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저 들판의 못된 늑대는 개로 사냥한다. ---(2)
종남일기와 광수, 광겸이 시장통으로 광검을 쫓아갔을 때였다.
녹진자가 예의 문제의 환단을 쥐고는 여왕충을 얼리려 하는 광검을 허공섭물로 들어 올렸다. 그런 후, 다시 내공으로 환단을 부숴 광검의 입으로 넣어 준 것이다.
광검의 입안 하나 가득 꿈틀대는 여왕충의 촉수가 끊어지며 녹진자의 말이 뒤를 이었다.
“귀 후비고 잘 들어라. 따뜻함은 사물을 덥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라. 음중극음의 한기로 뭉쳐진 몸이라도 살아 있는 생령이 있다면 반 줌의 따뜻함은 있어야 하는 법. 항상 이것이 맞춰지려 하나 사람의 생각이 그것을 오히려 방해하나니, 네 스스로 조화를 찾는 기운을 방해하지 말아야 함이니라.”
그 말대로 차가운 기운이 일시지간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러나 광검의 몸 자체가 강해지자 냉기에 대한 저항력이 더욱 강해졌다. 오히려 빙기를 좀 더 강하게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강해진 빙기가 지금 광검의 칼을 통해 충령체의 촉수를 압박하고 있었다.
쨍쨍쨍쨍쨍!
충령체가 연신 뒤로 밀려났다.
촉수가 다 부스러졌다. 마지막으로 단전을 관통당하자 몸 전체가 부스러졌다.
동시에 세가 안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의 만령충인들도 모두 해치웠다는 얘기였다.
꿈만 같았다.
청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절로 눈물이 났다. 그제야 제대로 큰숨을 들이마셨다.
딸이 살렸다. 세가가 내친 딸이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뭔가 막힌 것이 왜 막혔는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백룡수는 진도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 더 미칠 것 같던 십 년이었다.
그런데 오늘 깨닫고 보니, 벽의 원인은 심마였다.
아내와 딸을 내치고 십 년이나 곁에서 피눈물 흘리는 것을 그냥 구경만 하고 있던 심마. 더욱 기막힌 것은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고서도 아내와 딸은 이제 다른 남자에게로 가 버렸다는 것.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 속이었다.
“다 끝났냐?”
종남일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다른 파장은 없는데요.”
이어 광검의 대답이 들리고, 세가의 무인들이 기쁨의 함성을 지를 때도 청현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허, 그놈 참. 백룡수 맞더냐? 정말 오랜만에 구경 잘했다. 네 증조할애비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게다.”
종남일기가 어깨를 툭, 쳐 올 때서야 청현은 무인들이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 다 쳐다보는 그 마당에 청현은 눈물을 흘렸다.
“크흐흑.”
“소가주, 어디 불편하십…….”
청현은 그 목소리에 언제나처럼 웃으며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은 계속해서 나왔다.
“크흐으윽―!”
녹진자가 약간 황당하다는 투로 말을 했다.
“이놈, 왜 이래? 부서진 집 수리비 생각하나?”
청현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막혔던 것이 뚫린 기분, 그것을 붙잡아야 했다. 그 원인을 이해했기 때문에 오히려 눈물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청현은 만령충의 파편과 핏물, 흙이 범벅인 땅에 그대로 엎어졌다.
“소, 소가주! 소가주께서 타격이 크신 모양이다! 서둘러라!”
“소가주! 정신 차리십시오!”
당황 섞인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엎드린 채로 청현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오, 아니…… 그게 아니야, 그게…….”
고개를 든 청현의 얼굴은 피와 흙,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격해진 감정이 그런 것을 따질 턱이 없었다.
청현은 부르짖었다.
“어르신! 살려 주십시오!”
녹진자가 눈을 꿈뻑였다.
“야, 이놈아. 다시 쳐들어온다고 해도 정비할 시간은 벌었잖아. 아무리 가까운 곳도 칠 주야는 걸릴걸? 여기서 급하게 동원한 인원은 이게 다야. 마교 애들은 무조건 다 신이냐, 저런 습격자를 쉴 틈도 없이 쏟아 내게?”
