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의 일로, 초희는 설헌을 더욱 믿게 되었다.
마음 둘 곳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어 유독 더 차갑게 느껴졌던 시댁이었다.
시집 온 첫 날 부터 싹싹하고 바른 종이라 마음에 들었는데 어제와 같이 의젓한 구석이 있을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슬픔에 쌓여 잊고 살던 지난날의 행복한 시간들을 잠시나마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
설헌의 진심이 담긴 공감도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한 이틀이 흘렀을까. 초희에게 서신 한 통이 도착했다.
'오라버니 봉이다. 잘 지내느냐? 그동안 집안에 일이 많아 너에게 서신도 많이 넣지 못했구나.
이 서신이 전해지고 사흘 후쯤, 내 너를 보러 안동에 들리마. 보고싶구나, 그리운 내 아우 초희야.
금방 갈테니 하루가 천년같아도 기다리거라."
오라버니가 들른 다는 말에 초희는 뛸듯이 기뻤다.
며칠 전 오라버니와의 추억을 떠올렸는데 그것 때문인가 싶었다.
아무래도 설헌이 행운을 불러오는 아이인가도 싶었다.
"작은 마님, 약을 가져왔습니다."
혜연을 잃은 뒤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진 초희는 결국 하루 하루 약을 지어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 들어오너라."
설헌을 방으로 들어오며, 초희의 상에 놓여진 서신 한 통을 보았다.
"아까 전해드린 서신입니까? 어디서 온 겁니까? 말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궁금함이 항상 넘치는 설헌이었다.
"아, 이거.. 오라버니께서 쓰셨더구나. 사흘 후쯤 나를 찾아 온다는..."
"와, 마님이 그리도 보고 싶어하시던 분 아닙니까!"
허 봉의 방문 소식은 설헌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그 일로 초희가 좀 더 기운을 차릴 수 있을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허 봉까지 보게 되는 것도 기쁜 일이었다.
"아휴, 이렇게 약을 잘드시니 제가 다 뿌듯하네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설헌은 빈 그릇을 들고 다시 방을 나갔다.
부엌에 오니 초희의 시어머니 송씨가 있었다.
"큰 마님 오셨습니까~"
자신의 처지도 종인지라 송씨를 보고 그냥 지나쳐 갈 수 없었다.
"네가 며늘아기의 몸종 꽃.."
"예, 마님. 꽃순입니다."
"아, 그래 꽃순이구나. 너도 부엌일을 좀 더 도와야겠다.
곧 성립이가 과거 급제 소식을 들고 집을 올게야."
"도련님이요..!"
그간 성립은 완전히 한양으로 가 과거를 준비하느라 집에 없었다.
그런 성립이 드디어 과거에 급제했다는 좋은 소식을 들고 고향으로 금의환향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기쁜 소식을 듣게 된 설헌은 부엌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
"작은 마님~ 작은 마님~~"
부엌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설헌은 뜀박질을 시작했다.
서둘러 이 좋은 소식을 초희에게도 전해야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이냐."
"헉..헉..아니, 글쎄..!"
"왜 그러는 것이야?"
"도..도련님께서, 과거에 급제를 하셨답니다!"
성립의 급제 소식을 들은 초희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곧바로 서러움이 찾아왔다.
그 소식은 분명 설헌보다 자신이 먼저 시어머니든, 시아버지든 집안 식구 누군가에게 들었어야 할 말이었다.
그래도 언제 급제하나 했던 성립이 드디어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뿌듯하기도 했다.
"그럼, 언제 집으로 오신다더냐?"
"오늘이요!"
"오늘..?"
"예, 오늘 아침부터 바쁘다 했더니 도련님 오신다고 그런 모양입니다."
"그럼 나도 어서 나가봐야지."
"아니..! 잠시 계셔요 마님."
"..왜..?"
마음이며 몸이며 성할리 없던 초희의 모습은 아직 혜연이 죽던 그 날 같았다.
설헌은 초희를 도와주기로 했다.
생기를 모두 잃은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남편 성립 앞에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님, 거울을 한 번 보셔요. 아직 아기씨가 돌아가시던 그날들 같습니다."
설헌의 말에 서둘러 초희가 거울을 들여다봤다.
"잔치 음식이야, 제가 준비하면 됩니다. 부엌에 종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님께선 단장이나 하고 계십시오. 오랜만에 뵈는 도련님이 아닙니까."
"그..그런가?"
"예~ 저는 나가서 일 보겠습니다. 오랜만에 꽃 같은 얼굴로 화사하게 꾸며보십시요!"
이 말을 끝으로 설헌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음식 장만에 힘을 실어야 하기도 했지만 초희 혼자서 어련히 잘 해내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
"돌쇠 아저씨! 잠시 여기 좀..!"
설헌이 부른 돌쇠는 설헌이 이곳으로 와 초희를 처음 만나던 날, 초희의 몸종이 설헌이 될거라며 알려주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사랑채에서 일하는 종이였다.
"오늘, 도련님 오시는게 확실하죠?"
"아, 그럼~ 과거 급제라는 영광스런 소식을 들고 오시지~"
어린시절부터 성립을 봐 왔던 돌쇠는 마치 자신이 아버지인냥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저 좀 도와주십시요!"
"응? 너를?"
성립이 과거급제를 했는데 왜 설헌이 부탁하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자신을 이리 은밀히 불러낸 걸 보면
뭔가 원하는게 있겠다 싶어 들어주기로 한 돌쇠였다.
"잔치가 다-끝나고 도련님이 방으로 들어가시거든, 아저씨가 술 한 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세요.
그런 뒤에 오랜만에 보는 도련님과 달빛 좋은 정원에서 한 잔 나누고 싶다 하십시요.
그렇게 도련님을 정원으로 모시고 오셔야 합니다!"
"정원으로? 아니, 왜?"
"그게 실은... 오랜만에 도련님께서 오시는데 작은 마님도 보고파 하실거 아닙니까.
분명, 도련님은 또 안채로 안 들어오실거구요. 정원으로 도련님을 모시고 오시면, 제가 우연을 가장하여
작은 마님을 모시고 정원으로 가겠습니다. 저희라도 작은 마님을 도와 드려야죠!"
"허..과연 안채로 안 가실까?"
"예, 분명합니다. 안 오실거에요. 작은 마님께서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으신데 마음까지 아파지시면 어쩝니까.
그러니 아저씨께서 꼭~ 도와주셔야 합니다!"
"...흠. 그래! 내 힘 써보마."
돌쇠도 성립이 초희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 사이의 문제인지, 성립만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둘의 사이를 내심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설헌의 기막힌 생각에 돌쇠도 힘을 보태기로 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