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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더럽(The Love)
작가 : 지놓
작품등록일 : 2019.9.3


"나, 다른 사람 같이 좋아해도 돼?"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관계와 사랑
그것의 시작,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하여.

#대학생 #캠퍼스물 #악의꽃 #섹슈얼리티 #조별과제 #폴리아모리

 
2. 해는 때론 바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낼 때가 있다(1)
작성일 : 19-09-05 22:33     조회 : 39     추천 : 0     분량 : 7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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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어느덧 여름 계절학기가 모두 끝이 났다. 봄 학기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쫓기듯 시작해서 그런지 내내 지겹다는 생각뿐이었는데, 3주란 기간이 의식도 못하는 새 증발하듯 사라져 있었다. 성적표라 이름 붙은 종이에 덩그러니 새겨져 있던 두 개의 대문자 알파벳이, 그래서인지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는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 아냐. B만 두 개를 받았기 때문이지. B가 네 현실이란 소리라고.”

 

  “……하나는 그래도 플러스야.”

 

  “그거나. 그거나.”

 

  해는 무심한 표정으로 자기 앞에 놓인 딸기 에이드를 쭉 빨았다.

 

  첫 만남 이후로 고작해야 3주 가량이 흘렀을 뿐이지만 나는 해와 제법 친해진 상태였다. 해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내가 그 짧은 기간에 난생 처음 만난 여자애와 이토록 친해질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먼저 연락을 해온 건 해 쪽이었다. 그날 저녁 당장 전화가 와서는, 뭐하는 중이냐고 혹시 저녁이나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대뜸 묻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부름에 살짝 당황하긴 했으나 얼른 알겠다며 약속을 잡았다. 솔직히 조금 설렌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우연한 만남에 이은 우연한 저녁이었으니. 대체로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이후로 우린 이틀에 한 번 꼴로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신다거나 밥을 먹었다.

 

  “계절학기도 끝났고 하니 이제 좀 쉬겠네?”

 

  “딱히 아무것도 안하고 있긴 하지. 근데 아무것도 안할 때일수록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싶을 줄 알았는데…… 솔직히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뭐랄까…… 무료해.”

 

  그토록 따분한 일상은 전역을 두어 달 앞두고 발을 삐끗했단 핑계로 그저 한없이 누워만 있던 때 이외엔 경험해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무언가 계속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따로 계획해둔 건 없어? 영어 공부를 한다든지, 여행을 간다든지 하는 것들.”

 

  “글쎄, 애초에 그런 게 있었으면 여기 앉아 이러고 시간이나 때우고 있진 않았겠지.”

 

  내 말에 해가 눈을 흘겼다.

 

  “뭐야…… 내가 고작 시간이나 때우는 용이라고?”

 

  나는 씩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잘 아네.

 

  “넌 방학인데 뭐 안 해?”

 

  그러자 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 이것저것 많이 하고 있는데?”

 

  “뭐?”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잠도 자고…….”

 

  “숨도 쉬고?”

 

  내 말에 해가 낄낄대며 웃었다. 잘 웃어준다는 것 역시 내가 해를 편히 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나 아르바이트 하잖아.”

 

  “그거 고작 주말에 잠깐 하는 것 가지고.”

 

  해는 주말 아침마다 동네의 작은 빵집에 가서 점심 전까지 일을 했다.

 

  한 번은 해가 빵집에서 얻어왔다며 웬 생크림 빵 하나를 건넨 적이 있는데, 차갑고 딱딱한데다 어쩐지 조금 쉰 냄새까지 나는 것이었다. 내가 상한 것 같다고 말하자, 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새로이 피자소시지 빵과 단팥빵 하나씩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것들 역시 마찬가지인 게 아닌가. 나중에야 해는 그것들이 실은 자기 집에서 일주일 더 숙성된 것들이라고 고백했다. 말하자면 쓰레기처리였다고.

 

  “야, 그것도 힘들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얼마나 힘든데. 더군다나 주말이고.”

 

  “너는 매일이 주말일 것 아냐.”

 

  “뭐래” 하며 해가 정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뭐하고 다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별 말이 없는 건,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굳이 그렇게까지 내 일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게 싫었을 뿐이라고. 얘는 진짜 내가 아무것도 안하는 줄 아나 보네. 그리고 너는 뭐 다르냐? 너야말로 이제 매일이 주말이지. 하는 것도 없이.”

 

  해가 씩씩대며 쏘아붙였으나 솔직히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건 맞아. 맞는 말이지. 그래서 지금 여행이나 한 번 갔다 올까 생각중이야.”

 

  “……여행? 어디로?”

