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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야월취화(.夜月取花)
작가 : 소월혜
작품등록일 : 2020.8.19

호적에 이름은 올라와 있으나, 가문의 성을 물려받지 못한 아이.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불로 취하지 못한 꽃이 아니라 달이다. 그 누구도 취하지 못하는 달이 될 거다.” 무가의 장녀로 태어난 연은 혼인을 앞두고 살수의 습격을 받는다. 죽음의 위기 속, 신이한 힘을 발현한 연의 앞으로 한 사내가 나타나는데…. 통일 신라 말, 7명의 도깨비를 만든 여인의 이야기.

 
제1장 야월취화(夜月取花) - 12화 서라벌을 떠나다 (2)
작성일 : 20-08-19 02:40     조회 : 232     추천 : 0     분량 : 7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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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야월취화(夜月取花) - 12화 서라벌을 떠나다 (2)

 

 

 “그게…….”

 

 주령이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시간을 끌자 병사들의 눈초리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러고 보니 개똥이 당신은 왜 검을 차고 있는 거요? 게다가 손을 보니까 한두 번 잡아본 솜씨도 아닌 것 같은데 혹 무인이요?”

 

 우리에게로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에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의혹으로 빛나는 안광이 심하게 번들거렸다. 병사는 내심 우리가 방에 적힌 수배자들이기를 기대하는 낯빛이었다.

 

 그야, 포상금이 엄청나니까.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여동생이 아파 적적한 곳에서 휴양하려는데, 요즘 세상이 흉흉하지 않소. 배가 고파 제 자식도 노비로 팔아넘기는 세상이니 말이니 불안해서 말이지.”

 

 “그래서 형님이 어린 동생들을 지켜주려고 우리 몰래 검 연습을 하고 있어요. 아저씨들 우리 형님, 정말 멋있지 않아요?”

 

 처음으로 주령이 결을 칭찬했다. 그러나 결의 표정은 달갑지 않고 사납기만 했다.

 

 마치, 이 녀석이 또 무슨 꿍꿍이지 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워낙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라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동생이랑 사이가 좋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둘이 착착 말을 주고받으니까 더 그래 보이기도 하고.

 

 곧 둘에게서 아무것도 얻어 낼 수 없다는 걸 느낀 병사가 목표를 나로 바꾸었다.

 

 “거기 그쪽도 모포 좀 벗어 주시겠소?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신원을 확인하기 어렵지 않소?”

 

 “…….”

 

 한껏 내리깐 목소리가 나를 향했다. 그러나 결보다는 낮지 않았다. 병사의 목소리가 둔중한 느낌이라면 결의 목소리는 수마를 부르는 고요한 한밤의 어둠을 배어둔 듯했다.

 

 내가 모포를 벗지 않고 미적거리자 이상한 낌새를 느낀 병사가 내 모포를 하늘로 거의 던지다시피 벗겨냈다.

 

 “실례하오!”

 

 모포를 따라 올라간 검은 머리칼이 너저분하게 나부끼다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세상에 드러난 내 얼굴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입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다.

 

 “아니-!”

 

 병사가 나를 향해 믿을 수 없다는 듯 삿대질을 했다. 나는 성문 앞을 가득 메우는 아연실색한 탄성에 눈을 감고 차분히 내게 내려질 처분을 기다렸다.

 

 “어떻게 저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다른 병사가 내 모포를 벗긴 병사의 머리를 꽝 내려치며 탄식했다.

 

 “어서 빨리 사과해.”

 

 “미… 미안하게 됐소.”

 

 “……괜찮습니다.”

 

 지금 내 얼굴은 주령이 가져온 분장 도구들로 원래의 얼굴을 거의 가린 상태였다.

 

 뻣뻣하고 거친 피부 위로 두꺼비의 등가죽처럼 오돌토돌하게 올라온 가짜 수포가 보였다. 상처가 곪은 것 같은 모습은 누구라도 가까이하기 싫을 터였다.

 

 부러 바닥에 떨어진 모포를 바로 잡지 않고 그 위를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다.

 

 내 모습에 미안함을 느낀 병사가 직접 내 모포를 주워 내 손에 들려주었다. 나는 그에게 가볍게 묵례하고는 바로 모포를 뒤집어썼다.

 

 우리를 향한 적대적인 기세는 한층 누그러졌지만, 그렇다고 검문이 끝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우리는 그들에게 대답 하나 바로 하지 못하는 수상한 자들이었고, 임기응변에 능한 주령이 능구렁이 같은 말 주변으로 그들의 정신을 빼놓아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주령이 말을 돌리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더 한 질문이 들어오거나 아까의 질문이 다시 돌아올 터였다.

 

 그러면 전면전을 피하는 건 어렵겠지.

