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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야월취화(.夜月取花)
작가 : 소월혜
작품등록일 : 2020.8.19

호적에 이름은 올라와 있으나, 가문의 성을 물려받지 못한 아이.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불로 취하지 못한 꽃이 아니라 달이다. 그 누구도 취하지 못하는 달이 될 거다.” 무가의 장녀로 태어난 연은 혼인을 앞두고 살수의 습격을 받는다. 죽음의 위기 속, 신이한 힘을 발현한 연의 앞으로 한 사내가 나타나는데…. 통일 신라 말, 7명의 도깨비를 만든 여인의 이야기.

 
야월취화 - 24화 한의 이야기 (외전)
작성일 : 20-10-29 01:37     조회 : 230     추천 : 0     분량 : 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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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월취화 24화- 한의 이야기(외전)

 

 

 잘하면 누구보다 높은 관직에 올라갈 수 있단다.

 

 머릿속에서 웅성거리듯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그 목소리는 그립기도 했고 밉기도 했다.

 

 자신의 망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번 듣고 싶은 소리이기도 했다.

 

 “네가 한이로구나.”

 

 그때 태산처럼 크고 단단한 사람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 사람이 얼마나 큰지 그의 그림자가 속에 내가 안기듯 들어갔다.

 

 “이제부터 네가 살 곳이란다. 앞으로는 아버지라 부르거라.”

 

 “예…….”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적당히 힘일 실린 그의 몸에서는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곧은 성품이 느껴졌다. 흐트러짐 없는 점잖은 걸음걸이가 바로 눈앞에서 움직였다.

 

 그런데도.

 

 슬쩍 뒤돌아 본 궁의 문이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동안, 부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둔중한 소리가 한 차례 나며 문이 닫히고 말았다.

 

 

 언젠가 동생들이 말한 적이 있었다, 대궐 같은 집에 한 번이라도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진짜로 대궐에 들어와 양자로 살게 된 첫날의 감상은 무척이나 무섭고 엄할 것 같던 새 아버지가 생각보다 따뜻하신 분이라는 점, 새어머니가 되실 분은 그림에서 튀어나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우신 분이었다는 것이었다.

 

 천상의 선녀 중, 막내딸이란 표현은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말 같았다.

 

 전 어머니와는 다르게 고운 먹빛의 눈썹 아래 자리한 눈동자는 생기가 흘렀다, 유리구슬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물끄러미 나를 향했다.

 

 “아직은 이곳이 아주 낯설고 불편하겠지만, 지내다 보면 괜찮아질 거란다.”

 

 새어머니가 되실 분에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들키고 말은 모양이었다.

 

 혹 예법에 맞지 않는다고 혼내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도 해보았지만, 저 얼굴이 노기를 띠고 자신을 혼내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안 갔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예상과는 다른 훈풍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눈치 보지 말고 말하거라. 그리고 우리 연이랑도 잘 지내주렴.”

 

 따로 분칠하지 않아도 모란꽃 빛을 띤 입술이 둥글게 휘어졌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내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자, 새어머니가 부드럽게 웃으셨다. 그러고는 준비해 두신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미셨다.

 

 “수치를 잘 몰라서 일단은 한 번 이렇게 만들어보았는데 괜찮으면 입어 봐줄 수 있니?”

 

 손수 만든 옷이었다. 꼼꼼하게 놓인 자수가 반들반들하게 광택이 돌았다.

 

 더운밥 찬밥 가릴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외부인 취급당하며 사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이 우습게도 두 분은 내게 친절했다.

 

 마치 내게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느낄 정도였으니까.

 

 집을 떠나기 전 부모님은……. 이제는 전 부모님인 두 분이 그러셨다. 이제 거기 가면 배 굶지도 않을 거고 내가 잘하기만 하면 누구보다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나중에 모든 것이 잘 풀리면 그래도 한때는 가족이었던 그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나는 내 의사도 없이 나를 이곳에 보내기로 한 부모님의 결정이 밉기보다 그리 말씀하시며 탐욕스럽게 두 눈을 빛내던 두 분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바라지도 않던 새 가족의 호의에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여겨야 할지 모르는 양가적인 감정에 그만 울고 싶어졌다.

