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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더럽(The Love)
작가 : 지놓
작품등록일 : 2019.9.3


"나, 다른 사람 같이 좋아해도 돼?"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관계와 사랑
그것의 시작,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하여.

#대학생 #캠퍼스물 #악의꽃 #섹슈얼리티 #조별과제 #폴리아모리

 
2. 해는 때론 바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낼 때가 있다(2)
작성일 : 19-09-06 00:21     조회 : 39     추천 : 0     분량 : 7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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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날 저녁이었다.

 

  폰이 울려 확인해보니 해에게서 톡이 하나 와있었다. 급하게 술을 좀 마셔야 할 것 같으니 한시바삐 시간을 내라는 것이었다.

 

  하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중이라(초짜라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매니저가 그 주 내내 나를 불러들였다) 오늘은 좀 힘들겠다고 거절했으나 해는 막무가내였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고, 무조건 오늘 마셔야 한다면서 죽어라 톡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해가 내게 술을 마시자고 한 것도 처음인데다 이렇게 떼를 쓰는 것 역시 심상치 않아 보였기에, 나는 ‘마실 수 있긴 한데 대신 많이 늦을 것 같다’고 답장했다. 그러자 해는 상관없으니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즉시 연락하라고 했다.

 

  일을 다 끝내고 가게를 나올 쯤엔 새벽 두 시가 한참 지나있었다. 늦었다 싶어 얼른 해에게 전화해보니 이미 사거리 쪽 순댓국집안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순댓국?”

 

  “왜? 나 배고파서. 하여튼 빨리 뛰어와!”

 

  마침 가까운 곳이라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었다.

 

  가게 앞에 도착하자마자 유리문 너머로 우두커니 앉아있는 해가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미 몇 잔 기울인 듯 테이블 위에는 뚜껑이 따져 있는 소주병 하나가 깍두기 그릇 옆에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어? 빨리 왔네?”

 

  “왜 먼저 마시고 있어. 무슨 일인데?”

 

  “일단 앉아봐.”

 

  해의 맞은편 자리는 하필 에어컨 정면이었다. 평소 찬바람 쐬는 걸 즐기지 않던 나로선 꽤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리였다. 다행히 얇은 남방 하나를 챙겨왔기에 망정이지, 자칫 이 더운 여름날 추위에 벌벌 떨며 술을 마셔야할 뻔했다.

 

  나는 바람도 피할 겸 슬쩍 해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해는 내게 무엇을 먹을 건지 물어보더니 종업원을 불러 자기가 먹고 싶은 것 두 가지를 시켰다.

 

  “아르바이트는 잘했어?”

 

  “잘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그냥 하는 거지.”

 

  “야야.”

 

  “왜?”

 

  “궁금한 게 있는데…….”

 

  해가 뜸을 들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생소한 것이어서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남자들 말이야…….”

 

  “남자?”

 

  “그래 너 같은.

 

  “나 같은?”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야동 있잖아…….”

 

  “뭐?”

 

  “야동 말이야, 야동. 일주일에 어느 정도나 봐?”

 

  나는 해의 갑작스런 질문에 전에 없이 당황하고 말았다. 질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해의 취기 오른 얼굴과 번쩍이는 눈동자에서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뭐랄까…… 대단히 폭력적인 시선이었다.

 

  “뭐야 갑자기…… 그런 게 왜 궁금한 건데?”

 

  “그건 곧 말해줄 테니까 일단 너부터 얘기해봐. 대체 얼마나 보는 거야?”

 

  “……엄청 난감하면서도 쓸데없는 질문이네.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겠지. 매일 보는 사람도 있을 거고, 잘 안 보는 사람도 있을 거고. 아예 안보는 사람은 뭐…… 거의 없겠지만.”

 

  “넌 어떤데?”

 

  그렇게 말하는 해의 시선은 그야말로 집요한 것이었다. 마치 먹잇감을 포착한 뱀 같았다.

 

  “아니…… 진짜 이걸 왜 얘기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잘 안보는 편이야. 예전엔 진짜 1년 넘게 안본 적도 있어. 살짝 시기를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그래도 좀 보는 편…….”

 

  “요즘은 어떤데? 일주일에 몇 편? 아니면 몇 시간? 아니면…….”

 

  “아, 몰라. 됐어. 이런 거 물어보려고 술 마시자고 했어?”

 

  솔직히 부끄럽기도 하고, 또 당혹스럽기도 해서 어떻게든 대충 넘어가보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해는 내 거부표시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몇 살 때부터 보기 시작했어? 장르는?”

