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章 투쟁하는 자.
새침하게 이름을 밝히는 은하연을 보며 강진혁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정도로 강하연의 미모는 대단했다.
오래 전에 부동심을 이룬 강진혁이 잠시나마 흔들릴 정도로.
‘흐흐흐! 어떠냐, 이 녀석아. 눈이 확 뜨이지?’
통성명을 했음에도 이상하게 어색해진 분위기를 보며 은기영이 속으로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강진혁이 예상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도는 이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은하연은 억지로 끌려왔기에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고, 강진혁은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입을 열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녀와 달리 그는 은하연의 마음속을 어느 정도는 읽고 있었기에 더더욱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은하연이 보여주는 모습은 어릴 적, 그러니까 강진혁이 무석현에서 친구들과 골목이 좁다하고 돌아다녔을 때 예쁘장한 여아들이 보여준 모습과 비슷했다.
마치 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들떠도 보지 않는 모습에 강진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그러나 눈치 없는 은기영은 강진혁의 속내도 모른 채 연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기에 바빴다.
탁. 타닥.
분위기가 점차 어색해져 갈 때 다행히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때마침 차려지는 음식들로 인해 점점 가라앉아갔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크흠! 술도 한 병 가져 오거라.”
“예, 태상가주님.”
분위기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자 은기영이 조금은 초조한 표정으로 음식을 놓고 나가려던 하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은하연 또래의 하녀가 공손히 대답하며 문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하녀의 쟁반 위에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술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뽕!
하녀가 가져온 술병을 단숨에 딴 은기영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그러자 향긋하면서도 쌉싸래한 주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자, 두 사람도 한 잔씩 받거라.”
“예, 할아버지.”
은기영은 자연스럽게 은하궁과 강진혁의 술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은하연의 술잔에도 딱 반잔만 따라주었다.
“하연이는 딱 그것만 마시거라.”
“네.”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서 딱 반잔의 술만 허락한 은기영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후 수저를 들었다. 그러자 세 사람도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덜기 시작했다.
“저기 강 소협은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각자 알맞게 음식을 덜었을 때 은하궁이 먼저 말문을 열며 물어왔다.
“몇 살처럼 보입니까?”
“하하하!”
무뚝뚝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농담을 해오는 강진혁이 의외였는지 은하궁이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말하면 저보다 많아 보이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반문에 웃음을 터트렸던 은하궁이 강진혁과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나이는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올해로 스물여덟입니다.”
“저보다 여덟 살이 더 많으시네요. 아, 제 동생은 참고로 강 소협과 열 살 차이가 납니다.”
“그렇습니까.”
조용히 식사를 하던 은하연이 고개만 살짝 들어 은하궁을 째려봤다.
굳이 여자의 나이를 거론하는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은하궁은 그녀의 눈빛을 느끼지 못했는지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건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강호는 많이 돌아보셨습니까?”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한 번 크게 돌아볼 생각입니다.”
“아, 부럽네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위치가 위치인지라.”
은하궁이 진심으로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소장주라는 지위만 아니라면 무림을 질타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대 은가장의 후계자이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가주가 되기 위해서 배워야 하는 것도 산더미처럼 많았고, 익혀야 하는 것도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하궁은 더더욱 강진혁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한편 이 만남을 주도한 은기영은 속이 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째 흘러가는 상황이 그가 원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서였다.
원래 그가 원했던 상황은 강진혁과 은하연이 만나자마자 서로가 서로에게 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이 자연스럽게 나서서 두 사람을 엮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그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은하연은 도도한 얼굴로 식사에만 열중하며 강진혁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심지어 탐탁지 않은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그러한 모습에 은기영은 목이 탔다.
‘이게 아닌데.’
단숨에 술잔을 들이켠 은기영이 이번에는 강진혁을 바라봤다.
하지만 강진혁 역시 은하연에게는 별달리 관심을 표현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만 은하연의 미모에 놀랐을 뿐, 지금은 그저 은하궁과의 대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저 녀석은 돌인가? 아님 부처인 건가?’
다른 이도 아니고 무림이화(武林二花) 중 한 명인 천상화 은하연이었다.
보통 남자라면 침을 흘리고 바라봐야 했고, 어떻게든 말 한 마디 섞어보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강진혁에게서는 그러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은하연을 없는 취급하고 있었다.
그게 은기영으로서는 너무나 답답했다.
대련을 할 때에는 그렇게 박력이 넘치더니 지금은 소심하기 짝이 없었다.
-뭘 그렇게 노려보십니까?
속이 타는 심정에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은기영이 눈을 번뜩였다.
그런 그의 시선은 강진혁에게서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뭐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은하궁과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강진혁을 바라보면서 은기영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러자 강진혁의 전음이 곧바로 들려왔다.
-지금 이 자리, 일부러 만드신 거 아닙니까? 중매하려고.
-아닌데? 난 그저 젊은 아이들끼리 교분이라도 나누라고 데려온 것뿐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저와 손녀를 번갈아 보셨습니까?
강진혁의 송곳과도 같은 한 마디에 은기영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강진혁이 눈치챘을 줄은 몰랐기에 은기영은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도 이미 강진혁의 눈에 모조리 들킨 후였다.
-그냥 잘 어울리는 듯해서 본 것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뭐야? 지금 내 손녀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냐?
일순 은기영이 노한 얼굴로 전음을 보내왔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전음으로 인해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것은 어르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강진혁이 덤덤한 음성으로 말했다.
