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야월취화(夜月取花) - 11화 서라벌을 떠나다 (1)
“……글쎄? 사실 나도 잘 몰라!”
잠시, 숨 쉬는 것도 잊고 뜸을 들이던 아이가 무안한지 볼을 긁으며 낙천적인 말투로 말했다.
“우선 눈을 뜨니까 누님이 보였고, 그전에도 언뜻 인간들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누님의 소리가 제일 컸다는 것 정도?”
나름 무게를 잡고 물어본 말이었는데, 왜 자신이 나타났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왠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목소리의 주인인 누님이 궁금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님이 화가 나서 격정적으로 외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내 이름을 불러줘!’ 라고 외쳤는데 누님이 못 들었는지 안 불러줘서…….”
주령이 손가락을 꼬며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폈다.
“헤헤, 조금 장난을 치니까, 그제야 누님이 내 이름을 불러줬어! 그러니까 무슨 힘이 나한테 흘러들어 오면서 빛이 나더니 내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됐지 뭐야!”
손짓, 발짓까지 다 써가며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려 애썼지만, 나는 오리무중이었다.
주령구에 빛이 이는 건 나도 보기는 했지만, 내가 힘을 불어넣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었다. 결도 처음 나타났을 때, 그런 소리는 안 했고.
애초에 나한테 그런 힘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사람을 만들어 낸단 말인가?
‘아니, 사람이 아니었던가?’
나는 물끄러미 주령이 하는 행동을 주시했다. 그러자 내 시선을 눈치 챈 주령이 기세 좋게 자기 꼬치를 내밀었다.
“누님, 더 먹고 싶어서 그래? 그럼 내 것도 먹어.”
얼떨떨한 얼굴로 반강제로 주령에게서 꼬치를 받았다. 이게 아닌데? 내가 원한 건? 나는 손에 들린 꼬치와 주령을 번갈아 가 보며 내가 원하는 바는 이게 아니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주령은 알아듣지 못했다. 오히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닭꼬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고인 침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아서 얌전히 주령의 손에 다시 꼬치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주령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남은 닭고기를 삼켰다. 그럴 거면 왜 준거지?
“으아! 진짜 맛있다!”
“반응을 보면 역시 그냥 평범한 어린애 같은데…….”
“응?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누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었다고 대충 둘러대니 주령이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그러더니 무언가 잊고 있다 기억난 사람처럼 내게 삿대질을 하며 ‘아!’라고 소리쳤다.
“아-! 그리고 보니 누님! 그때 뭘 그렇게 세게 잡았어! 솔직히 답답하고 아팠단 말이야!”
“음…? 주령구 잡았을 때 말하는 거야?”
“그래! 나 진짜 아팠다니까!”
아이가 자신이 느꼈던 아픔을 내게 피력했다. 그제야 나는 주령이 진짜로 주령구에서 나온 존재라는 걸 실감했다.
은장도에서 이어서 주령구라니. 대체 앞으로 뭐가 어떻게 돼 가려고 이러는 걸까? 은근히 걱정이 됐다.
주령은 그런 내 속마음도 모르고 부루퉁한 얼굴로 투정을 부렸다.
복어처럼 부풀어 오른 볼이 통통했는데 왠지 말랑하고 푹신할 것 같아, 검지로 톡 건드리니 피식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볼이 금세 원래 크기로 줄어들었다.
문제는 그와 동시에 그만 주령이 토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이가 울상을 지으며 울먹거렸다.
“힝, 누님 너무해.”
“미안해, 다음엔 안 그럴게. 귀여워서 그랬어.”
“……정말?”
“그럼!”
내가 웃으며 주령의 양 볼을 잡고 말하자 아이는 진심으로 화났던 게 아니었는지 나를 따라 배시시 웃었다. 나는 이어서 궁금했던 질문을 마저 했다.
“그럼, 내가 방 앞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누님 기는 딱 봐도 다른 인간들이랑 다르거든. 그런데 결이 형님은 그걸 모르더라, 누님 기도 못 읽고. 왜지? 나는 형님한테도 누님의 기운이 나길래 누님이 만들었다고 생각했거든.”
그 말에 더 아리송해졌다. 주령의 말에 의하면 결도 내가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은 전에 내가 어릴 때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럼 내가 어릴 때부터 자아가 있었다는 말인데, 그는 한 번도 지금의 모습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만든 게 아니란 소리 아닐까?
하지만 만약, 내가 만든 게 맞다면… 이들이 만들어지는 기준은 대체 뭐지?
내가 그들의 존재와 정체로 골머리를 앓는 동안, 기다리던 결이 왔다.
결은 부러진 검 대신 새 검을 차고 식자재를 들고 왔는데, 오면서 누군가 따라붙은 사람이 없나 거듭 확인했다.