 

  “야야. 됐어. 그만해. 뭔데? 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

 

  그제야 나의 짜증을 알아차린 듯 해는 가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연신 힐끔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 여간해선 쉽게 그만둘 것 같지가 않았다. 그쯤 되니 해의 의도가 자못 궁금해지긴 했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그거 안 보면 혹시 죽을 것 같고 그래?”

 

  “……그 정돈 아니야. 꽤 아쉽긴 하겠지만.”

 

  그러자 해가 마땅찮다는 표정으로 나를 스윽 훑어보더니, 곧 홀로 처연한 얼굴이 되어 허공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나로선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단순히 장난스런 호기심에 시작한 질문인 줄 알았는데, 점차 심각해지는 얼굴을 보니 무슨 일이 있긴 있구나 싶었다.

 

  그즈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순대 모둠과 순대국밥이었다. 순대 모둠은 중앙에 두고 국밥은 해 쪽으로 넘겨주었다.

 

  “너 먹어. 너 먹으라고 시킨 거야.”

 

  해가 툭 내뱉듯 말하며 국밥을 내 쪽으로 밀었으나 내가 다시 돌려주었다.

 

  “나 배 안고파. 일하면서 뭐 좀 주워 먹었어. 그리고 난 뼈 해장국을 더 좋아해.”

 

  내 대답이 뭔가 불만스럽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해는 기다렸다는 듯 순순히 국밥을 받아들였다. 역시나 자기가 먹고 싶어 시켰던 것이다.

 

  해가 식사에 열중하는 바람에 얼마간 심심해진 나는 그때부터 해의 모습을 가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취기가 오른 탓에 볼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은 삐죽 나온 데다 양미간을 찌푸린 상태라 불만이 한가득해 보였다. 추웠는지 살짝 웅크린 자세로 오들오들 몸을 떨고 있었으며, 국물을 호호 불어먹는 모습이 어째 좀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방이라도 벗어줘야 되나…….’

 

  해는 처음엔 국물만 몇 번 뜬다 싶더니, 어느샌가 밥까지 말아 꾸역꾸역 떠먹고 있었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나중엔 아예 뚝배기에다 고개를 처박기까지 했다.

 

  “안 뜨거워?”

 

  “괜찮아.”

 

  “이것도 좀 집어먹어.”

 

  내가 순대 모둠 접시를 앞으로 내밀자 해가 뜨거운 밥과 순대로 가득한 입을 힘겹게 벌리더니, 뭐라 뭐라 괴상한 소리를 냈다. 내 짐작으론 “너도 좀 먹어”였던 것 같다. 해의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적잖이 배가 고파졌는지라 앞에 놓여있던 순대로 자연스레 손이 갔다.

 

  “괜찮은데?”

 

  24시간 음식점치곤 제법 맛이 있었다. 그렇게 몇 개를 더 집어먹자 슬슬 술이 당겼다. 보아하니 저 국밥귀신 쪽은 이미 좀 술이 된 것 같아 혼자 따라 마시려는데, 언제 또 봤는지 해가 씩 웃으며 술잔을 내밀고 있었다.

 

  “같이 마셔.”

 

  그러곤 어울리지도 않게 인상을 팍 쓰며 술을 들이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퍽 웃겼다.

 

  “으…… 쓰다…….”

 

  “예상은 했지만 잘 못 먹나 보네.”

 

  “못 먹어. 좋아하지도 않고. 너는?”

 

  “그냥, 그냥. 주량도 그렇고, 좋아하는 지도 그렇고. 먹으면 먹고, 아니면 말고.”

 

  해는 그 말대로 술을 못 마시는 편이었다. 그 이후로 딱 한 잔을 더 마셨을 뿐인데도 눈이 다 풀려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소주 네다섯 잔 정도가 한계치인 듯싶었다.

 

  얼추 다 먹은 것 같아 그만 일어나자고 말하려던 때였다.

 

  “내 동생 말이야…….”

 

  “동생?”

 

  “나 동생 있는 거 알지.”

 

  “너 동생도 있었어?”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당연히 외동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뚜렷한 근거는 없었지만 왠지 느낌이 그랬다. 설사 형제자매가 있다하더라도 아마 동생 쪽이지 싶었는데 웬걸 해에겐 남동생이, 그것도 두 명이나 있다고 했다.

 

  잠시간 침묵을 이어가던 해는 이윽고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는다는 듯 어깨에 힘을 쭉 뺀 상태로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야동보다 엄마한테 걸렸대.”

 

  “……뭐?”

 

  “야동 걸렸다고.”

 

  그 순간 나는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야만 했다.

 

  “그것 때문에 술 마신 거?”

 

  “응. 엄마가 전화 왔었어. 네 동생 왜 그러냐고…….”