 

 ‘소문의 누이는 어디 있을까? 내가 온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을까?’

 

 첫째로 태어나 여러 동생들을 밑에 두었던 나는, 갑자기 생긴 손위 형제에 대한 기대감에 차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누이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쓰며 나름대로 제 상상을 덧붙였다.

 

 새아버지를 닮았다면 몸집이 우람하려나? 아니면 새어머니를 닮아서 그녀도 한 폭의 그림처럼 고아한 선녀 같을까?

 

 어쩌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피가 섞인 가족인데, 자신과 조금이라도 닮았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정말 진짜 가족처럼 사이좋게 지낸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몽실몽실한 구름처럼 피어나는 막연한 기대감에 새로 생긴 누이와 웃고 떠드는 상상을 하다 불현듯 떠오른 말에 나직이 탄식을 뱉었다.

 

 ‘아, 근데 누이는 소문이 아주 좋지 않은데……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잡아 먹히는 거 아냐?’

 

 그래도 새로 생긴 부모님이 모두 좋으신 분들이셨고 나를 반겨주셨으니까… 새누이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할지 몰라! 그러면 잡아먹지는 않지 않을까?

 

 ‘나 말라서 먹을 것도 없는데…….’

 

 그래도 이곳에 올 때, 불안하게 술렁거리던 심장의 고동이 지금은 호기심으로 펄쩍 뛰고 있었다.

 

 

 *****

 

 

 “앞으로 네 동생이 될 ‘한’이라고 한다.

 

 새 아버지가 새누이에게 나를 소개했다. 소녀는 나보다 약 두 뼘 정도 더 컸고, 아직 볼살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귀여워 보였다.

 

 누이는 새어머니를 닮기보다 새 아버지를 닮았는데, 살쾡이처럼 올라간 눈꼬리가 살짝 고집 있어 보였지만, 둥근 이마가 시원해서 보기 좋아 보였다.

 

 무성한 소문과는 달리 내 눈에 누이는 아직 어린아이답게 귀엽고 새치름 해 보이지만, 정이 많은 소녀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새누이가 마음에 들어서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고 말았다.

 

 ‘다행이다,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그런 행복한 상상은 소녀의 입이 벌어지는 순간, 와장창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

 

 푸르른 녹음을 닮은 표의와 바지를 입은 소녀가 나의 새 아버지를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쩌렁쩌렁 울리는 소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이 난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연-!”

 

 새 아버지의 불호령의 새누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도 그의 불호령에 놀라 딸꾹질을 해버렸다.

 

 그걸 정면으로 맞이한 새누이는 당연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유한 기운을 내뿜고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도깨비가 되니 절로 뒷걸음질 처졌다.

 

 솔직히 나였다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소녀의 두 눈에는 물기가 어렸지만, 울지는 않았다.

 

 소녀의 번뜩이는 안광이 나를 향했다. 오금이 다 저리는 눈빛에 내가 새 아버지의 등 뒤로 가며 몸을 움츠렸다.

 

 “어떻게! 나는 널 절대 인정 못 해……. 네가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내가 널 여기서 쫓아내 버리겠어!”

 

 새아버지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었다.

 

 정말 무성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누이는 소문 그대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린 애의 기세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포악한 기가 그대로 내게 꽂혔다. 등 뒤에 호랑이 셋은 너끈히 있는 듯한 새누이의 기백에 눈앞이 핑글 돌았다. 그리고는 세상이 암전됐다.

 

 정통으로 새누이의 분노를 여실히 맞은 나는 그날 까무룩 기절했다.

 

 새집에 들어온 첫날의 감상은 새누이를 만나고 나서 바뀌었다. 나는 새 방에서 눈을 뜬 후, 바로 도주 계획을 세웠다.

 

 이곳에 올 때, 제일 기대한 사람이 나를 지독하게 미워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는 괜히 온 게 틀림없었다.

 

 ‘분명 이곳에서 계속 지내다간 새누이에게 잡아 먹힐 거야!“

 

 그러나 그날 저녁 식사로 나온 밥을 먹으며 방에 깔린 솜이불의 촉감에 잠시 그 계획은 미뤄두기로 했다.

 

 그리고 새누이도 마른 나보다 살이 오동통 오른 내가 더 맛있지 않을까?