하지만 청현은 눈물을 계속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으으윽!”
청현은 더 참을 수가 없게 된 말을 내뱉었다.
“우연히…… 우연히 백룡수의 비급을 발견한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
모용중걸과 모용세가의 무인들 모두 놀라움의 빛이 흘렀다. 청현은 지금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들어야 했다. 실전된 가문의 절기를 도로 찾는 과정의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가.
어느덧 청현의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아버님께서 나희령에게 돌아가신 직후였습니다. 그래서…… 복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파고들었습니다.”
당시 청현은 폐관까지 감행했다. 그리고 그사이 홍춘이 모용세가에서 조용히 쫓겨난 것이다.
“어느 정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더 진전도 없을 때였으니 운이 따르면 깨달을 날도 있겠거니, 아쉬움을 접고 폐관을 풀었습니다. 한데, 한데…….”
모용중걸은 눈을 감았다. 이제야 돌아보니 추악한 것이다.
그 후의 이야기는 서안에서 유명한 화젯거리였다.
―술 먹고 비뚤어져 삼룡에서 떨어진 지렁이.
모용중걸의 반대가 워낙 심했기에 청현은 홍춘을 다시 불러들이지 못했다. 결정적인 것은 이미 칠 년이나 지난 후인데다 홍춘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라는 점이었다. 어머니의 약값조차 마련하지 못한 홍춘은 아현을 기루에 맡기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감정의 골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상태에서 청현이 손을 쓸 방법은 없었다.
다시 술. 또 술.
이어지는 악순환. 남겨진 한 가닥 희망은 빨리 백룡수를 얻어 나희령을 죽이고, 세가에서 입지를 굳히는 것이었다.
결국 임시로 가문을 맡았던 숙부가 가주 자리를 이었다. 가주는 일개 집안이 아닌, 그나마 근근이 몇 년 만에 한 번씩 연락이 되던 윤홍광의 끈을 잡고 홍춘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런데 윤홍광이 죽어 버렸다. 그래서 모용중걸은 다른 대책을 혈육에게 세워 두었는지 확인하고자 홍춘을 내쫓았다.
집안의 결정에 처자식을 지키지 못했던 청현은 스스로를 갉아먹는 분노와, 그 분노마저도 잡아먹는 절망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했다.
그래도 참았다. 백룡수가 완성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올 테니까.
그런데…… 유일한 희망인 백룡수가 막혔다.
나아질 기미도, 어떤 희망도 던져 주지 않은 채.
청현은 그 대목에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백룡수는…… 제 마지막 희망은 그만 막혔습니다. 진전이 없었습니다.”
나희령의 구절편은 단단한 강도와 더불어 접히며 때리고 다시 때리는 연속 타격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구절편을 아예 부술 수 있다는 자신이 딱히 서질 않은 것이다.
백룡수가 십이성 경지라 해도 세월이 더 지나야 했다.
그렇게 세월만 지나갔다. 속은 타들어 가고 백룡수는 오히려 퇴보할 기미마저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몇 년을 허비하고도 그것이 심마였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걸 안 것이…… 그걸 알려 준 것이…… 제가 십 년 동안 내버려 두었던 제 핏덩이였습니다. 크흐흐흑!”
모용중걸의 눈도 붉어졌다. 모용세가의 무인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그 핏덩이도 각박한 세상의 찬바람에서 괴로워했다는 걸…… 내가 괴로워할 때 그 작은 핏덩이도 풍진강호의 압박에 눌려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러한 세월을 보내고도 제게 눈물을 흘려 주었다는 것을, 저는…… 알고도 외면했습니다. 그게 심마였습니다. 크흐흑! 어르신, 저 좀 살려 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다시 흙바닥에 엎드린 청현은 내처 눈물을 마저 쏟았다.
녹진자가 픽, 웃었다.
“어, 이건 나보다 나이 많은 선배가 해 줘야 할 말이오.”