 

  “몇 살인데 동생이?”

 

  “스물한 살.”

 

  그 말을 듣고 나니 이젠 웃음 대신 헛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야 무슨…… 장난해? 난 또 완전 애기인줄 알았네. 물론 본의 아니게 그러한 광경을 보인 것에 대해선 일말의 책임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네가 괴로워하며 술을 마셔야 할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난 내 동생만은 안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나 순수했던 아이인데…….”

 

  해의 잦아드는 목소리에 나는 기어이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아니, 그럼 네 동생 말고 다른 남자들은 어? 죄다 어? 그냥 더럽다는 얘기야? 아니, 남자들뿐만이 아니지. 여자애들도 웬만하면 한 번씩 다 보지 않나? 넌 한 번도 안 봤어?”

 

  “……봤어.”

 

  “하이고, 그런데 참나…….”

 

  “그래도 내 동생은…… 특히나 걔는 절대 안 그럴 줄 알았단 말이야!”

 

  해가 분한 듯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때 나는 속으로 ‘아, 그럼 다른 동생은 이미 충분히 더럽다는 걸 인정한다는 뜻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걸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왠지 지금보다도 더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나는 그것보다도 네가 동생을 완전히 애 취급 하는 것 같아서 그게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스물 한 살이면 기껏해야 2살 차인데 ‘그렇게나 순수했던 아이’라니…… 야, 누가 보면 진짜 띠 동갑 이상 차이 나는 줄 알겠네.”

 

  “뭐! 내가 걔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허.”

 

  이때 나는 한순간 말을 잃고 말았는데, 단순히 어이가 없다거나 황당함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이 ‘해’라는 사람이 나와는 전혀 다른, 그리고 이전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라는 걸 똑똑히 체감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태껏 ‘사랑’이라는 단어가 저만큼이나 강렬히, 그것도 고작해야 2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남동생을 수식하는데 쓰일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한, 막둥이 동생을 둔 친구들조차 ‘귀엽다’는 표현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해의 저 외침은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남매에 대한 인식을 대단히 고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앤…….”

 

  “왜? 또 뭐가 있어?”

 

  해의 얼굴은 어느덧 우울과 슬픔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행위가 그렇게나 상심할만한 일이었을까. 그 감정을 제대로 공감해낼 수 없었던 나는 해의 손이 술병을 향해 움직이는 걸 보면서도 쉽사리 막아서지 못했다.

 

  “걔는…… 신부님이 될 거란 말이야…….”

 

  “……신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신부님 말이야, 성당 신부님.”

 

  “……신부라.”

 

  그제야 희한하게만 보였던 해의 반응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천주교는 기본적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추구하기 때문에 특히나 신학도의 길을 걷는 이들에겐 꽤나 가혹할 정도의 엄격함이 요구된다. 나 역시 어릴 적부터 엄마를 따라 성당을 다녔던 적이 있는 터라 그 고요함이 주는 지칠 정도의 엄숙함을 잘 알고 있었다.

 

  “신학대…… 같은 곳을 다니고 있는 거야?”

 

  “응. 가톨릭대학교.”

 

  “……어머니가 정확히 어떤 걸 보셨대? 뭐…… 실수로 이상한 사이트에 들어가졌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그러자 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걔가 고백했데. 울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엄마는 왜 자기한테 그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더라. 고해성사 놔두고 왜 하필 자기한테…… 차라리 나한테나 말하지.”

 

  나는 그저 멍하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는 동생의 괴로움이 자기의 괴로움인양 힘들어하고 있었다. 벌겋게 물든 두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게 처음도 아닌데다 자신이 먼저 이 길을 가겠다고 나선 주제에 결국 또 못 참고 저질러 버렸다고……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괴롭고 힘들다면서……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 진이…….”

 

  기어이 해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톡하고 떨어졌다. 가물가물 떨어지는 모양이 마치 슬픔의 결정체가 토해지는 것만 같아 순간 나도 모르게 따라 울컥하고 말았다.

 

  “사람인 이상 본능적인 욕구를 거역하긴 힘들겠지. 그래도 그쪽 종사자들이라면 다들 겪곤 하는 평범한 고충이 아닐까? 본인 주위에도 그에 관해 조언해줄 이들이 적진 않을 테고. 알아서 잘 해결할 거야. 그래도 계속 힘들어한다 싶으면 그때 좀 다독여주면 되지. 응?”

 

  나는 해가 더 슬픔에 빠져들기 전에 어떻게든 감정을 수습해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니까 그렇게나 참기 힘든 것이냐고! 그러니까 그것 말이야!”