 

 당장 궁을 빠져나가는 것도 불가능하고, 이곳이 지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너무 성급한 생각이었다.

 

 절대 저녁 식사가 맛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는 새누이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래도 같은 집에 살다 보면 가끔가다 새누이를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참 곤혹스러운 상황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부분 새 아버지와 같이 있을 때, 혹은 연무장 앞에서 새누이를 만났다.

 

 그때마다 새누이는 새침데기처럼 고개를 돌리고는 내가 없는 척 굴었다. 그러다가 내가 인사라도 하기 위해 말이라도 걸면…….

 

 “저 누이…….”

 

 “누이라고 부르지 말거라! 나는 너 같은 동생을 둔 적이 없다!”

 

 그 쌀쌀맞고 냉랭한 태도에 속이 쓰렸다, 나라고 해서 그녀의 자리를 빼앗고 싶었던 건 아닌데. 조금만 상냥하게 대해주길 바라는 것도 사치인지 새누이는 절대 곁을 내주지 않았다.

 

 새누이가 저런 식으로 나올 때면 새 아버지는 그녀를 혼냈는데, 그럴수록 내게는 새누이의 적의만 돌아왔다.

 

 새 가족과 함께하는 나날은 내게 고달프기만 했다. 아무리 양부모님들이 잘 대해줘도 또래 친구 하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나이대가 비슷한 새누이조차 냉대만 하니 외로웠다.

 

 가족 간의 정을 느낄 시간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힘들구나…….

 

 더구나 가문의 검술 수련은 힘들기만 할 뿐 전혀 진전이 없었다.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벌레인 양, 버둥대다가 해가 저물면 어쩔 수 없이 훈련이 종료되었다.

 

 손가락의 뼈마디는 점점 굵어져 가고 물집이 잡힌 손에서는 피가 나고 아팠다. 날이 갈수록 힘들고 지치는 통에 울컥하고 치밀어 오를 때가 많았다.

 

 분명 훈풍이 도는 방은 따뜻했으나 그렇지 않다고 느껴진 날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솜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올렸다.

 

 익숙하지 않은 내 방은 쾌적했지만, 내 물건이 하나도 없는 방은 익숙하지도 않고 나만 겉도는 존재 같았다.

 

 마치 이 집에서의 나처럼.

 

 그리고 나서 결심했다. 앞으로 새아버지도 피해다기로! 아무리해도 늘지 않는 검술 따위 해봤자 뭐하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한 달이 딱 지난 시점에 새아버지께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새아버지께서 ‘한 달 동안 잘 쉬었냐.’고 물어보셨다.

 

 일부러 봐 주신 거였다…….

 

 오늘부터 가문의 검술을 직접 전수해주시기로 하셨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새누이와 마주칠 건 뭐람?

 

 어울리지 않는 낡은 목검이 새누이의 손에 들려 있었다.

 

 소녀의 눈이 내가 아닌 새아버지를 향했다

 

 부서지는 노을을 등지고 선 누이의 눈이 붉었다.

 

 그날은 온종일 누이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고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게 했다.

 

 나도 하고 싶지 않은데, 왜 누이는 나만 미워하는 거지? 그렇게 좋으면 누이가 하면 되잖아!

 

 나중에는 누이에 대한 원망만 쌓여가며 울음이 터졌다.

 

 

 *****

 

 

 오늘은 하루 종일 바빴다. 새 어머니, 아니 어머니와 함께 다과를 즐기다 아버지께 호출을 받아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대련하다 바로 바닥에 뻗어버렸다,

 

 나는 역시 재능이 없었다.

 

 아버지는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제일가는 무인. 그리고 그런 사람이 직접 가르치고 그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나라도 열심히 하다 보면 명성을 날리는 무인이 되는 건 아닐까 했는데….

 

 노력해도 늘지 않는 걸 붙잡고 있는 건 슬픈 일이란 걸 처음 깨달았다.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다 햇빛에 눈이 부셔 눈물이 더 났다.

 

 벌써 아버지께 직접 검술을 전수 받은 지도 다섯 달이나 지났는데 실력이 전혀 늘고 있지 않다.

 

 개인 연무장이 무색할 정도로 쓸데없이 넓기만 하고 내게는 너무 버거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외로워졌다.