종남일기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 나이에 반로환동을 하고 남들이 도를 깨쳤니 마니 하는 논쟁들이 분분하다마는, 내가 반로환동 아니라 탈각해 신선의 반열에 올라도 너를 도와줄 재간은 없다.”
잠시 말을 끊은 종남일기는 하늘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깨달은 사람에게 충고할 재주는 없다는 말이지. 넌 이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봤어.”
여전히 울고 있는 청현에게 종남일기는 말했다.
“아까 내가 말했지, 무공은 자신이 아닌 남이라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저기 저 개들을 봐라.”
종남일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견자단 삼 형제가 서 있었다.
광검이 ‘노친네가…….’라며 중얼거리다가 녹진자에게 맞는 모습이 있었다.
“야생에서 그들끼리 맞춰 사는 개를 우린 들개라고 부른다. 사람의 집 안에 들어와, 사람의 서열에 적응하고, 사람을 섬기는 짐승을 비로소 우린 개라고 부르지. 무인도 개와 같다. 사람을 섬겨야 무인이지. 힘을 섬기고 돈을 섬기고 권력을 섬기는 자는 이미 마인에 불과한 것이니, 무에 정도가 있겠느냐.”
아무도 말이 없었다.
비유가 개 같다고 욕할 텐가.
종남일기는 다시 웃었다.
“그래서 난 저 개놈들이 좋은 게다.”
“아니, 거, 잘나가다가 꼭!”
광검의 항의에도 종남일기는 마무리 말을 남겼다.
“지금 당장 비틀어진 십 년을 바로 잡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사실 처음이 어렵지, 재미가 붙으면 시간도 금방이야. 노력을 꾸준히 하고 진심을 활짝 여느냐의 문제인 거지. 어쨌든, 넌 앞으로 노력만 하면 돼. 노력해서 사람도 찾고, 네 증조할애비가 처음 보인 백룡의 하얀 천둥소리를 세상에 다시 들려다오.”
대답은 눈물로 돌아왔다.
모용청현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 했다.
석양이 뉘엿뉘엿 기우는 가운데 누군가 중얼거렸다.
“참으로 긴 하루였군…….”
“이런 제기!”
콰당!
문을 박차야 했다.
그나마 다 부서져 수리하려면 오히려 떼어내야 할 정도인 대문.
모용세가까지 거의 날아가다시피 했고, 싸움은 일각 만에 끝났다. 돌아오는 시간도 얼마 안 걸렸으니 반 시진도 채 안되어 멀쩡하던 대문이 이렇게 된 것이다.
대문?
집 전체가 다 이 모양 아닌가? 아니, 집도 문제가 되질 않았다.
사람이 상하고, 없어지기까지 한 것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광겸이 소리부터 질렀다.
광검은 아예 말도 없이 방마다 뒤집어엎고 다녔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멈춘 것은 홍춘의 방문 앞에서였다.
홍춘은 상의가 벗겨진 채 급하게 천을 대 놓은 상태였고, 무명천 위로 상당한 양의 피가 스며 나와 있었다. 기식 또한 엄엄했다. 그런 상태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아현을 찾았다.
“아가…… 흑흑, 불쌍한 내 딸…… 으으으…….”
옆에서 돌보고 있던 연미의 곱던 얼굴도 먼지투성이였다. 그 사이로 눈물이 흐른 자국이 보였다.
광검의 말문이 막혔다.
광겸의 신경질적인 고함이 대청을 울렸다.
“이게 대체 어찌 된 거냐고!”
그러자 강북련 소속 무사 하나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광수 대협이 걱정하신 대로…… 성동격서였습니다. 가시고 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초고수 네다섯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더군요.”
“이런 망할 자식들!”
울분을 참지 못한 광겸이 손을 휘둘렀다.
콰앙!
벽 한쪽의 반이 날아가며 부서져 무너졌다.
광수가 침착하게 물었다.
“탁 대인은?”
그 말에 호위무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탁명옥 지부장님께서는 지금 위급 상황이십니다. 아현 아씨가 적의 손에 들어가자 저항하시다…….”
“으음…….”