 

  해는 어느덧 완전히 취해버린 모습이었다. 주변은 이제 안중에도 없는지 대놓고 고함을 치는가하면, 어머니인지 동생인지 그도 아니면 그 자신인지. 하여간에 정체모를 누군가를 향해 끊임없이 호통을 치기도 했다. 마침 가게 안에는 우리 말고도 손님이 한 테이블 더 있어 내심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해의 주정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그리고 다른 손님들의 안색이 굳으면 굳을수록 내 얼굴의 열도 따라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걸치고 있던 남방을 벗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에어컨 바람을 막으려 줄곧 옷깃을 여미는 중이었는데, 이젠 몸의 열을 식혀야할 판이었다.

 

  “일단 진정해, 진정.”

 

  나는 그렇게 말하며 해의 손에 들린 술병을 조심히 뺏어 테이블 위에다 내려놓았다. 무슨 터지기 일보직전의 고위험군 폭발물을 다루는 기분이었다.

 

  “짜증나…… 전부.”

 

  말과 동시에 해의 고개가 풀썩 아래로 떨어졌는데, 의자가 낮았던 탓인지 테이블에 이마가 쾅하고 받쳐버렸다. 어찌나 소리가 컸던지 주방에 있던 이모가 뭔 일이냐면서 후다닥 뛰쳐나올 정도였다.

 

  “으…… 아파…… 아프다.”

 

  “괘, 괜찮아?”

 

  혹시나 죽었나싶어 흔들어보니 해가 짜증을 내며 내 손을 거칠게 쳐냈다. 살아있긴 하니 그나마 다행인건가.

 

  모두가 동의하듯, 단단히 화가나 있거나 짜증이 난 상대를 눈앞에 둔 심정은 그야말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나 나 때문에 감정이 상한 것도 아닌데다, 그렇게나 기를 써가며 풀어줘야 할 입장도 아닌 경우(내가 무슨 남자친구도 아니고), 더욱 그 참담함이 클 수밖에 없다. 화룡점정으로 머리끝까지 술에 취해있다면야.

 

  나는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런 경우가 익숙지도 않을뿐더러, 해의 상태가 점점 더 심상찮아졌기 때문이다.

 

  “동생한테 직접 연락은 해본거야?”

 

  일단 화제부터 전환시킬 겸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았다. 아직 대화가 가능할까?

 

  “……동생?”

 

  “혹시라도 말이 다를 수 있으니까. 어머니 말만 듣고 상황을 판단한 거라면…… 아, 뭐 거짓말을 하셨다는 얘기는 아니야. 그냥……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상태인지 조금은 파악할 수가 있잖아. 지금 연락은 되고 있는 거야?”

 

  그러자 해는 고개를 처박은 채로 “이미 다섯 번이나 전화해봤는데 죄다 씹혔어…… 답장도 없고……” 하며 침울히 대꾸했다. 다행히 아직 정신은 좀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럼 그냥 당장은…….”

 

  나는 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동생에게 따로 시간을 좀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어쨌거나 본인도 자괴감 때문에 고백한 것일 텐데…… 옆에서 또 자기 못지않게 확 반응해버리면 더 힘들어질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너도 그냥 마음 편히 가지고 기다…….”

 

  “그럼 연락도 하지 말란 소리야?”

 

  해의 말투에 왠지 모를 한기가 서려있는 것만 같아 나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레 한 문장, 한 문장을 다듬어야 했다.

 

  “그렇다기보다…… 동생 쪽에서 먼저 마음이 진정되는 걸 기다려보자는 거지. 어쨌거나 동생도 나름 힘겹게 용기를 짜낸 상태일 테니까 지금쯤 굉장히 기진맥진해 있지 않을까? 조금 쉴 시간 정돈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러고 슬쩍 곁눈질해보니, 때마침 해가 테이블 위에 처박혀있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 있었다.

 

  “걱정되는데 어떻게 해 그럼…….”

 

  벌겋게 물든 이마 아래로 해의 치켜뜬 눈이 보였다. 가는 실핏줄들이 까만 눈동자 주변에 이리저리 퍼져있었고, 그렁그렁 고여 있던 투명한 눈물방울이 그것들을 반쯤 적셔놓고 있었다. 슬픔에 지친 눈이었다.

 

  해의 두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갑작스레 나를 휘감아온 묘한 감정 때문에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처연했던 그것은, 그토록 먹먹하고도 아련했던 나머지 당장 감싸줘야만 할 것 같은 가녀림으로 내게 다가왔다. 마치 밤늦은 새벽, 새끼 잃은 어미 고양이의 구슬픈 흐느낌을 마주했었던 어느 날의 기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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