 

 생각해보면 전에 살던 집은 좁고 동생들이 많아 힘들고 귀찮았어도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양부모님은 무척이나 살가우시지만, 외로움은 뼈에 사무치게 아프다는 사실도 처음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다시 도망갈까…?’

 

 이 정도면 나도 열심히 했잖아. 연습용 검을 연무장 한가운데 내 팽겨쳐 두고 빠져 나왔다.

 

 ‘그런데 왜 또 새누이가 여기 있어?’

 

 이상하게도 그녀는 연무장에 들어가지 않고, 검을 든 채 밖에서 무사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집의 고명딸이 와 있는데도 누구 하나 소녀에게 시선을 주거나 말을 거는 이 하나가 없었다.

 

 철저히 나눠진 세계처럼 그들은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새누이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들의 모습을 한참이나 새기고 있다가 그들의 연습이 끝나고 나서야 사라졌다.

 

 “또 오셨어.”

 

 “그러게, 이제 좀 포기하실 때 되지 않으셨나?”

 

 “여인이 검을 배워서 무얼 하겠다고? 검 때문에 손이라도 망가지면 부엌데기 종인지 아씨인지도 모를 텐데.”

 

 “그래도 나는 좀 짠하던데, 이 정도까지 하면은 나 같으면 대충 배우는 시늉이라도 흉내 내게 해주겠다.”

 

 그날부터였다. 새누이를 피해 도망쳐 다니던 내가 오히려 새누이의 흔적을 따라다니게 된 것은.

 

 정말 단순한 계기였다.

 

 왜 당신은 내가 놓으려 하는 것을 놓지 못하는 걸까? 그게 당신에게 왜 중요한 거지?

 

 그 단순한 의문은 내게 있어 처음으로 새누이를 향한 다른 감정을 품게 했다.

 

 그건 ‘미안함’이었다.

 

 내가 새누이 뒤를 밟은 지 겨우 며칠 지났을 무렵, 빨래하러 지나가는 종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우리 아씨는 왜 쓸데없는 짓을 포기 못 하시는지. 다른 규수들처럼 얌전히 자수나 놓으면 좋을 텐데.”

 

 “그나저나 가문은 한이 도련님이 이으시겠지?

 

 “그렇겠지? 아무리 그래도 무가의 가주가 여인이라니 멋도 안 살잖아.”

 

 “그럼. 이제 한이 도련님한테 잘 보여야 하는 거 아니야?”

 

 “쯧, 그래도 우리 아씨 안됐어. 주인님께 인정받겠다고 매일 쉬지 않고 연습하셨는데……. 그게 다 헛수고가 됐으니.”

 

 대개 누이를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를 제지하거나 입방정 떨지 마라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누이조차,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낡은 목검을 손에 꼭 쥐고 기둥 뒤에 숨어서 그들의 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릴 때부터 온갖 소문에 둘러싸이며 살아온 새누이.

 

 소녀가 검을 드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이 이 가문의 진정한 직계이며 유일한 친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걸, 내가 하루아침에 빼앗아버렸다.

 

 그것도 친자식도 아니며 검술에 재능이라곤 하나도 없는 내가 새누이의 수년간의 노력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그러니 미워할 수밖에 없지……. 게다가 나. 도망치기까지 했는걸.’

 

 가서 저들에게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으름장이라도 놓아야 할까? 하지만 그랬다가 새누이의 입지가 더 좁아지면 어떡하지?

 

 내가 나설지 말지 망설이는 사이, 목검을 품에 끌어안은 누이가 연무장으로 뛰었다. 나도 황급히 그녀를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아무도 없을 시간인데? 왜……? 아!’

 

 아무도 없는 연무장에서 소녀가 목검을 휘둘렀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소녀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도 예리한 궤적이 허공을 유려하게 수놓았다.

 

 소녀의 자태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간혹 잘 모르는 구간에서는 목검이 멈추기도 했지만, 그 정도면 누가 봐도 수재였다.

 

 “멋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소녀가 몸을 돌리며 목검을 회전시키는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앗! 누…누님!”

