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도깨비- 15화 세 사람의 이름
불요의 기백으로 자세를 잡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늠름하게 웃었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에게 누가 숨을 불어 넣기라도 한 것처럼 생기가 감돌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모든 일에 무신경한 사내가 내 일만큼은 자기 일처럼 화내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부드럽게 눈을 접는다.
그 점이 어딘가 낯부끄러워 괜히 목을 긁적였다. 결에게 맞아 삐져 있던 주령이 황급히 팔을 휘저으며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결이 형님만 이름 지어주고 너무해!”
“너는 이미 이름이 있지 않냐. 나랑은 상황이 다르다. 나는 이름을 들켜서 어쩔 수 없이 새로 짓는 거다.”
팔짱을 낀 결, 아니 운이 기세등등하게 주령을 돌아보았다. 그에 주령이 분한 듯 운에게 씨근덕거리다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썼다,
“싫어 싫어! 나도 새 이름 가질래! 누님-!”
벌떡 일어난 주령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다람쥐처럼 볼을 부풀렸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칼이 눈앞으로 훅 다가왔다. 볼 때마다 적응하지 못하고 놀라는 머리색에 내가 속삭이듯 지껄였다.
“홍모(紅毛)…….”
“내 이름이 홍이야? 아싸! 이름 생겼다!”
하지만, 기민한 아이가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새 이름이라고 생각한 주령이 다람쥐가 양 볼에 가득 먹이를 넣고 기쁨에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았다.
“그럼 누님 이름이랑 합치면 홍연(紅緣)이야? 역시 우린 운명인가 봐! 헤헤….”
“바보야, 연이 이름은 연꽃의 연(蓮) 자다.”
아아, 엎질러진 물을 수습할 새도 없이 주령이 말을 걸어왔다.
운이 한심하다는 투로 아이에게 핀잔을 줬으나 주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운에게 이죽거렸다.
이대로는 주령이 또 꿀밤을 맞을 것 같아서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면 홍연(鴻淵)은 어때? 큰 연못이란 뜻이야. 연꽃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지 않니?”
“응!”
“하… 연이 너까지……. 너무 장단 맞춰주지 마라. 애 버릇 나빠진다.”
“에이 형님, 이제 보니까 질투하는 거구나! 그럼 그렇지!
“뭘 생각하든 다 아니다.”
“알았어! 알았어!”
입꼬리가 찢어질 듯 기분이 좋아진 홍이 한참 너스레를 떨다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제일 중요한 누님 이름 짓기네! 누님은 원하는 이름 있어?”
‘원하는 이름?’
고민은 하지 않았다. 원하는 이름을 대보라고 하는 순간, 바로 떠올랐으니까.
“월(月). 월로 하겠어.”
“월이라… 좋아! 나는 누님이 뭘 하든 다 좋으니까! 근데 왜 이름을 월로 한 거야? 다른 것도 많잖아!”
“달은 신라인들 모두가 사랑하는 존재거든.”
“그렇구나!”
“정말… 그뿐이냐?”
“아니, 태양이 뜨지 못하는 밤은 달의 차지니까.”
‘야월취화.’
나는 불로 취하지 못한 꽃 같은 게 아니야, 쉽게 꺾을 수 있는 꽃이 아니라 불로 취할 수 없는 달이다. 아무도 취할 수 없는 달이 될 거다.
그래서 당신이 짓밟을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 우리 가문의 빚을 갚을 거다.
반드시!
나는 은장도를 쥐고 운과 홍을 바라보다 앞서 걷고 있던 결에게 말을 붙였다.
“결, 우리 가문의 검술 어디까지 알고 있어?”
“나를 소유했던 이들이 썼던 방식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럼. 나 검술 가르쳐줘.”
나는 호신술이나 활쏘기, 말타기 정도는 할 줄 알았지만, 우리 가문의 검술은 초급자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직접 가문의 사람에게 배우지도 못했고 늘 연무장에서 몰래 눈 도둑으로 훔쳐 배운 게 다라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배워두고 싶었다.
“힘들어도 봐주지 않을 거다. 그래도 괜찮아?”
“내가 바라는 바야.”
내가 맹랑하게 먼저 은장도를 쥔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따라서 검을 든 손을 내게 부딪쳤다.
“우선 실력 평가 좀 해볼까?”
*****
“분명 우리 그러고 있지 않았어!”
‘-그러지 않았어! -않았어!’
홍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산에서 시끄럽게 굴면 호랑이 나타난다.”
“아니 왜 산인 거냐고? 멀쩡한 마을 놔두고!”
“네가 그러지 않았냐, 다른 범죄자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은 오히려 그들끼리 똘똘 뭉쳐 이방인인 우리를 경계할 확률이 높고, 범죄자가 많은 만큼 거기에 숨어든 군졸들도 많아서 새로 마을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알아볼 수 있다고.”
“…그랬지.”