 

  “아무데나.”

 

  사실 그즈음 내게 바람을 넣고 있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막 군대를 전역하고 나온 녀석인데 함께 여행 다니지 않겠냐고 권유해왔던 것이다.

 

  “난 인도! 인도 가보고 싶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해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인도? 갑자기 왜?”

 

  “전부터 가보고 싶었어.”

 

  “거긴 여자 혼자 다니기엔 좀 위험하지 않나?”

 

  그러자 해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난 못생겨서 상관없어.”

 

  가끔 스스로를 못생겼다 말하는 여자애들을 보면 대개 말과는 다른 속셈을 숨기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가령, “아니야, 너 전혀 못생기지 않았어!”라든가 “누가 그래? 너 정도면 완전 괜찮지!”와 같은 말들을 상대방에게 은근슬쩍 강요하는 듯한.

 

  그러나 해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 속을 들여다보질 않았으니 확실하다 말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어째선지 내 의견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애당초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느낌이었다.

 

  해는 자기가 못생겼다고 하면 못생긴 것이었다. 그래도 객관적인 관점에선(물론 이 역시 내 주관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그 애가 아주 예쁜 편은 아니더라도 결코 못생긴 건 또 아니어서, 나는 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에 대해 가끔씩 의문이 들곤 했다.

 

  “뭔가 사람 냄새 짙게 풍겨올 것 같지 않아?”

 

  해가 허공을 바라보며 꿈꾸듯 말했다.

 

  “대체로 잘 안 씻는 느낌이긴 하지. 길가에 똥도 막 싸고 그런다던데…… 아, 물론 잘 모르는 상태에서의 선입견 섞인 발언이야.”

 

  “저번에 인도에 두 달 다녀온 사람을 만났었거든? 좋더라…… 얘기만 들어도.”

 

  “여자?”

 

  “응.”

 

  “뭐라고 했는데?”

 

  해는 잠시간 뜸을 들인다 싶더니,

 

  “눈과 눈썹 사이 은색 피어싱이 정말로 예뻤어…….”

 

  “……응? 피어싱이 뭐?”

 

  가끔씩(혹은 자주) 해와의 대화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튀어나가곤 했는데, 나는 그것이 우리의 대화가 해의 상상을 쫓아가기에 충분히 빠르지 않아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해는 말하는 도중에도 곧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선 눈앞의 상대를 잊어버리곤 했던 것이다. 그래도 조금의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마치 퍼즐이 맞춰지듯 말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곤 했다.

 

  “인도사람들은 다 그렇게 한데. 피어싱 말이야. 눈이며 코며 혓바닥까지…….”

 

  “인도 다녀온 그 분이 눈가에 피어싱을 하고 온 거야?”

 

  “응, 은으로. 여기, 여기에다 두 개를 연달아 박았는데 엄청 예뻤어.”

 

  그렇게 말하며 해는 손가락으로 자기의 눈과 눈썹 사이를 콕콕 찔렀다.

 

  “근데 설마 그게 인도를 가고 싶어 하는 주된 이유는 아니겠지? 피어싱 같은 건 여기에서 해도 상관없는 거잖아.”

 

  “아냐, 거기서 해야 돼. 여기는 뭐라 뭐라 말들이 많잖아. 탈색 한 번만 해도 이러쿵저러쿵 귀찮게들 하는 마당에…….”

 

  “아무리 그래도…….”

 

  “거기서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게을러지는데 또 그게 완전 좋더래. 눈치 볼 일이 없잖아. 카레도 손으로 막 먹고. 씻기 싫을 때가 얼마나 많은데 그곳에선…….”

 

  해는 이미 혼자만의 세계에 푹 빠져 들어간 상태였다. 나는 대화하기를 포기한 채 해에게 멈춰있던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바깥에선 무더운 한낮의 아지랑이가 사람들을 이쪽저쪽으로 끌고 다니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좀비무리처럼 고개를 축 내리깔고는 눈앞의 신기루를 쫓아 저벅저벅 걸었다. 하나같이 피로에 지친 모습들이었다. 저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당장이라도 이 저주스러운 더위를 피해 어디론가 달아나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바람 불고 화창한 날의 제주도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하얗고 파랗고 검은 바다가 눈앞에 쭉 펼쳐져 있다. 그것은 아침나절 초록색이 되었다가 노을이 질 무렵 붉게 변한다. 푸름과 차가움을 머금은 오색의 바다. 나는 지금 그 바다 옆 해안도로에서 스쿠터를 타고 있다. 그토록 거센 바람이 내 두 뺨을 찰싹찰싹 때린다. 오른편엔 푸른 바다와 검은 바위들이 있고, 왼편엔 알록달록한 시골집들과 황금색의 논밭과 갈색 말들이 있다. 그리고 정면엔 끝없이 펼쳐진 하나의 회색길이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머나먼 길. 난 그 길의 끝을 확인하기 위해 바람과 하나가 되어 달린…….