 

 결도 그걸 아는지 슬금슬금 허리춤에 찬 검 쪽으로 오른팔을 옮기고 있었다. 정 안되면 정면 돌파라도 하려는지 왼손으로는 주변의 말을 세는 중이었다.

 

 성곽에서 정면 돌파라니 미치지 않고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런데도 결은 안면 하나 변하지 않고 성곽을 둘러싼 인력을 셈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지 않은 입가가 자신이라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건 결이 주령을 빼고 도출한 결과처럼 보였다.

 

 내가 볼 때, 주령은 말 한번 타 본 적이 없을 게 분명했다.

 

 그 애 말로는 자신이 주령구라고 했으니까. 어쩌면 결은 주령을 아예 먹이로 던져 주고 도망치려는 걸지도 몰랐다.

 

 ‘주령은 인간이 아니니까 결처럼 쉽게 잡히지 않을 테고 시간을 끄는 용으로 좋겠지.’

 

 허, 아무리 주령이 이름을 두고 장난을 쳤다지만, 이건 너무 하잖아! 내가 결의 소맷자락을 세게 잡아당겼다.

 

 그는 내가 불안해서 자기 옷자락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거친 손으로 내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다 괜찮을 거다.”

 

 ‘뭐가 괜찮은데! 이 자식아!’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겨우 내리 삼켰다. 병사들이 우리를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는 만큼 최대한 소란을 일으키면 안 되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살짝, 그의 정강이를 차 주려다 수도로 입성하는 수레를 보고는 멈추었다.

 

 수레를 꽉 채운 포댓자루 더미에는 곡식이 들어 있는지 자꾸 주변으로 참새가 꼬여 들었다. 나는 그 틈에 허리가 아픈 척 몸을 수그리고는 남몰래 돌멩이 하나를 집었다.

 

 이걸로 말의 다리를 치면 큰 소란이 일지 않을까? 그사이에 빠져나간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스스로 묻고 답하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계속 떠올렸다.

 

 병사들의 질문에 쩔쩔매며 답하고 있는 주령이 보였다, 다 큰 형 누나가 아니라 어린 동생이 모든 질문에 답하는 것을 보며 서서히 의혹이 불거져 가는 상황에 병사들이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시간이 없음을 직감한 내가 물수제비를 뜨듯 돌멩이를 낮게 던졌다.

 

 ‘이판사판이다!’

 

 돌멩이를 무릎에 정통으로 맞은 말이 히잉 하고 울며 몸부림을 쳤다. 말을 잡고 있던 마부가 당황해 말을 진정시키려 고삐를 끌었으나, 이번엔 수레에 쌓인 포대 자루가 차례대로 터지며 바닥 전체가 쌀과 보리들로 뒤덮였다.

 

 “아이고, 이를 어째!”

 

  “어……?”

 

 이렇게까지 할 의도는 없었는데…. 기가 막힌 때에 포댓자루가 터지면서 성문 앞이 난장판이 되었다. 마부가 곡소리를 내며 황급히 바닥에 쏟아진 곡식들을 주워 담으려 양팔을 뻗었다.

 

 그러나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낱알들을 모으기란 모래사장에서 모래알 세기랑 똑같았다. 어질러진 바닥을 보며 병사들이 한숨을 쉬고는 마부를 도와 곡식을 치워 나갔다.

 

 결은 내가 한 거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아니라는 뜻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이자, 그가 알았다고 눈짓으로 답했다. 그러고는 곡식 포대의 찢어진 부분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내가 봐도 큰 충격을 받아 포댓자루가 터진 거라고 보기에는 찢어진 부분이 너무 오차 하나 없이 일정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포대를 찢을 만한 물건은 발견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우리를 도와주려는 걸까?”

 

 “글쎄. 적어도 방해하려는 건 아닌 거 같군.”

 

 “둘이서만 얘기하지 말고 나도 끼워줘!”

 

 주령이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려 제자리에서 뛰었다. 하는 수 없이 결이 주령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불쑥 들어 올렸다.

 

 “와! 높다. 안녕, 누님!”

 

 시선이 부딪히는 곳까지 올라온 주령이 나랑 눈이 마주치자 천연덕스럽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우리는 포댓자루를 터뜨린 사람으로 예상되는 이가 있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들 오늘 수도를 오가는 건 글렀다며 눈물을 훔치는 중이었다.

 

 저들도 각기 제 사정이 있을 텐데 내가 방해한 느낌이라 어쩐지 미안했다.

 

 나는 속으로 그들에게 사과하며 다시 누군가를 애타게 찾았지만, 그로 예상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주령은 그 사이에 검문하던 병사에게 오늘은 꼭 나가야 한다며 글썽거렸다.

 

 아이의 눈물에 난감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병사의 뒤로 그와 교대하러 온 다른 병사가 넌지시 말했다.