주변이 안전하다고 생각되자 우리 쪽으로 자리를 옮긴 결이 주령이 들고 온 도롱이(우의)를 보고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너 설마, 지금 연이한테 그런 우의를 입히려고 가져온 거냐?
“왜 다들 이거 입고 다니는데. 뭐가 어때서?”
뭐가 문제냐고 묻는 주령의 말의 대놓고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낸 결이 다시 짐을 꾸리고 나섰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전후 사정없이 그렇게만 말하고 떠나간 결은 정확히 일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전에는 없던 물건을 가지고. 그가 들고 온 건 꽃무늬가 화려한 도화 빛 우산이었다.
“형님, 우산은 어디서 구한거야? 아니, 이게 아니지! 우산은 저 위에 계신 분들만 쓰고 다니는 거라고, 그런 거 쓰고 다니다 병사들한테 검문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나는 연이가 저런 이상한 우의 입고 다니는 꼴은 못 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주령은 내가 도롱이를 입어야 하는 10가지 이유를 들어 결을 설득하려 들었다.
결은 하나하나 요목조목 따져가며 말하는 주령의 말이 귀찮을 법도 한데, 그런 기색 하나 비치지 않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경청하는 자세를 보였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말에 수긍하기도 했지만, 그의 결론은 그대로였다.
어찌 보면 미련할 정도로 강경한 결의 태도에 주령이 답답한 나머지 ‘으아아아’ 소리를 내 질렀다. 하지만, 나는 결이 왜 내게 도롱이를 입히기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아 내심 그에게 고마웠다.
귀족으로 살아왔을 내가 도롱이를 입는 일에 익숙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입히기 싫은 척 미리 선수 쳐 내가 눈치 보지 않도록 하는 걸 거였다. 결은 보기에는 무뚝뚝해도 은근히 세심한 구석이 있으니까.
“결, 신경써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제, 이런 거 하나에도 익숙해져야 하잖아.”
어설픈 솜씨로 도롱이를 입고 밝게 웃으니 결이 있는 대로 얼굴을 다 구겼다. 그 탓에 잘생긴 얼굴이 뿔난 황소 같았다.
그가 내가 입고 있는 도롱이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며 무리는 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덕분에 울적했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어라? 연이 누님 귀족이었어? 아! 왜 때려, 형님!”
“네놈은 말이 너무 많은 게 탈이야.”
결에게 딱밤을 맞은 주령이 울상을 지으며 내 뒤로 숨었다.
그리고는 나를 방패삼아 결에게 메롱 거리며 그를 약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 주령의 행동에 결의 웃음이 응달이 진 것처럼 짙어졌다.
분명 입가는 웃고 있는데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그의 등 뒤에서 넘실넘실 풍기는 음산한 기에 내가 둘 사이로 끼어들며 외쳤다.
“그만, 그만!”
내 외침에 둘이 하던 행동을 고대로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주령은 메롱 하는 자세였고 결은 이맛살을 구기고 있는 채였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서둘러 우리가 원래 나눴어야 할 화제를 꺼냈다.
“여기 누구, 새 패를 구하거나 수일 장군님의 정보를 찾은 사람 있어?”
“나! 나! 나!”
주령이 신이 나 팔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러더니 결을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은 분하다는 얼굴로 눈을 감으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나는 둘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짚었다.
정보야 많을수록 좋은 건데, 너네는 왜 그런 걸로 경쟁하니…….
하……. 앞으로의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내 우려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일이 생겼다. 바로 주령이 우리 둘이서 사흘 내내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단숨에 해결해버린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내일 도성을 떠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나무로 된 패 세 개가 각각 우리 손에 쥐어졌다. 이름이 비슷한 걸 보아 형제나 가족 구성원의 것으로 보였다.
주령에게 어디서 구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묻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술렁이는 불안을 잠재우며 주령에게 다른 걸 물었다.
“혹시 내가 사 오라고 했던 건 사 왔니?”
“그럼! 누구 부탁인데 좀 애는 먹었지만, 제대로 구해왔어! 근데 이건 어디다 쓰려고? 당장 갈아입기라도 하려는 거야?
“아니. 우선은 짐 안쪽에 잘 안 보이도록 숨겨줄래?”
“응!”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짐 속에 내가 말한 물건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나는 서라벌을 덮는 습윤한 물안개 속에서 서서히 서편 하늘에 깔리는 낙조를 보며 다짐했다.
내일 서라벌을 떠난다.
*****
북쪽 성문 앞
우리는 고심 끝에 북쪽 성문을 통해 수도를 벗어나기로 했다. 주령이 찾아온 정보에 의하면 최근 수일 장군은 장군직을 내려놓고 고향인 상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상주로 가 수일 장군을 만난 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건지 의논하기로 했다.
북쪽 성문의 왼편으로는 수도로 입성하는 자들이 줄지어 서 있고, 오른편으로는 수도를 나가는 이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성으로 들어오는 공납품을 실은 수레와 마차가 보였다.