 

  “뭐해?”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심드렁한 표정의 해가 날 보고 있었다.

 

  “……그냥 잡생각.”

 

  해가 “근데 여기 좀 춥지 않아?”라고 하며 몸을 움츠러뜨렸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또 좀 쌀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 안은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는 상태였다.

 

  “뭔가 좀 웃기지 않아?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라도 더 벗으려고 하는데, 여기 안은 하나라도 더 꽁꽁 싸매려고 하는 거.”

 

  해의 말마따나 그것은 무척이나 대조적인 광경이었다. 방금 전 창가를 스쳐 지나간 여성만 하더라도 이것저것 덮어주어야 할 것 같은 휑한 차림이었던 것에 반해, 해는 언제 또 얻어왔는지 자기 무릎과 양어깨에 담요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하나만 줘.”

 

  “뭘?”

 

  “담요. 나도 줘.”

 

  “너 남자잖아. 좀 참아봐.”

 

  해의 말에 나도 모르게 콧방귀가 튀어나왔다.

 

  “웬 얼토당토 않는 성차별적인 발언? 그리고 나 찬바람 알레르기 있어. 벌써 콧물이 눈동자까지 차올랐다고.”

 

  “난 찬바람 쐬면 똥 나와.”

 

  “……하.”

 

  해는 걸핏하면 이랬다. 자꾸만 배가 아프다느니, 똥이 마렵다느니. 부끄럼도 없는지 거침없이 막 내뱉었다.

 

  “아니, 넌 무슨 여자애가…….” “뭐 사실인데. 찬바람 맞으면 왠지 배 아픈 느낌 난단 말이야. 그리고 뭐, 똥마렵다는 소리는 너만 할 수 있냐?”

 

  그러고 뾰로통해진 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웬일인지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네 맘대로 하세요. 담요도 다 덮으시고 똥도 마음껏 싸시고.”

 

  그러자 해가 ‘헷’ 하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썩 보기 좋은 표정이었다.

 

 

  *

 

 

  다음 주가 되어 나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나 구했다. 학교 주변에 위치해 있던 가게로 밤이 되면 맥주나 위스키 등을 함께 파는 곳이었다.

 

  원래는 제주도를 갈 생각으로 비행기 표를 알아보는 중이었는데, 함께 가기로 했던 친구에게 사정이 생겨 별 수 없이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라도 갈까 생각해봤지만 왠지 김이 새버린 뒤였고, 영어공부니 뭐니 하는 것들은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선택한 건 그간 풀어져 있던 생활의 끈을 조금이라도 조여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저녁타임으로 오후 일곱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일을 하게 되었다.

 

  일은 쉬운 편이었다. 주문을 혼동한다거나, 발을 헛디뎌 유리잔을 깨지만 않는다면 크게 실수할 것도 없었다. 나의 경우 시작과 동시에 그 두 가지를 연달아 하는 바람에 매장 매니저에게서 한동안 의미심장한 눈초리를 받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는 별 문제없이 잘 해냈다.

 

  일이 모두 마무리되어 갈 즈음, 매니저가 내게 술이나 한잔하고 들어가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그것이 전통이라며 함께 일하던 선임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는 나와 같은 대학교 학생으로 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

 

  “오늘은 그래도 손님이 많은 편은 아니었어. 정말 바쁠 때는 식기세척기도 못 돌려. 헹구고 나가고 헹구고 나가고 계속 반복해야 될 정도라.”

 

  매니저는 수고했다 말하며 내게 술을 따라주었다. 편하게 받으라는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조금 긴장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학생들은 많이 안 오는 것 같던데요?”

 

  술을 들이켜고 인상을 찌푸리는 내게 선임이 밑반찬으로 나온 나물무침을 권했다. 여기는 이게 맛있다고.

 

  “조금 외진 곳에 있기도 하고, 가격대도 조금 높은 편이니까. 오히려 교수님들이 많이 찾으시는 편이지. 인테리어도 그렇고 메뉴도 그렇고. 위스키 하나 시켜서 홀짝홀짝하다 슬슬 취기 오른다 싶으면 그때 아메리카노 한잔 딱! 어때, 구성 괜찮지 않아?”

 

  “좋은데요?”

 

  “근데 왜 이렇게 자꾸 매출이 떨어지냐…….”