광수가 신음성을 흘렸다.
탁명옥의 무공은 얕잡아 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먹고 머릴 굴리는데 그런 대비책 없이 쳐들어왔을 리도 없다.
그나마 적의 무공 수위라도 확인해야 했다.
“얼마나 버텼습니까?”
호위무사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아직도 감정을 누르기 힘든 듯 보였으나 중요한 이야기였다.
“후우, 그냥 단칼이더군요. 지부장님의 칼이 붉게 빛나더군요. 그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강기였다.
탁명옥은 분명히 초입인지는 몰라도 강기의 경계선을 넘은 것이다. 한데 뒷말이 더 가관이었다.
“그게 대번에 잘리고 허리도 두 동강 났습니다. 의원 말이 척추뼈만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랍니다. 전 살다 살다 그런 고수는 처음 봤습니다.”
“으으…….”
그때, 홍춘의 신음이 다시 들려왔다.
광수와 녹진자, 종남일기는 어이가 없어 인상을 썼다.
설마 했는데, 천하의 마교가 애를 납치하다니!
강기(|氣)를 다루는 자라 했다.
실제 검기라도 공기가 일렁이는 정도로 구사하려면 기연을 얻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걸 넘어서서 별이름 강(|), 검기성강(劍氣星|)이라는 글자 그대로 강기를 구사한다는 것은 도가의 전설이 된다는 소리인데, 탁명옥은 그런 경지를 얻었다. 그러나…….
“단칼에 잘렸다고?”
“예.”
종남일기가 인상을 쓴 것이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집법당이다.”
종남일기의 말에 침묵이 집안을 휩쓸었다.
마교 집법당!
마교의 고수들조차 두려워 덜덜 떤다는 지옥사자들이 남긴 전설은 믿지 못할 경지가 많았다.
칼을 단번에 잘라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인데, 강기가 서린 칼을 아무렇지도 않게 썰어 놓고 가다니.
그리고 그런 자가 뒷골목의 하류배처럼 애를 납치해 간 것이다.
“전하는 말은 없었습니까? 아이를 어디로 찾으러 오라든지…….”
광수의 질문에 호위무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현 아기씨를 납치하고서는 그대로 허공으로 뛰어 날아가더군요. 에, 정말 날아간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한 번에 십 장 가까이 확확 멀어지니…… 저희는 추격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냥 개방 서안 지부에 연락만 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후우…….”
사실 무사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역량을 한참이나 아래로 내려다보는 엄청난 수준의 적을 맞이하고도 최선을 다해 싸운 것이다.
강북련이 삼 형제를 필요로 한다지만, 어쨌든 이들은 가족은 아니었다. 오히려 삼 형제가 고마워해야 할 판 아닌가.
셋 중 맏이인 광수는 차마 성질을 낼 수가 없었다.
“다리는 어찌…….”
호위무사가 그제야 자기 다리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약을 바르긴 했습니다만, 무릎 관절을 정확히 잘랐답니다. 뭐, 저기 누워 있는 놈처럼 단전이 파괴된 것보다 나은 상태이긴 하지만…….”
그 말을 듣고서야 광겸과 광검의 눈길도 호위무사의 다리로 쏠렸다. 자기 몸 얘기다. 그런데도 어찌 이렇게 남 말 하듯 할 수가 있는가.
“저희 식구를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을 해 주신 점,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뭘 원하십니까?”
광수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호위무사는 흠칫하다가, 문득 씨익 웃어 보였다. 비장해 보이는 웃음. 하지만 대답은 여유 있었다.
“강북련은 이런 경우 보상이 꽤 됩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편히 소작료 걷으며 살 만큼은 해 주지요.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무인이 불구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무공을 아예 잃었다는 게 아니고 그냥 병신이 되었다?
삼 형제는 과거 마교에 의해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랬기에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호위무사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고, 그렇다면 광수도 그걸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그래서 광수는 차분히 기다렸다.
호위무사는 이를 바득, 갈고 다시 웃었다. 웃는데 이를 갈다니.
아니나 다를까.
