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은거 기인이 달라붙다 ---(3)
마교와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은거한 고수들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종남일기는 아주 빨리 칩거에 들어갔으니 윤홍광과 구대문파에 걸친 묘한 분위기를 몰랐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진유정 장문인은 한숨을 쉬었다.
“사숙조님,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이제 제가 직접 마지막 확인만 하고 나면 따라 들어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뭔가 곤란한 일이라는 것을 오래 산 경험으로 알아챈 종남일기는 수긍을 했다.
이미 견자단은 종남의 담 밖으로 나가 버린 후였다. 게다가 만령충에 감염되었던 이대 제자들의 상태가 괜찮을지 어떨지 고수 여럿이 붙어 지켜봐야 했다.
그때였다.
“어? 사부님!”
입문 제자 하나가 손가락으로 만령충을 가리켰다.
푸스스스―
만령충은 그대로 산화해 버렸다. 바람에 날리는 먼지 같았다. 그리고 먼지 가운데 정말로 작은 지렁이만 한 벌레 달랑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토막 나 꿈틀거림도 멈춘 상태였다.
시체가 남으면 썩어 흙으로 돌아가야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그러나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만령충의 본체는 저 지렁이 같은 것이고, 그 촉수들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다.”
“……?”
아리송한 말. 최윤한은 얼굴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니라. 이제 곧 사방팔방에서 저 요물이 쏟아져 나올 테니 말이다.”
입문 제자는 그 말의 무거운 분위기에 어른들과 같은 그늘을 느껴야 했다.
지금 보는 위력이 이럴진대, 천지에서 날뛰면 그 끔찍함을 무엇으로 당할 것인가.
‘대체…….’
입문 제자의 고개는 살래살래 저어졌다.
생각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대 제자들을 부축해 건물 안에 눕히고, 근력을 회복시킬 약을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종남의 발도 바쁘게 마교와의 일에 들여졌으니, 도현호의 바람이 반은 이뤄진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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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시라고요?”
광겸은 젓가락을 채 입에 넣지 못했다.
강북련에서 하인 열에 하녀 다섯, 무려 열다섯이나 붙여 주었는데도 홍춘은 쉬지 않고 음식을 직접 만들었다.
“밥은 집에서 먹으라고 으름장을 놨으니 말에 책임을 져야 하잖아!”
쉬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다는 말을 그렇게 덮는 홍춘이었다. 동서 형님이 그러니 당연히 연미도 주방에서 서성거려야 했다. 가서 ‘놀고’ 있으라면서 쫓아낸 탓이었다.
다행히 음식이 다 만들어지기 직전에 삼 형제는 헐레벌떡 돌아왔고, 뛰기야 말이 뛰었다지만 어쨌든 힘을 쓴 직후라 배고파 눈이 뒤집어질 지경이라는 것은 셋이 이구동성이었다.
그렇게 음식이 나오자마자 난리를 치면서 젓가락을 드는 순간이었다.
“저, 마님. 손님이 오셨습니다요.”
어디서라고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하인들을 달고 방문 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기세가 범상치 않아 삼 형제는 어쩔 수없이 나가 봐야 했다.
음식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코를 당겼지만,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벗어났는데 집이 부서지기라도 하면 홍춘의 성질은 누가 감당하겠는가.
해서 만나 본 작자는 견자단보다 더 막 나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화산에서, 화산에서 왔다!”
말을 왜 한 번 끊고 다시 하는가.
“딸꾹!”
딸꾹질 한 번에 풍기는 술 냄새는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새 음식 냄새를 저리 밀어낼 지경이었다.
삼 형제의 고개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대체 뭐야, 이건?’
의문이 치솟았다.
“대체 우리 집은 왜 이리 사람이 많이 들락거리는 거야? 거지발싸개 같은 사이비 도사까지 오질 않나!”
그러자 도사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건들건들, 여유롭게 받아쳤다.
“아, 이놈아! 거지발싸개나 개집 깔판이나 그게 그거지!”
이상한 오후의 이상한 노친네였다.
거지발싸개라는 말이 일단 싸가지 없는 건 맞다.
광검은 구대문파에 한이 많으니 일부러 열 받으라고 한 소리였다. 하지만 열 받아야 할 노친네는 오히려 웃으며 광검더러 개집 깔판이라고 대응했다.
행태 자체가 정상이 아닌 거야 한눈에 척 보면 알지만, 집주인에게 쫓겨 날 정도로 열 받는 소리를 하려면 대체 왜 일부러 찾아왔는가.
‘하지만…….’
그냥 술 취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강한 노친네 아닌가.
광검은 조금 더 찔러 보기로 했다.
“이런 노인장, 개집 깔판? 그러는 노인장은 급한 파발마 눈앞에 땡땡 얼어붙은 빙판길 같은 존재 아니오!”