 

  매니저가 한탄하듯 내뱉으니 “그러게 잘 좀 하지……” 하며 선임이 슬쩍 말을 흘렸다. 다행히 매니저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순배가 여러 번 돌자 선임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근데 너 여자친구는 있냐?”

 

  “여자친구요? 아뇨…… 설마요.”

 

  내 대답이 썩 만족스러웠는지 선임이 씩 웃었다.

 

  “형, 얘도 살짝 답 없는 것 같은데요?”

 

  “난 얘 처음 면접 볼 때부터 알았어. 그냥 좀 별로란 걸.”

 

  어이가 없으려니 웃음이 다 나왔다.

 

  “두 분은요? 다 있으세요?”

 

  “난 있어. 이 형은 없고.”

 

  “뭔 소리야. 여기 오는 아줌마들이 다 내 애인인데.”

 

  “그렇대.”

 

  “얼마나 사귀었어요?” 하고 내가 선임을 보며 물었다.

 

  “한 2년 됐지. 전역하고 곧바로 사귀기 시작했으니.”

 

  내가 “예뻐요?” 하고 물으니, 옆에 있던 매니저가 “예뻐” 하고 대신 답했다.

 

  “몇 번 가게 놀러왔는데 괜찮더라.”

 

  “형이 뭔데 제 여자친구를 평가해요?”

 

  “뭐 이 새끼야?”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너 그럼 지금 썸타는 애도 없어?”

 

  선임이 다시 은근슬쩍 물었다.

 

  “……썸이요?”

 

  “오, 있나 본데?”

 

  나는 머릿속으로 두 명의 여자애를 떠올려보는 중이었다. 하나는 봄 학기 때 같이 수업을 들었던 두 살 어린 후배였고, 다른 하나는 바로 해였다.

 

  그 여자후배완 이미 두어 차례 데이트 비슷한 걸 하기도 했었다. 과제를 한답시고 같이 영화를 본 적도 있고, 둘이서 수업을 땡땡이치곤 근처 공원으로 놀러갔던 적도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술에 취한 그 애로부터 “오빠 보고 싶어”란 말을 듣고 난 이후로는 왠지 조금 대하기가 껄끄러워진 상태였다.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사실 이와 같은 태도는 내가 가진 여러 결점 중 하나였다. 나 스스로가 아직 그에 대한 감정을 명확히 하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 내게 먼저 호감을 표시해오면, 어느샌가 급격히 부담을 느끼곤 슬슬 그 사람을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여자들 입장에서야 흔히 말하는 ‘어장관리’를 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나 역시도 괴로운 부분이었다.

 

  해의 경우는 그와는 또 달랐다. 나는 평소에 꽤나 관심을 두고 해를 봐오긴 했지만 그것이 여자로서의 매력 때문은 아니었다. 해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저 편안한 느낌이었다. 물론 함께일 때 무척 즐겁기도 하고 그 애에게서 풍기는 엉뚱함이 때때로 나를 웃음 짓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이가 무슨 설렘이나 두근거림으로 채워져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어쩌면 해리포터가 루나 러브굿을 볼 때의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해에게서 설렘을 느꼈던 때는 그때 그 건물 화장실에서의 첫 마주침의 순간이 유일했다.

 

  “조금 비슷한 게 있나 생각해 봤는데 뭐…… 없네요.”

 

  “그러면 안 돼.”

 

  선임은 빨개진 얼굴을 매니저 쪽으로 들이밀며 고개를 까닥까닥 거렸다.

 

  “이 형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맞아, 나처럼 되면 안 되지. 혹시라도 떠오르는 사람 있으면 웬만하면 그냥 잡도록 해. 여자들에겐 여지란 게 없는 거거든. 제때 잡지 못하면 금방 딴 사람 만나러 가버린다니까?”

 

  매니저는 씁쓸한 표정으로 술잔을 비웠다.

 

  “아, 형! 무슨 사연 있는 사람처럼 얘기하지 마요. 아무것도 없으면서.”

 

  “뭐 이 새끼야?”

 

  참으로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소개팅 해줄까? 우리 과가 어마어마하게 여초거든.”

 

  선임이 호의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예쁜 애들 많아.

 

  나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소개팅을 해본 적이 없었다. 비교적 오래 봐왔다 할 수 있는 대학교 동기들마저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는데, 어찌 감히 처음 보는 여성과 오순도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을까. 오직 해만이 내겐 특별한 경우였다.

 

  “괜찮아요. 진짜 외로워지면 그때 말씀 드릴게요.”

 

  나는 씩 웃으며 잔을 부딪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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