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덜 깨 기억이 안 나는 척 하며 설헌은 겨우 부엌의 위치도 그 여자에게서 알아낼 수 있었다.
부엌에 도착한 설헌은 곁을 바쁘게 지나던 여자 한 명을 붙잡아 물었다.
"저, 음식 재료들.."
"저기 있잖아! 아니 꽃순이 너 뭐 하다 이제 오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자신을 노려보며 그녀가 대답을 했다.
"네? 아, 죄송해요. 깜빡 잠이 들었지 뭐에요. 저건 제가 손질해서 마당에 갖고 갈게요!"
상황을 스캔해보니 지금 자신의 이름은 꽃순인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 집주인이 부리는 노비들 같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건 그녀 자신도 노비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꿈인건가.'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우선 그녀의 이름과 신분이라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일단은 바빠 보이니 그녀도 움직이기로 마음 먹었다.
"무슨 재료가 이렇게 많아!!"
급한대로 대충 부엌 한 군데 철퍼덕 앉아 재료손질을 하던 설헌은 울분이 차올랐다. 일하는 사람들 수나 집의 규모로 보나 그리 만만한 양반의 집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예나 지금이나 잔치인 혼례날이었다. 그래서인지 온갖 재료가 가득쌓여 영문도 모르는 설헌을 더욱 힘들게했다.
***
원래 설헌은 밝은 성격이었고 그렇기에 스스럼 없이 남들에게 잘 다가갔다. 어쩐일인지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설헌의 본성이 깨어나고 있었다. 본성이 깨어나자 붙임성있게 먼저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새 같이 일 하던 종들과 친해진 설헌이었다.
"근데 허씨 부인이 누굽니까?"
"아니 왜 저기 건넛마을 허대감 가문의 막내딸 있잖아~ 부인 이름이.. 허초희 랬지 아마..?"
옆에서 같이 일하던 끝순이 대답했다.
"허초희라구요?"
끝순에게서 들은 이름에 설헌은 화들짝 놀랐다.
"어휴!! 입조심해!! 작은 마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면 안된다!"
설헌의 반응에 끝순이 더 놀라 입단속을 했다.
"아...네."
끝순에 말에 설헌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가슴은 쿵쿵 뛰고 있었다. 이번 잡지의 메인이자, 자신도 그 언젠가 부터
한번쯤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정말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나 싶었다.
"아니 근데 꽃순이 너 오늘 왜 그러니? 애가 혼이 빠진 덜 떨어진 애 마냥 몇 시간만에 이리 달라졌니?"
"아직 잠이 안 깨 그럽니다. 너무 생생한 꿈을 꿔서 아직 정신이 못 돌아왔나 봅니다."
우선은 정신이 안 돌아왔다 둘러대는 편이 더 좋은건 확실했다. 설헌은 애써 잠이 덜 깬 척하며 다시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은 알게 됐지만 아직 다른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아,근데...저~기 있는 저 분 이름이 뭐였죠?"
설헌이 가리킨 사람은 아까 설헌을 깨우던 여종이었다.
"뭐?"
"아니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요 하하하."
"갑자잖아.갑자!"
"아~맞다 갑자이모! 하하하"
설헌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우선 이름을 아는 한 사람을 알게 됐다. 일단은 무조건 그 여종과 함께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이참에 옆에 앉은 이의 이름도 물어봐야지 싶은 설헌은 잽싸게 끝순이에게 물었다.
"그럼, 저 이모는 갑자이모, 저는 꽃순이, 이모는?"
"뭐?"
갑작스레 장난스러워진 설헌의 모습에 끝순은 적응할 수 없었다.
"아니, 이모 이름은~?"
"내 이름은 끝순이잖아, 얘~!"
"맞아요~"
다시 한 번 능청스럽게 웃으며 설헌이 겨우 상황을 모면했다.
"그럼 끝순이 이모, 이거 갑자 이모 주고 올게요!"
***
"갑자이모! 여기 재료 다 가져 왔어요~"
"으휴 참 빨리도 갖고 온다!"
툭툭 내뱉는 말투였지만 악의감은 없어보였다. 정겨운 갑자의 말투에 설헌도 빙긋 미소가 지어졌다.
"뭘 또 갑자기 웃노! 우물가 가서 물 좀 퍼다 놔라."
"네."
갑자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래도 여종이라고 설헌은 만만치 않게 일을 많이 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낑낑 거리며 물동이를 나르던 설헌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상황파악이 되기엔 멀었나보다.
"와, 이제 오시나봐!"
"그러게 오나봐 오나봐~"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곳곳에서 수군거리며 하는 일을 멈췄다.
'일들 안하나?'
그래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업무가 있을 텐데 그걸 내팽겨치고 수군덕거리고만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설헌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온다고 하니 혹시 허씨 부인인가 싶어 설헌도 궁금해 졌다.
겨우 물동이를 갑자에게로 가지고 갔더니 갑자마저 손에서 일을 놓고 있었다.
"이모! 이모 여기 물이요~"
"응. 거기 놔둬라."
갑자는 설헌을 보지도 않고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뭐하세요?"
"저-기 작은 마님하고 도련님 들어오신다."
갑자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과연 그랬다. 이제 막 신랑이 먼저 문턱을 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신부인 허초희가 들어왔다. 어딘지 모르게 슬프지만 강인해 보이는 눈빛을 한 그녀였다.
설헌은 초희를 보자 순간 뭉클해졌다. 만나고 싶던 사람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마님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아씨가 몸집이 작으시구나."
갑자가 측은한 눈으로 초희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설헌도 속으로 말했다.
"아, 맞다! 니 앞으로 저-기 작은 마님 방에서 일해야 될끼다. 그만 여 있고 들어가 옷 좀 갈아입고
바로 작은 마님 방 앞 뜰에 나가 있거라. 다들 거기 모여있을테니.."
멀리서 성립과 초희를 지켜보던 갑자가 설헌을 보며 말했다.
갑자의 말인 즉, 설헌은 이제 김성립의 집으로 온 초희의 몸종이 되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한편으론 초희의 옆에 있게 되어 설렘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