자칭 화산의 도사라는 노인은 피식 웃더니 말을 받았다.
“개집 깔판같이 비쩍 마른 녀석아, 그 주둥아리 인심도 네 몸처럼 비쩍 말랐구나?”
“아니, 뭐요? 이 노친네가…….”
광검의 말은 갑자기 번쩍이는 노인장의 눈빛에 끊겼다.
“음양의 이치를 그렇게 완전히 무시하고 사니 깔판처럼 납작 널브러질 만큼 힘이 없지! 이 순 개집 깔판아!”
느닷없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광검의 표정도, 나머지 두 형제의 표정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사람의 기세는 척 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이 노인의 기세는, 말하자면 종남일기처럼 자연과 동화되는 경지와 비슷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내뱉는 소리가 간단한 의미일 수 없었다. 삼 형제가 오랫동안 고민해 오고, 결정적으로 계속 불안해하던 문제를 한눈에 보고 지적한 것이다.
그랬다.
광검은 음(陰)의 기운만을 익혀 왔다.
그것도 강호에서 무슨 음검이니 극양의 장공이니 하는 수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음중극음(陰中極蔭)의 진기를 익혔다. 보통의 수련법이라면 생명조차 도저히 유지될 수 없는 극도로 편파적인 진기였다.
그리고 화산에서 왔다는 술주정뱅이 노인은 다른, 더 깊은 문제도 역시 짚어 내고 있었다.
“저 기괴한 숨소릴 들어 보니 극에 이미 달했고…… 그게 꽤 오래되었으니 문제도 터져 나올 텐데, 그걸 어거지로 버텨 왔구나? 척 보면 착이지. 칼 잡고 남의 목숨 호령한다는 놈이 몸 꼬라지가 이게 뭐니, 이게?”
그리고 일시지간 당황해 할 말을 잃은 광검에게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 개집 깔판이라지, 이놈아.”
무반응을 보임으로써 그걸 순간적으로나마 인정했다는 것을 무마시키려고 광검이 성질을 냈다.
“이, 이 노친네가! 댁이 상관할 문제가 전혀 아니잖아!”
더 쏘아붙여야 마땅하지만 옆에서 듣던 광수와 광겸은 전혀 그럴 입장이 못 되었다. 그래서 광검의 말은 또다시 잘렸다.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저희가 들어야 할 말이 많은 듯합니다.”
구대문파 사람을 왜 이리 친하게 대하냐며 광검이 언성을 높일 차례였다. 그러나 이번엔 광겸이 가로챘다.
“어, 어차피 우리 막 먹으려던 참이었어요. 점심밥.”
노인이 은근하게 물었다.
“물론 밥상에 술도 있겠지?”
술?
홍춘이 술을 허락할 리가…….
“어, 우리 형수가 좀, 엄해서…….”
“커흠…….”
광수의 기침에 광겸이 아차 싶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노인이 괴상한 웃음을 흘려 냈다.
“크크큭, 엄처시하였어? 그래도 지나던 도사 양반이 점괘 한 번 봐 준다는데 술이 문젠가.”
광검이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양반은 무슨…….”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며 홍춘이 나왔다.
“저희 둘째 삼촌 일신의 문제를 얘기해 준다면 술 아니라 이 집을 달라고 해도 드리지요.”
“어?”
“뭐?”
“……!”
입이 벌어진 것은 삼 형제뿐이었다.
홍춘이 저렇게 완전한 자기 식구인 것처럼 말을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홍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래서 홍춘의 아버지인 사부 윤홍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광수의 뺨은 살점이 뜯어져 나갔다.
-꺼져! 이 개새끼들아!-
당시 홍춘은 눈물, 콧물, 게거품 섞인 침을 죄다 흘리고 손톱으로 할퀴며 발작이나 다름없는 거부반응을 보였다.
탈진해서 죽기 일보 직전에 이르러서야 발작이 그쳤고, 그래도 씩씩대며 침을 뱉어 대는 홍춘을 어쩌지 못하고 서 있다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간신히 사모의 죽음과 죽기 전의 처참한 고통, 그리고 약값을 구하기 위해 딸 아현을 기루에 팔았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삼 형제의 참담한 가슴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홍춘의 그 참담한 눈물을 누가 감히 위로하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그렇게 멀리서 삼 형제의 홍춘 보살피기 작전이 시작되었고, 힘든 생활에서 칼밥으로 번 돈을 피부병처럼 생각하는 홍춘의 완고함은 삼 형제의 수고로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러다 아현을 다시 찾으면서 급속도로 상처가 아물어지는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저런 반응까지 나온 것이다.