성문을 지키고 선 병사들이 수도를 오가는 이들을 엄중하게 확인했다. 패로 신분을 확인하고 나면 본인이 맞는지 간단한 질문이 이어졌다.
여기까지 무사히 질문을 통과하면 대충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이유로 가는지, 혹은 아예 지역을 옮기는 건지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서적에 방금 얻은 정보를 적어 내렸는데, 내용이 아주 빼곡하게 적혀 있는 듯했다. 잠깐, 빼곡하다고?
“아뿔사!”
“무슨 일이야.”
“누님, 무슨 일인데!”
둘이 동시에 외치며 내가 무사한지부터 살폈다.
“저건 장적(帳籍)이야. 보통 3년마다 새로 작성하는 건데…….”
하필 지금이 그 3년이라고? 아무리 가는 날이 장날이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내가 억울한 마음에 하늘을 째려보고 있으니까, 주령이 불안한 빛을 띠며 나를 재촉했다.
“대체 장적이 뭔데 그래!?”
‘무서운 거야?’ 라고 작게 덧붙인 주령이 내 팔에 매달렸다.
“나라에서 조세를 걷기 위해서 지역의 인구 수, 가축의 수, 호구를 조사해 적어 놓은 장부를 말하는 거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주령을 쳐다보며 물었다.
“주령아, 네가 가져온 패… 누구네 집안인지 설명할 수 있는 거야……?”
“그…게…. 미안, 누님.”
“엎친 데 덥친 격이로군.”
주령의 빠른 시인에 눈앞이 암담해졌다. 아니야, 어떻게 보면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셋이서 말을 맞춰서 성문을 넘어가기만 하면 돼.
내가 입술을 집 씻고 있자 주령이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속상한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모양새가 한을 닮아서 더 마음이 쓰였다.
한에게 해 주지 못한 만큼 주령에게라도 잘 대해주고 싶었는데…….
나는 쓸데없는 발언을 한 결의 팔을 찰싹 때렸다. 결이 ‘왜 나를?’ 하는 얼굴로 쳐다봤지만, 모른 척하고 일단은 풀 죽은 주령부터 달래기 시작했다.
“아냐, 잘못 했다는 게 아니야. 네가 아니었으면 지금 여기에 서 있지도 못 했는걸.”
나는 주령의 키에 맞게 몸을 낮추고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누님……!”
내 말에 감동한 주령이 내 품으로 뛰어들었으나, 바로 결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목덜미를 잡힌 주령이 그를 향해 입을 샐쭉거렸으나, 결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쳤다.
“아니, 얘들아. 우리 지금 무척 심각한 상황이라니까. 그것부터 같이 생각해줄래?”
앞으로 둘. 둘의 검문이 끝나면 우리 차례였다. 지금은 서로 으르렁거릴 때가 아니라 같이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계책을 떠올려야 할 때였다.
내 말에 턱을 괴며 고민을 하던 주령이 이내 검지를 들고 발랄하게 외쳤다.
“응, 그러니까… 만약 누구네 집안이냐고 물어보면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유도하는 식으로 가면 어떨까! 아니면 아저씨들의 뒷주머니를 살짝 채워 주는 식으로….”
“대역 죄인이 둘이나 되는데, 퍽 그게 통하겠군.”
“우 씨, 그러면 형님이 질문에 다 답하든가! 아, 형님 말솜씨로는 우리 다 옥에 보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에베베베!”
“너…….”
결이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주령을 불렀으나, 아이는 휘파람을 불며 시치미를 땠다. 둘이 입씨름하는 사이, 끝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다음!”
주령이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다급하게 이름이 적힌 패를 병사에게 하나 씩 건넸다.
“그러니까 셋이 형제고 개홍이, 개난이, 이쪽이 개똥이?”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던 병사가 결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도 이름이랑 어울리지 않게 준수한 용모에 그가 사실이냐는 듯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결이 가만히 있으니 자신이 이름을 잘못 읽은 거로 생각한 병사가 다시 패를 확인했다. 별수 없이 결이 입을 열었다.
“…그렇소.”
결이 하도 인정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말하니 병사가 오히려 그를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그것참, 여러 가지로 힘들었겠어. 나도 이름이 남달라서 오해를 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
패를 들고 선 병사가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며 결에게 힘내라며 그를 두둔했다.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결의 손이 그때만큼은 부르르 떨렸다.
문득, 내가 그에게 저런 이름을 주었더라도 같은 반응이었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지만, 주령이 뒤에서 소리하나 없이 앙큼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는 바로 접기로 했다.
‘그래 사람의 이름으로 장난치는 건 나쁜 거야.’
주령이 또 결에게 꿀밤 한 대를 맞겠구나 하며 고개를 젓고 있을 때, 장적을 뒤적거리던 병사가 이상하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우리 셋을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아버지가 함자가 무엇이오?”
제일 난감한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