“복수를 해 주십시오. 제 몸이 이렇게 되고도 남을 걱정하는 것은 우스운 모양새지만, 탁명옥 지부장님은 저희를 가족처럼 감싸 주신 분이고, 서안의 온갖 비리를 근절은 못했어도 그런 짓이 사람 사는 데 근간을 해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저렇게 누워 계십니다. 제 다리도, 저기 단전 잃은 저놈도 모두 복수를 원할 겁니다. 제가 원하는 건 그것뿐입니다.”
이를 갈 만한 내용이었다. 그럼 웃은 것은?
삼 형제를 믿는다는 뜻이었다.
광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막내놈이 말한 것처럼, 저희도 마교와 한 하늘 아래서는 살지 못합니다.”
“그래도 좀 후련하군요. 고맙습니다.”
호위무사는 그 말을 듣고서야 다시 대청 바닥에 누웠다.
“아현아, 아가…….”
다시 홍춘의 신음이 들려왔다.
광겸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며 다시 한 번 신경질을 냈다.
“에잇! 이 개자식들! 애를 인질로 잡아가?”
콰작!
방문 하나가 또 부서졌다.
그러자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울음소리는 요 며칠간 힘이 많이 들었던 사람의 것이었고, 특히 광겸의 성질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소리였다.
“여, 연미…….”
연미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울음을 그쳤다.
“죄, 죄송해요. 하지만, 하지만…….”
“…….”
연미도 급작스럽게 아버지가 비명횡사했고, 광겸과 급작스럽게 결혼 결정을 내렸다.
이 세 마리 개가 정말로 개가 아니고, 실은 영웅 비스무리한 길을 간다는 결론은 이미 얻었겠지만, 아직 슬프고 혼란스러운 마음은 누구 못지않았을 것이다.
원래는 광겸이 알아서 챙겨야 했다. 하지만 요 며칠 그럴 만할 경황이 없었다. 그래서 홍춘이 챙겨 주고 있었다.
그런 홍춘이 쓰러진 것이다.
따뜻하게 기대야 할 광겸은 지금 ‘난장을 깐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가.
결국 광수가 입을 열었다.
“좀 있다가 바로 가정을 꾸려야 할 놈의 성질머리가 그게 뭐냐?”
광겸은 아직도 일그러진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대답은 연미가 대신 했다.
“죄송해요, 아주버님. 정말,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흑!”
“제가 죄송합니다, 제수씨. 저놈이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래요. 식을 올리고 부인을 거느리면 그때는 세상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될 겁니다.”
그러자 광검이 입을 놀렷다.
“형수가 힘들게 하긴 했나 보다, 형.”
광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말을 하기도 전에 녹진자와 종남일기가 한꺼번에 구박을 했다.
“그게 웃기냐? 지금 이 상황에 농담을 하면 누가 웃어?”
광검이 투덜거렸다.
“안 웃기면 말지. 썰렁하면 나도 안 좋은데 구박은 뭔…….”
세 사람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쳐다보기만 하는 사이 광검은 마당 가운데로 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눈을 부릅떴다.
냉기가 풀풀 날렸다.
원래 겨울인데다가 해도 다 넘어갔다. 그런데도 허연 김이 센바람처럼 몰아쳐 나오는 것이다.
광검의 냉기가 저 정도로 풀리면 백선고의 여왕은 발광을 한다는 의미였다.
“저, 저놈이 미쳤나? 그 마물을 간신히 잠재워 놓고 왜 도로 풀어?”
녹진자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할 때, 광검의 입이 울컥거렸다.
“쿨럭, 우웩!”
어둑어둑한 하늘, 이제 불을 켜야 하는 마당.
손으로 황급히 막은 입가에서 벌써 허연 것이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모두의 경악이 집 안을 들썩였다.
“아니, 둘째 형. 갑자기 미쳤어!”
“야, 이놈아! 뒈지게 맞을래? 노친네가 아끼던 약 집어삼키고 뭐 하는 짓이냐?”
그러나 광검은 입을 막은 손 대신 다른 손을 쳐들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광수의 얼굴이 한겨울 밤의 음한보다 더 어두워졌다.