 

 “이 애들 말이야. 왜, 전에 내가 말했던 그 아내가 죽고 미쳤다는 그놈 애들인가 봐.”

 

 “그래서 제 누이가 죽을까 걱정되어 아비 몰래 도망가는 모양인데… 사정도 딱하니 좀 봐줘…….”

 

 “아무리 그래도…….”

 

 “장적에 다 표시할 건데 뭐 문제 있겠어?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게.”

 

 “그 말 정말이지.”

 

 “그럼.”

 

 교대하러 온 병사에게 확답을 받아낸 그가 우리에게 얼른 가라는 시늉을 취했다. 어쩐지 일이 쉽게 풀려 찜찜한 기분이 들었으나, 나는 우리를 도와준 병사에게 정식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가 사람 좋게 웃으며 어서 지나가라고 손짓했다.

 

 앞으로 다섯 발짝, 다섯 발짝이면 성문 밖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서라벌의 풍경을 담기 위해 뒤를 돌았다.

 

 저 멀리 수도를 지키고 선 황룡사 9층 목탑이 장엄한 위상을 떨치고, 그 밑으로 가을 하늘 아래 황금빛 밀밭처럼 펼쳐진 금입택(金入宅, 금을 입힌 집으로 귀족들이 부를 자랑하기 위한 집이었다.) 사이에 들어찬 기와집이 푸른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공활한 푸른 하늘 아래 땅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을 닮은 나의 고향, 서라벌.

 

 “안녕…….”

 

 나는 닫히는 성문 사이로 보이는 서라벌을 향해 나지막이 작별을 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사실 서라벌이 아닌, 지금까지 귀족으로 살아 온 자신에게 고별을 보낸 걸지도 모르겠다. 이후로 약관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그대로였으니까.

 

 

 성벽 위, 연의 무리가 수도를 떠나는 걸 지켜보는 인영이 하나가 손에 들린 작은 비수를 들고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성문을 닫아라. 오늘 검문은 여기까지다.”

 

 그의 손목에서 나뭇잎 모양의 옥장식이 달린 오래된 팔찌 하나가 찬란하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 옅은 빛을 냈다.

 

 

 *****

 

 

 왕의 침전, 이랑이 돌아가고 난 후.

 

 

 “그래, 엽아. 대장군과 해후는 하였느냐?

 

 “폐하의 명대로 처리하였습니다.”

 

 “그래? 그럼 걱정할 일은 없겠구나.”

 

 공대하고 있으나 말투는 무척이나 사무적이었다. 반사적으로 흘러나오는 말처럼.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향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무감각하다고 느낄 정도로 고조 없는 얼굴.

 

 하지만, 왕은 엽의 그런 태도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자신의 상전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배신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엽은 그가 부리는 그림자 중, 제일 쓸 만한 말이자, 제일 부리기 쉬운 말이었다.

 

 그가 엽을 자신의 그림자 중, 최고 책임자로 선택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원한다면 시위부를 부릴 수도 있는 지위도 주었건만, 엽은 분수에 넘치는 일은 자초하지도 않았다.

 

 ‘옛 선조들의 지혜도 꽤 쓸 만은 하단 말이야.’

 

 왕은 자신의 선택이 만족스러워 느릿하게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가 그림자를 둔 이유도 선왕 중에 자신처럼 그림자를 두어 난을 막아낸 전적이 자못 있어서였다.

 

 아무리 장군의 직위와 금군을 제 사람으로 채운다 해도 그중에 미꾸라지 하나가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방비책을 세우는 수밖에. 그는 곧바로 은밀하게 자신을 지킬 새로운 친위대인 ‘그림자’를 만들었다.

 

 가혹한 시험에 통과한 자들로만 구성된 그림자 집단은 그가 손수 엄선한 이들로 이루어진, 총 17명의 친위대였다.

 

 혼자서 거뜬히 스무 명의 장정을 무기 하나 없이 쓰러뜨릴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은 그들은 시위부와 사자대에 비하면 무척이나 적은 수의 집단이었지만, 실력은 월등히 압도했다.

 

 “그런데……. 대장군이 마신 술뿐만이 아니라 모든 청주에 수면제와 독이 섞여 있던 모양입니다.”

 

 “쯧, 제 명을 재촉하는군. 지금은 그만한 인사가 없으니 일단은 죽이지 말고 지켜 보거라.”

 

 “존명을 받듭니다.”

 

 엽이 왕을 향해 무릎을 꿇고 검을 세웠다. 왕은 그런 엽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생각에 몰두했다.