 

 내 목소리에 검을 아래로 내린 소녀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왜 너도 내가 연무장에 오는 게 마음에 안 드느냐? 벌써부터 네가 가문의 윗사람인 줄 알고 나를 가르치려 드는구나.”

 

 소녀가 표독스럽게 눈꼬리를 추어 올렸다.

 

 “근래 나를 따라다닌 것도 그래서냐!”

 

 “그… 그런 게 아니라!”

 

 새누이 앞에서만 서면 자꾸 심장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핑핑 돈다. 열이 오르는 것도 같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횡설수설하게만 된다.

 

 “저…!”

 

 갑자기 새누이가 내게로 손을 뻗었다. 드디어 한 대 치려는 걸까? 내가 그녀의 자리를 빼앗아서?

 

 시원한 바람처럼 혹은 나무 밑 그늘처럼 서늘한 손이 이마에 닿았다.

 

 “…너! 이렇게 될…!”

 

 “예? 뭐라고 하시는…”

 

 한계까지 열이 몰린 머리가 뜨거웠다. 잘 익은 홍시처럼 달아오른 볼이 느껴졌다.

 

 ‘몰라, 어지러워!’

 

 “…얘! 정신 차려!”

 

 

 *****

 

 

 “심신의 무리와 급격하게 몰린 피로 탓에 잠시 열이 올랐던 모양입니다. 그리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풀썩 쓰러졌다.”

 

 “약을 달여 먹이시고 당분간 힘쓰는 일은 안 하게 두시면 괜찮습니다.”

 

 “알겠소. 갑자기 불러냈는데도 와주어서 고맙소.”

 

 드르륵.

 

 의원이 돌아갔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옆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조금씩 허기가 밀려왔다.

 

 정말 이상했다. 그렇게나 다정하고 친절하시던 새아버지도 새어머니도 자신이 아픈 걸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나를 그렇게나 미워하던 새누이만이 내가 아픈 단 걸 알았다.

 

 “저…….”

 

 “갑…자기 왜 우느냐!”

 

 “그냥 눈물이 납니다.”

 

 “사내 녀석이 뚝 그치지 못하냐! 그러지 말고 일어나서 이거나 먹거라!”

 

 “이건… 죽인가요?”

 

 “그래.”

 

 “근데 왜 고기 밖에 없죠?”

 

 “원래 어린애가 기운이 없을 때는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그랬다…….”

 

 ‘그래도 이건 쌀 반 고기 반인데요. 더구나 다른 야채 같은 건 하나도 안 보여…….’

 

 새누이가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새누이의 정성을 보아 한 숟갈 떠 입에 넣어 보았다.

 

 “맛없어……”

 

 “…….”

 

 “저… 누이가 싫으시면… 누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 말에 벌떡 일어난 새누이가 문 쪽으로 향하고는 탁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는 나가버렸다.

 

 나는 순 고기만 있는 무슨 맛인지 모를 죽이 뭐가 맛있는지 실실 웃음이 났다.

 

 누이가 고양이처럼 날을 세우는 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헤헤. 누님…….”

 

 언젠가 내가 검술을 잘하게 되면 누이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러면 그때는 당당하게 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사실 누이가 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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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1장 야월취화(夜月取花) 14화 어머니의 서간… 2020 / 8 / 19 247 0 6203   
13 제1장 야월취화(夜月取花) - 13화 수일과의 만… 2020 / 8 / 19 249 0 6133   
12 제1장 야월취화(夜月取花) - 12화 서라벌을 떠… 2020 / 8 / 19 240 0 7428   
11 제1장 야월취화(夜月取花) - 11화 서라벌을 떠… 2020 / 8 / 19 251 0 6715   
10 제1장 야월취화(夜月取花) - 10화 방이 붙다. 2020 / 8 / 19 244 0 6311   
9 제1장 야월취화(夜月取花) - 9화 격동(激動) (2) 2020 / 8 / 19 237 0 5984   
8 제1장 야월취화(夜月取花) - 8화 격동(激動) (1) 2020 / 8 / 19 246 0 6222   
7 제1장 야월취화(夜月取花) - 7화 주령의 등장(2 2020 / 8 / 19 240 0 6753   
6 제1장 야월취화(夜月取花) - 6화 주령의 등장(1 2020 / 8 / 19 248 0 6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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