“여왕충이 더 자랐다. 벌써 타협을 할 만큼…….”
“……!”
그랬다.
백선고의 여왕충은 광검이 성장하면서 정비례로 자랐다.
본능적으로 광검을 무조건 집어삼키려고만 하던 짓거리를 하지 않은 것이다. 광검의 생이 다할 때를 기다리든가, 아예 약해지는 빈틈을 노릴 만큼 ‘의식’이 생긴 것이 확실했다.
지금처럼 촉수가 입안에서 나왔는데도 얌전히 허공에서 하늘거리기만 하지 않는가.
동시에 강한 사념이 파장을 타고 퍼져 나가는 것이 종남일기, 녹진자, 광수, 광겸에게도 느껴졌다.
눈물을 흘리던 연미도 입을 막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홍춘의 눈이 힘겹게 떠졌다.
“으응, 동생…….”
연미는 홍춘의 손을 잡고 손으로 눈가를 대충 닦았다.
“형님, 좀 괜찮으세요?”
“아현이, 우리 아현이는…….”
홍춘의 강한 성격으로도 차마 일어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강한 충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지금 작은아주버님이 찾고 계시는 중인가 봐요.”
연미의 손가락을 따라 돌아간 홍춘의 눈에 광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만령충의 촉수가 걸렸다.
징그러운 광경이었지만 홍춘은 아현을 찾는다는 말에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 이해심도 무심하게 촉수는 곧 들어가 버렸고, 광검의 입에서는 한숨만 흘러나왔다.
“후, 제길. 여기 서안에는 만령충을 가진 놈들이 하나도 없네.”
지금 광검의 몸속에 있는 백선고는 자기 의식을 지닌 채 만령충이 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사실만 보여 주고 헛되이 수색은 끝나 버렸다.
홍춘의 눈에서 다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려 할 때였다.
“험, 계시오?”
아예 부서져 날아간 대문 앞에 웬 무사 하나가 서서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흑의 차림의 무사. 누가 저런 색을 평범한 세상에서 내놓고 입겠는가.
거기에 더해 사내가 내놓은 기운도 온통 컴컴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녹진자가 자연스럽게 외쳤다.
“묵정(墨井)! 마교로구나!”
“이 자식!”
광겸이 대번에 날아가 칼을 뺐다.
몸이 급작스럽게 좌악 늘어나 보이는 신법. 그 신법 하나만으로도 광겸의 칼은 당금에 상대할 만한 자가 없어 보였다.
검은 우물.
마교의 수많은 조직체 중에는 끝없는 깊이에서 나오는 지옥의 마기를 뜻하는 묵정이 있다.
저주받은 무저갱과 연결된 우물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광겸의 칼은 별 저항 없이 사내의 목에 대어졌다.
빠르기도 했지만, 사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던 탓이었다.
사내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광겸을 비웃었다.
“꼬마, 생으로 경극 찍냐? 난 어차피 죽으러 왔다.”
경악을 계속하다 보면 입은 아예 굳어진다.
사람들은 더 놀랄 힘도 없었다.
죽으러 왔다?
애도 납치할 만큼 비열한 놈들이?
이건 그냥 비열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감정을 극도로 분노에 휘둘리게 하는 고도의 전술인 것이다.
광겸은 외쳤다.
“그래! 네놈들이 바라는 대로 열 받는다! 아주 많이!”
광겸의 팔이 마교도의 목을 썩둑 날려 버릴 것처럼 움직이자 광수가 외쳤다.
“아현이 얘기를 하러 왔을 거다! 안 돼!”
광겸의 두 칼이 마교도의 목에 대어진 채 파르르 떨렸다. 마교도는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씨익 웃었다. 견자단의 마음은 이제 그의 손에 들어온 셈이었다.
마당에 부는 찬바람이 사람들의 가슴을 할퀴었다. 그래도 마교도의 악독함은 그 찬바람을 느끼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견자단 셋은 그렇게 얼어붙었다.
<『운종룡변종견』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