“앞에 걸 다 무시한다 치고 마을에서 연을 가르치면 여인이 검술을 배운다 하며 진귀한 구경거리 여긴 사람들이 몰려들걸. 그래서 아무도 다니지 않을 것 같은 험한 산중으로 온 거지. 여기라면 연이 검술도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가르칠 수 있으니.”
이런 이유로 우리는 지금 삭주와 명주(오늘날 강원도) 사이에 위치한 숲속에 있었다.
“나 다리 아파 누님, 엉엉!”
“업어줄까?”
“응!”
다리 아프다는 사람치고는 냉큼 달려드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멀쩡한 것 같은데……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홍을 흘겨보자 홍이 앓는 소리를 내며 다리를 잡았다. 결국, 호들갑을 떠는 홍을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이 운이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게 귀찮은 잔나비 같군.”
“이거 놔! 이 멀대 같이 더럽게 큰 형님아!”
“너는 교양을 좀 배울 필요가 있어.”
“힝… 누니이이임.”
‘어쩔 수 없지.’
“운, 이만하면 꽤 깊이 들어 온 것 같은데 슬슬 검술 연습해도 되지 않을까? 이 정도면 자리도 괜찮은 것 같고.”
“알았다.”
그가 쓰레기 던지듯 홍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홍이 씩씩거리며 욕지거리를 뱉었으나 운은 들은 체도 안 했다.
홍의 얄미운 장난에도 놀아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운은 고행을 겪는 부처처럼 보였다, 아니면 관심을 주지 않고 홍이 제풀에 지칠 때까지 두면 알아서 그만둔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운에게 꿀밤을 맞으면서도 덤비는 홍은 어떤 의미로 운보다 더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꼭 지치지 않는 황소 같았다.
결이 제게로 달려드는 홍의 머리를 한손으로 잡아 제압하고는 내게 물었다.
“그럼 실력을 한 번 봐볼까? 제일 잘하는 게 뭐지?”
나는 망설임 없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 그대로 나무에 달린 열매를 향해 던졌다. 열매가 깔끔하게 꼭지만 잘려진 채 바닥으로 낙하했다. 떨어지는 열매를 받아낸 홍이 한입 베어 물으며 우물거렸다.
“누님. 나 잘했지?”
“그쪽은 더 배울 필요 없겠군.”
“인정해줘서 고마워.”
“누님은 어떻게 단도를 잘 다뤄! 나 완전 반하겠어-! 누구한테 따로 배운 거야?”
“응, 스승님한테. 나한테는 오라비 같은 사람이었어.”
그래서 갑자기 스승님이 사라졌을 때, 마치 빈자리를 채우듯 아버지가 데려온 한이 더 못마땅했지. 누군가를 대신 할 수 있는 건 없는데 말이야.
“그분이 나한테 단도를 쓰는 법과 기본적인 호신술을 가르쳐줬어. 검술은 내가 좀 더 크면 가르쳐 주기로 약속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없이 떠나 버리는 바람에 그 후로는 어떻게 지내는지도 몰라…….”
말이 이어질수록 씁쓸했다. 정말 어디로 갔을까? 원래 바람 같은 사람인 건 알았지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거지? 나는 스승님한테 아무런 의미도 아니었던 걸까? 우린 가족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래. 스승님이 생겼다고 내게 신이 나서 이야기한 후로는 나를 보러오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지.”
결이 그때를 회상하면 어이없다는 얼굴로 픽 웃었다.
나는 처음으로 듣는 그의 가시 돋친 말에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운이 화내는 건가?
갑작스레 분위기가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 듯 싸늘해졌다.
그가 말없이 검집으로 원을 그렸다.
화난 건가? 화난 거 맞지? 홍에게 눈짓으로 동의를 구했으나 아이는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그거 아니야, 떼끼 집어넣어!
내가 고개를 저으며 홍의 엄지손가락을 친히 접어주자 이번엔 반대쪽 손의 엄지를 들었다.
아니, 아니라니까!
내가 하늘로 솟으려는 홍의 엄지를 접으며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운이 땅에 검을 찍어 내려 큰소리를 냈다.
압력에 눌린 땅바닥이 검집 모양대로 푸욱 꺼졌다.
‘설마 내 대신이라 여기고 찍어 내린 건 아니겠지?’
닭살이 오소소 돋는 팔을 문지르며 변명거리를 찾았다.
어릴 때 일이라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실제로 아버지가 방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는 바람에 환두대도를 보러 가는 일이 뜨문뜨문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럼……. 내 잘못이 맞나? 사과해야 하는 건가?
“미… 미안?”
“연아, 가문의 검술 중 아는 게 있어?”
“어……?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이들을 몰래 훔쳐보고 배운 게 다라 정확히는 몰라.”
제 발 저린 내가 도둑놈이 소 몰듯 자세를 취하자 운이 전체적으로 나를 훑으며 팔짱을 낀 손을 까딱였다.