물론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화산의 노도사는 고개를 쳐들고 다시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고것 참, 남편을 공처가 만드는 여인네 소리는 듣기 싫었던 게지.”
광검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골고루 한다, 정말.”
그리고 그 ‘골고루’라는 발언은 또 다른 열매를 맺었다.
허공에서 음성이 던져진 것이다.
“어라? 너, 아직도 애들 뜯어 먹냐?”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광검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종남일기가 여기에 왜 왔을까?
“하, 하하, 안녕하세요…….”
광겸이 어색하게 웃고, 광수가 포권을 해 보이자 종남일기는 뚱하게 손을 저었다.
“아침에 봐 놓고 무슨 안녕이야, 안녕은. 그나저나 저놈이 왜 이 귀여운 애들한테 접근을 하는 걸까?”
그 말에 일그러진 것은 견자단뿐만이 아니었다.
‘귀엽다니…….’
놀랍게도 그 뻔뻔하던 화산 도사가 얼굴을 찌푸린 것이다.
“어, 선배……. 오랜만이오. 아직 이승에 계셨더랬소?”
오랜만이라면서 이따위 말을 인사라고 하다니, 너 아직 안 죽었냐는 말 아닌가.
그 말에 종남일기가 코웃음을 쳤다.
“뭐, 내공으로 치면 종이 한 장 차이인지는 몰라도 네놈이 나보다 윗길 아니냐? 그러니 탈각(脫却)하고 세상 뜨는 건 네놈이 먼저일 거라고 다들 그러던걸. 너야말로 아직 선계로 안 갔구나?”
방문 안에서 나오던 연미는 발을 마저 내딛다 말고 눈을 깜빡였다. 저런 백발이 성성한 노도장에게 하대를 하는 젊은이. 당연히 전설의 반로환동을 이룬 종남일기일 것이다.
한데…….
‘그런 종남일기보다 내공이 더 높다고? 그런…… 가만, 화산, 화산, 화산?’
“헉!”
연미는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전설은 전했다. 화산을 가르고 흐르는 황하 줄기를 막을 자가 있다면 푸른 먼지, 녹진자(綠塵子)라고.
저 멀리 천축에 가면 요가를 높은 경지로 수련한 성자라는 분들 중에 신성한 재를 허공에서 만들어 내 흩뿌리는 분들이 가끔, 아주 가끔 나오신다고 전한다.
물론 재일 뿐이다. 먼지.
그러나 그게 ‘내공으로 실제 물건을 만든다’는 경지가 되면 얘기의 차원이 달라진다.
그걸 중원에서 실제로 구현해 보인 사람이 바로 녹진자였다. 녹진자가 허공에 뿌려대는 먼지의 양은 가장 많았을 때가 한 번에 세 가마니 정도.
바람에 멀리 날려 흩어진 것을 제외하고도 근처의 것을 모아 놨을 때 그만한 양이 되었다.
물론 그것도 허공의 아주 미세한 먼지를 눈에 보이게 뭉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윤홍광에게 만령충에 대한 가장 많은 깨달음을 가져다준 사람도 바로 녹진자였다.
그런 사람이 이 견자단 앞에 제 발로 나타난 것이었다.
연미는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먼발치에서 한 번 구경하기도 힘든 사람들을, 한꺼번에 둘씩이나 이렇게 마주하다니!
그 환상 속의 녹진자가 입을 헤 벌리며 비열하게 웃는 모습이 연미의 정신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선배, 같이 늙는 처지에 뭐 이렇게까지 딱딱거릴 필요가 어디 있소?”
그러자 종남일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며 호통이 터져 나왔다.
“체통 좀 지켜라! 그 나이에 그 내공이면 애들한테 젊어지는 모습도 좀 보이고 그러면 좀 좋으냐!”
그러자 녹진자의 입에서도 투덜거림이 새어 나왔다.
“반로환동이야 뭐…… 세월 역행하는 거, 그거 하늘의 이치에 반대되는 건데…….”
“아, 무위자연이라메! 그냥 내버려 두니까 육체 부조화가 맞아 들어가면서 몸이 이렇게 되던걸. 그게 조화지, 반로환동 일부러 안 하고 버티는 게 조화냐? 애들 똑바로 안 가르쳐?”
“그 나이에 젊은 처자들한테 시선 받는 게 좋으쇼?”
녹진자의 말은 좀 궁색한 것이 사실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무슨 홍등가만 골라서 다닐 일 있냐! 네놈이 나보다 먼저 망령 들다니!”
“허, 생긴 건 젊어도 엄연히 나이는 선배가 윗길이 아니셨소?”
둘의 입 싸움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여기에 저 두 입을 말릴 만한 배분을 가진 사람도 없지 않은가.
해서 광겸이 작게 물어보고 말았다.
“근데 저기, 밥 안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