 

 “내가 후원에 꽃이 부족한 듯하여, 정좌가 있는 못에 두고 기리기리 두고 볼 테니 물가에 피는 꽃 하나만 선물해 달라는 이야기에 대장군의 얼굴이 사색이 되더구나! 그 고지식한 얼굴이 금이 간 건 처음이라 나름 재미는 있었어. 물론 계보에 이름을 올리자마 바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몹시 불쾌하다는 듯 그의 눈가가 한 번 씰룩였다.

 

 “세화 부인도 말이야. 제가 그렇게도 혐오하던 인간의 자식과 임시방편으로나마 혼약을 맺는 법을 택하다니 기세가 드높다 해야 할지, 부처 같은 마음씨라 해야 할지.”

 

 혼잣말을 내뱉으며 생각을 정리하던 왕의 얼굴이 와락 으등그러졌다.

 

 “간덩이가 부은 게지.”

 

 어둠 속에서 안광이 번쩍인다. 왕은 몸에 묻은 먼지를 터는 것인 양 손목을 털었다.

 

 “왕가의 계보에 아이의 이름을 올리지 않을 테니, 왕실과는 상관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했지. 총명하게 키운들, 종내에는 왕위 다툼에 휘말려 무력하게 쓰러져 갈 목숨이라는 걸 알아서 일부러 아둔하다는 추문까지 내며 금지옥엽 키우더구나.”

 

 왕은 과거 자신을 찾아와 고개를 숙이던 여인을 떠올렸다. 한 떨기 배꽃처럼 가련하고 정순한 태도에 얼어붙었던 그의 마음이 봄볕처럼 녹녹하게 녹아내렸다.

 

 당초,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들의 지지가 큰 역할을 했다는 건 자타가 공인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 정도 아량 정도야 베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둘까도 했더니만, 이상한 소문이 돌지 않더냐.”

 

 ‘대장군의 여식이 무예를 배운다는 소문이.’

 

 “내 그동안 궁 안에서 감시당하는 걸 알면서도 쥐 죽은 듯이 살기에 내 나름 어엿비 여겼거늘. 굳이 관직에도 나가지 못할 여인에게 무예를 가르치는 연유는 무엇이며 배울 필요도 없는 바둑을 가르치는 이유가 뭐란 말이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고서는 그럴 리가 없지. 왕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또한 난으로 왕좌를 평정한 사람이었기에 작은 의심의 싹도 놓칠 수 없었다.

 기르는 개가 자신의 목덜미를 물지 못 하도록.

 

 “소란을 일으켜 준 덕분에 내 그림자들이 무사히 증좌를 찾아올 수 있었다지만, 설마 어린 계집이 혈혈단신으로 상대등의 집을 쳐들어갈 줄이야!”

 

 우악스럽게 침상의 난간을 잡았던 손이 느슨해지며 배부른 짐승 같은 목소리가 그에게서 나왔다.

 

 “상이 녀석이 이번에 일을 기특하게 잘 해줬어. 상대등이 빼돌린 쪽지를 연이 그 계집아이에게 직접 전해줬다지? 돌아오면 네 옆자리를 주거라”

 

 “예.”

 

 “덕분에 일거양득이구나. 대장군의 여식에게는 그만한 상을 줘야겠지.”

 

 “만약 수도를 빠져 나가려 하거든, 도와주거라.”

 

 엽이 답지 않게 의외라는 듯 고개를 치켜들자 왕이 박장대소했다.

 

 “우리 엽이가 많이 놀랐나 보구나. 그야 당연히 우리 새 병부령을 위해서거늘. 도련님에게도 목표가 있어야 열심히 일하지 않겠느냐?

 

 그가 넌지시 엽에게 물었으나, 엽은 조용히 부동의 자세로 왕을 향해 예를 취할 뿐이었다.

 

 “이제 남은 건 형님이 그 물건을 어디로 빼돌렸냐는 건데?”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하나씩 정리하고 해결해 나갈 때마다 그의 손안에서 옥새가 주사위 장난감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옥새를 저리 다룰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오로지 저분뿐 일거다.’

 

 무료(無聊)에서 벗어난 눈이 흥미로 번들거리는 모습에 엽이 눈을 내리 깔았다. 지금 그가 돌리고 있는 옥새가 자신이 생각하는 누군가의 대신은 아니기를 바라며.

 

 

 *****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거라. 연아…….”

 

 성벽 위에 서 있던 사내가 쓰고 남은 비수를 집어넣었다. 그의 허리에서 친위대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황금빛 대가 휘날렸다.

 

 그는 연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셔야 자리를 떴다.

 

 연은 뒤통수를 당기는 집요한 시선에 돌연 가던 길을 멈추고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보초를 선 병사들 말고는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이었나? 누군가가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누님, 갑자기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잘못 봤나 봐.”

 

 연은 결국,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인영을 발견하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둘 사이를 교묘하게 가린 정오의 빛줄기가 눈을 따갑게 찌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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