진지하게 평가하는 그의 모습에 긴장한 나머지 목이 탔다.
침이라도 삼키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날 것 같아서 참았다.
“눈대중으로 배운 거치고 자세는 좋아.”
“허나!”
‘빨라!’
“아.”
“빈틈이 너무 많아.”
딱딱하고 차가운 쇠의 감촉이 허리를 짓눌렀다. 내 탄식을 들은 운이 검을 검집에 도로 물렸으나, 아직은 더 쓸 요량인지 허리에 차지는 않았다.
그가 턱을 잡고 꽤 오래 검을 내려 보다 한 손으로 검을 위아래로 던지며 받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말도 없이 실전으로 돌입하다니 솔직히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진작 말해줬으면 피해 보려는 시늉이라도 했을 텐데. 아직도 검의 묵직함이 허리에 남은 기분이었다.
홍이 내쪽으로 오며 나와 같이 운을 째려봐 주었다. 우리 두 사람이 맹렬한 기세로 노려보는 걸 느낀 운이 똑같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둘 다 눈이라도 부신 거냐?”
“아니.”
“아니거든!”
‘그럼 됐다.’라는 말로 상황을 정리해버린 운은 우리의 얼빠진 얼굴은 보지도 않고 현재 그가 가진 검은 너무 무거워서 내가 대련용으로 쓰기에는 알맞지 않다고 했다.
내가 눈을 세모꼴로 접으며 그런 검 정도는 들 수 있다고 따지자 운이 입가를 씰룩였다.
나중에는 불시에 터져 나온 폭소를 참기 위해 입을 가리고는 기침을 해대는 통에 재수 없게만 느껴졌다.
너 지금 비웃는 거지? 그런 거지?
심통이 난 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홍의 옆으로 가 서자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보란 듯이 홍의 손을 잡고 올려다보니 이번엔 한숨을 내쉬었다.
뭐? 왜! 왜!
마치 저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 하룻강아지를 봐주는 범의 눈빛이라 기분이 팍 상했다.
먼저 비웃은 건 자기였으면서!
내가 어이없다는 투로 허리에 손을 얹고 그를 계속 쏘아보자 운이 긴 나뭇가지 두 개를 들고 와서는 원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할 수 없이 홍의 손을 놓고 원안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홍이 아쉬운 듯 내 손을 보며 힐끔거렸다.
생각보다 손잡는 걸 좋아하는 홍의 모습이 어미를 졸졸 따라다니는 새끼 잔나비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곧 운이 던진 나뭇가지를 받느라 멀리멀리 날려 보냈다.
그는 일단 내 움직임을 확인한 뒤에 어떻게 가르칠지 결정할 요량인 듯했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여 보라며 손짓을 보내왔다. 나는 운과의 거리를 조금 벌린 후에 그에게로 도약했다.
바위에 앉아 우리가 나뭇가지로 대련하는 걸 지켜보던 홍은 심심한 듯 양발을 위아래로 흔들며 나뭇잎을 따 점을 치고 있었다.
정확히는 대련이라기보다 철저히 한사람에 의한 강습이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따분한 시간이었다.
이파리를 다 뜯긴 앙상한 줄기가 허공을 유유자적 가른다. 그러나 그걸 들고 있는 사람은 무척이나 지루한 듯 턱을 괴고는 잇달아 하품했다.
줄기를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던져버린 홍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누님을 막아섰다는 그 도깨비 녀석 말이야. 왜 이랑 같은 인간을 구하려 했을까?”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말에 반사적으로 나뭇가지를 든 손을 멈추었다. 그런데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운은 아예 싸울 의지를 잃은 사람처럼 나뭇가지를 아래로 내리고 홍에게 벌침처럼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그의 매서운 눈길에 홍이 가시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옴짝달싹 움직였다.
“아니 궁금하잖아! 갑자기 나타난 것도 웃기는데! 무슨 사이라고 감싸냐는 말이야!”
“네놈은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게 꼭 천둥벌거숭이, 아니 쓸데없이 호기심 많은 새끼 잔나비 그 이상이다.”
이번엔 홍에게 신랄한 말을 했다고 운에게 면박을 주지 않았다.
나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홍이 잔나비 같다고 생각했고, 이제 막 몸풀기가 끝나 검술 훈련에 불이 붙는 느낌이었는데 이랑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김이 팍 식었다.
게다가 그 인간의 이름을 들으니까 온몸에 송충이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끔찍한 감각이 온 몸을 지배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소름끼치도록 싫은 감각을 털어내려 양팔을 툭툭 치며 털고 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그게 궁금하다면 내가 알려줄 수도 있지.”
빼빼 마른 고목의 구멍에서 나는 바람 소리처럼 휑하면서도 심지의 끝이 다 타들어 간 불꽃이 마지막 힘을 짜내는 소리를 닮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