 걸까. 아니, 애초부터 그녀는 도망치고 싶었던 거 아닐까?

 그 집에서, 라니에스만 보는 나에게서, 어쩌면…. 이 세계에서…….

 그런 그녀를 자신이 찾아도 되는 걸까? 도망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것도 자신에게 알려준 게 없는 그녀를 내가…….

 그런데도 지독할 정도로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내가 보고 싶은 건 라니에스일까, 아니면 그 안에 있는 그녀일까?

 모든 게 한곳에 뭉쳐 지독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이대로 쓰러져 잠만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치면 안 됐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온전히 눈을 떠 진실을 바로 보는 일이었다.

 그래야…. 도망친 그녀가 돌아왔을 때 볼 면목이 있지. 우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집사…. 라니에스 셰리카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든 찾아.”

 

 “…알겠습니다.”

 

 집사가 떠난 자리엔 냉기만 가득했다. 이 넓은 집이 오늘따라 유독 쓸쓸했다.

 오늘 아침의 불안함은 이 일을 알려주는 것이었을까. 나는 두통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내가 알고 있던 라니에스와 이 세상이 모두 어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불편한 잠자리 덕에 새벽 일찍 일어난 나는 샤가 해준 밥─이라기엔 묽은 수프였지만─을 먹고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산길은 험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도 아녔다.

 울퉁불퉁한 길을 걷다가 가끔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기도 했고, 높게 솟아난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멈추기보단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런 곳에서 사소한 이유로 좌절하거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악착같은 내 마음을 알았는지, 샤 역시 내가 다쳐도 아무 말 없이 그저 아까보다 더 세심하게 길을 정리하며 묵묵히 앞을 걸어 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꼬박 걸었는지 잘 모르겠다. 눈을 감으면 잤고, 눈을 뜨면 걸었다.

 마을이 이렇게 멀 줄은 몰랐기에 지나친 강행군에 가끔 자신의 방에 있던 푹신한 침대가 떠올랐으나 그뿐이었다.

 걷다가 지쳐 잠시 걸음을 멈춘 나를 보고 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시간만 더 걸으면 앞으로 지내실 마을이 보일 겁니다.”

 

 “…정말요?”

 

 “네. 그러니 조금만 더 힘내세요.”

 

 샤 나름의 응원인 걸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더 힘내기로 마음먹고 아픈 다리를 부여잡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샤의 말대로 한 시간쯤 걸어가니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 자체는 작았지만 멀리서 봐도 따뜻한 마을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분위기도 좋았다. 이런 마을에서 앞으로 살아가는구나…. 나는 한순간에 그 마을에 마음을 빼앗겼다.

 내가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을 때, 어쩐지 어두운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라니에스 님.”

 

 “네?”

 

 “…이 마을에서 살 때는 라니에스라는 이름으로 살지는 못 할겁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에요?”

 

 “라니에스 셰리카는 공작가의 영애로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영애가 이런 마을에 있다는 게 마을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소문은 금세 퍼질 겁니다.”

 

 “…….”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는 라니에스 셰리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습니다. 적당한 이름을 하나 생각해두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새 이름…….”

 

 어차피 라니에스의 이름으로 살고 싶지 않았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이름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오히려 새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라니에스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라니에스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샤는 모르겠지.

 자신의 짐작이 맞았는지 오히려 홀가분해 보이는 내 모습에 샤는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굳이 혼란을 더할 필요는 없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그리고 나는 새 이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생각하던 내 머릿속에 오래전 TV에서 해줬던 애니메이션 하나가 생각났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싸우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애니메이션인데 그때는 뭐가 그리 좋다고 꼬박꼬박 챙겨봤는지 모르겠다.

 그 애니메이션에서 유독 좋아했던 여자 캐릭터의 이름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릴리.”

 

 “네…?”

 

 “새 이름 말이에요. 릴리가 좋겠어요.”

 

 “릴리입니까. 좋은 이름입니다.”

 

 샤의 긍정적인 반응에 나는 더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선택한 내 이름과 나를 모르는 이 마을.

 이 마을에서라면 라니에스가 아닌 나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건 희망이나 염원 같은 게 아닌 기대였다. 이 마을이라면 진짜 나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나는 샤가 가자는 마을로 내려가자는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걷기보다는 뛰어가기 시작했다. 몇 개의 돌부리가 내 발에 걸려도, 몇 개의 나뭇가지가 스쳐 지나가며 내 팔목에 상처를 내도 상관없었다.

 드디어 온전히 내가 나로 숨 쉴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그것이 얼마나 반가운지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비록 진짜 내 이름으로 불리지는 못해도 라니에스로 불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드디어…!!’

 

 나를 구속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벗어 던진 기분이었다. 라니에스 영애의 사랑이라는 원작도, 에드워드라는 남자주인공도, 라니에스라는 여자주인공 역도 전부.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등 뒤에 날개라도 달린 듯 다리는 가뿐했고 숨도 차지 않았다.

 마을 초입까지 단숨에 내려온 나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보는 마을 사람들을 무시하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 내 모습이 무척 이상할 거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저 충만한 기쁨만이 내 가슴을 터질듯하게 가득 채우고 있어서 그 기쁨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내 뒤를 따라온 샤는 나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고는 다시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렇게 뛰시면 다치십니다. 마을에선 되도록 뛰지 마시고, 조심해서 제 뒤를 따라오세요. 지내실 숙소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

 

 앞으로 지낼 마을이라서 그런지 모든 게 다 그저 좋게만 보였다.

 기울어가는 지붕의 잡화점도, 조금 낡은 옷가게도, 약간 금이 간 벽이 보이는 숙소마저도.

 낡은 숙소 앞에 서서 샤는 이곳이 앞으로 자신이 지내게 될 숙소라고 이야기하며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겉보기에도 낡은 숙소는 내부도 역시나 낡았다.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냐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혼자 어떻게든 집에서 나왔다면 이런 숙소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헬리아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잘한 거라고 스스로 뿌듯해져서 자신을 칭찬하며 나는 내가 앞으로 지낼 방 안에 들어갔다.

 

 “조금 낡았지만 그래도 무리 없이 쓰실 수 있을 겁니다.”

 

 “혼자 지내기 딱 좋은걸요. 정말 고마워요, 나중에 헬리아나에게 따로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요.”

 

 “라니에스 님의 소식을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샤에게도 고마워요. 외출이라곤 집 앞밖에 해본 적 없는 아가씨를 모시고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한 박자 늦게 나온 대답에 그가 꽤 고생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어설픈 그의 대답에도 나는 그저 기쁘고 웃음이 나왔다. 새로운 생활이 목전 앞에 있어서일까? 모든 것이 그저 좋게만 느껴졌다.

 이 마을에서라면 자유롭게, 자신답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니에스의 탈을 벗고,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는 곳에 존재하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만해지고 자유로워지며, 그저 끝도 없이 기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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