분명히 은하연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미모에 걸맞게 자존심이 매우 높았다.
그 사실을 짧은 대화를 통해 알아내었기에 그는 은하연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걸어봤자 좋게 받아줄 것 같지도 않았고, 굳이 대화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런 경우를 어렸을 적에 많이 겪어봤기에 말을 걸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강진혁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남자가 말이야 패기가 없어. 남자란 자고로 패기가 있어야 하거늘.
-후후후.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리는 은기영의 전음에 웃음으로 답하며 강진혁은 은하궁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은하연은 바라보지도 않고서.
그리고 그렇게 저녁 식사는 끝을 맺어갔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각에 강진혁은 별채의 앞마당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나 청소하는 시간이 아닌 이상에는 찾아오는 사람들도 없기에 강진혁은 가볍게 환풍신기보를 밟으며 난풍쇄혼수의 투로를 펼쳤다.
그 다음으로 벽풍신장, 풍룡번천권(風龍飜天拳)을 내공 없이 오로지 몸으로만 펼쳤다.
고도로 집중한 상태로 느리게 펼치자 강진혁의 얼굴에 금세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스으으윽. 스윽.
개미가 기어가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느릿하게 투로를 펼치는 그의 모습에선 묘한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그 정도로 강진혁은 투로 하나하나에 온 정신을 집중해서 펼쳤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강진혁은 공력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주위의 바람들이 그의 손길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바람이기에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낙엽들로 인해 강진혁의 주위에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후우.”
무려 반 시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투로를 펼치던 강진혁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런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개운하네.”
호흡을 가다듬은 후 강진혁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초식이나 투로를 펼치는 것보다 명상수련을 주로 했었는데 역시 수련은 몸으로 직접 하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았다.
잡생각도 사라지고 오롯이 무공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짝짝짝.
흘린 땀으로 인해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한 쪽에 미리 준비해둔 수통을 들어 입에 가져가던 강진혁이 느닷없이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별채의 지붕 위에 앉아 있는 은기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단한데? 내공도 없이 주변의 기운을 끌어다 쓰고.”
“기운이 아니라 바람입니다.”
“그게 그거지 뭐. 한데 방금 전에 펼친 세 가지 무공이 난풍쇄혼수. 벽풍신장, 풍룡번천권 맞지?”
“예.”
“그런데 왜 나하고 대련했을 때 펼친 것하고는 달라 보이는 거냐?”
두둥실 떠올라 지붕에서 내려온 은기영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보기에 지금 보여준 무공이랑 대련했을 때 펼쳤었던 무공은 너무나 달랐다.
그렇기에 물은 것이다.
“지금 것이 기본형이고 대련했을 때 펼친 건 응용형이라서 그런 겁니다.”
“호오.”
일반적으로 고수라 불리는 무인들도 실전에서는 초식을 변형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관적인 공격보다는 변화가 들어간 공격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또한 은기영 역시 자주 사용하는 공격방식 중 하나고.
단지 놀라는 이유는 변형된 수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신풍의 맥을 이은 강진혁이기에 이 정도 변화는 당연한 것이라 스스로 이해한 것이다.
“그보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는데 함께 가지 않을 테냐?”
또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찾았는지 은기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표정으로 보건데 그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선은 씻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어서 가자고 조르는 듯한 은기영의 눈빛에 강진혁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옷을 살짝 들어보였다.
그러자 은기영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른 씻고 와.”
“예.”
그래도 거절은 하지 않아서 그런지 은기영의 얼굴은 밝았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는 심심했던 모양이었는지 은기영은 강진혁을 따라 움직였다.
별채 뒤에 있는 우물가에 도착한 강진혁이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는 곧바로 우물물을 떠서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몸 곳곳에 있는 흉터들이 은기영의 눈에 들어왔다.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군.’
사람의 몸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담겨 있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인생의 흔적이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은기영은 강진혁의 벗은 몸을 보고서 그의 삶이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씻는데 뭘 그렇게 오래 걸려?”
“이왕 씻는 거 확실하게 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 유난 떨기는.”
물 한 번 부으면 될 일을 가지고 몸 구석구석 꼼꼼히 씻는 강진혁의 모습에 은기영이 툴툴거렸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강진혁은 여유롭게 대답하며 무명천으로 물기를 깨끗하게 닫아내고는 잘 개어져 있는 흑의무복을 입었다.
“됐으면 가자.”
“예.”
은기영은 강진혁이 옷을 다 입기 무섭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뒤를 강진혁이 바짝 따라붙었다.
잠시 후 은기영을 따라 이동했던 강진혁은 연회장으로 보이는 장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각 지붕에 내려섰다.
“이제 시작한 모양이다.”
강진혁이 도착하기 무섭게 지붕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은기영이 눈을 반짝이며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그에 덩달아 강진혁도 주저앉고서 연회장 쪽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자 열댓 명의 남녀들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강진혁의 시선을 가장 먼저 끈 이는 바로 은하연이었다.
옆에 앉아 있는 은기영의 손녀이자 여기 은가장의 금지옥엽인 그녀는 마치 빛을 내뿜는 보석처럼 화사한 빛을 아낌없이 뿌리고 있었다.
그로 인해 주위의 청년들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연회장에는 그녀 말고도 여인이 두 명이나 더 있었으나, 은하연의 미모에 가려 남자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흐흐흐. 역시 내 손녀다. 아주 눈들이 뒤집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