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반가워! 개떼 안에 어서와 ---(3)
‘이런 치사한 자식들! 그런 실력을 왜 여태 감추고 애까지 기루에 파는 짓을 한 거야? 이것들, 변태냐?’
홍춘의 심정을 알 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만월루주는 두 손 들고 항복했다.
아현을 안고서 아예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홍춘을 보며 탁명옥은 말을 이었다.
“이제 강북련에서 여러분을 모시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광수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겨우 사태를 조금 이해한 홍춘의 입이 열렸다.
“아니요. 성의는 고맙지만, 저는 그런 거창한 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탁명옥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는 전언을 듣지 않았던가.
그때, 광수가 물었다.
“때를 어떻게 이렇게 맞췄습니까?”
그러자 탁명옥은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 손끝에 거지 한 명이 보였다.
매듭을 다섯 개나 묶은 그 거지는 손을 흔들더니만,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 광수 대협! 저희 사형께서 종남과 협의하러 떠나시며 세 분을 잘 보살펴 드리라 하시더이다! 개방의 생색을 잊지 말아 주시오!”
광겸이 마주 소리쳤다.
“우리 형수 개고기 잘 무쳐요!”
“하하하하! 언제 한 번 새끼 거지들 데리고 가지요!”
거지는 손을 흔들며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탁명옥은 손을 들어 한 주루를 가리켰다.
“일단 식사라도 먼저 하시지요. 강북련에서 직접 모실 수 없다 하더라도, 설마 여기 서안에 집 한 채 구해 드리고 싶은 마음마저 뿌리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 그게 뭐…….”
모호한 대답이 나오자 광검의 눈이 빙글 돌아갔다.
“아, 뭐, 막내도 결혼한다잖아! 큰집 있어야지!”
탁명옥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호, 두 자루 역날 만도의 신기를 지니신 천조쌍도(天爪雙刀) 소협께서 성혼을 하신단 말입니까?”
그러자 역질문이 나왔다.
“천조쌍도…… 요?”
탁명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개방의 큰어른이신 황안 장로께서 소협의 쌍도술을 그렇게 표현했답니다. 화산에서 지난 하룻밤 사이에 먼저 소문이 나서 저희도 바로 오늘 아침에야 소식을 받았습니다. 수백의 공격을 한꺼번에 마주 받아 내는 모습이 마치 하늘의 수백 개 발톱이 두 자루 칼에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고 하시더군요.”
광겸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연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수백 개 하늘 발톱을 쏟아내는 쌍도……!’
같이 사는 게 고민된다는 때가 채 이각이 지나기 전의 일이었는데도 강북련의 힘은 이렇게나 컸다.
그래서 홍춘이 눈을 돌렸다.
“그럼, 막내 삼촌이 혼인한다는 그 아가씨가 바로…….”
연미는 그제야 홍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할 수 있었다.
“이제야 인사드려요. 앞으로…… 동서 형님으로 깍듯이 대접해 드릴게요.”
며칠 밤을 새우던 고민은 죄 어디로 갔는가.
연미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누구 하나 그 마음을 훔쳐보는 사람도 없는데.
홍춘은 어정쩡한 웃음으로 견자단 삼 형제와 연미를 둘러보며 말했다.
“소저, 안 말릴 테니 잘 생각해 봐. 칼잡이 마누라가 어떤 생을 사는지 난 잘 알거든.”
그 뜻밖의 말에 탁명옥은 점잖은 체면에도 불구하고 입을 조금 벌렸고, 광겸의 반항이 있었다.
“아니, 형수! 나더러 빨리 장가가래메!”
홍춘은 아현을 이끌고 평소 가장 들어가 보고 싶다 손꼽았던 서안제일루로 들어서며 말했다.
“막내 삼촌은 가만히 있고, 어차피 여자 팔자는 ‘알았어요’라는 승낙 그 한마디로 부엌데기가 되는 건데! 소저, 정말 여기 이 개들하고 한 식구가 될 거야?”
연미는 잠깐 망설였다.
이상한 성질의 이상한 구성원들인 가족.
강북련, 구대문파, 마교까지…….
꼬이기도 참 복잡하게 꼬였다. 연미는 다시 광겸의 얼굴을 보았다.
광겸은 그냥 헤벌쭉, 순진하게 웃고 있었다.
연미의 손을 누군가 잡고 흔들었다. 작은 손, 아현이었다.
“우리 숙모 돼 줄 거죠?”
연미는 픽, 웃었다.
옛날, 어린 기억에 아마 아버지가 그랬던 것 같다. 그때는 여산 자락의 장원이 그렇게 크지도 못했고, 총관에게 가족을 부양할 만큼의 녹봉을 줄 형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연미의 아버지는 웃으며 흔쾌히 총관 직을 맡았다.
연미의 웃음은 아버지가 그때 보여 준 웃음이었다.
“난 여기 분들과 이미 같이 살부지한을 풀었습니다. 이제 같이 의지할 곳도 없고, 함께하고 싶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홍춘의 대꾸가 이어졌다.
“반가워! 개 같은 인생에 합류했어!”
광검이 투덜거렸다.
“거, 개도 개 나름이지. 쓸 만하다니까 꼭 개는 자꾸 들먹여, 들먹이길. 형수, 오랜만에 전 식구 다 모여 밥이나 먹자고!”
말마따나 정말 오랜만이었다.
“홍춘이 원래 가난하게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엔 유복했죠.”
그렇다면 집안이 갑자기 망한 경우인데, 탁명옥은 광수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더 힘들었겠군요.”
죽엽청이 든 잔은 비워지지 못하고 손가락 사이에서 희롱만 당하고 있었다. 광수의 투박한 손가락에 든 것은 서안제일루의 명물, 염옥잔(炎玉盞)이었다.
불꽃처럼 붉은 옥이 대체 있기는 한가.
천산북로가 아닌 남로, 즉 사막으로 가면 춘추전국 시대에 화씨의 벽으로 유명한 옥 생산국이 나온다. 군소 국가 중에 화염산처럼 붉은 옥을 캐내 가공하는 곳이 있는 것이다.
이게 전체가 붉은 것은 아니었다. 푸른 기운이 전체적으로 도는데 날름거리는 뱀의 혀처럼, 붉은색이 한 가닥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걸 사설옥(蛇舌玉)이라고도 했다.
술의 잡맛은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다. 찬 성질도 있고 뜨거운 성질도 있다. 일일이 술마다 맞춰야 한다. 한데 그게 염옥잔에 들어가면 신경 쓸 필요 없이 부드럽게 변한다.
고관대작들이 금주령이 날 때도 여기다 술을 마시면 예외로 쳐도 된다고 할 정도의 명품이었다. 한마디로, 아주 더럽게 비싼 물건이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귀한 것도 광수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광수는 염옥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탁명옥이 홍춘의 무인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본 직후부터였다.
말없이 돌려지던 잔은 결국 객점에 불이 켜지고 나서야 입에 대어졌다.
“홍춘의 아버님은…… 집안을 거의 돌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도 위급지경이긴 했지만 갑자기 문제가 생겨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했죠.”
“흐흠, 안 됐군요. 그런데 식구들을 그렇게까지 돌보지 못할 사정이란 것은 대체……?”
광수는 안주를 들지 않은 채 다시 염옥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마교에서 행해지던 생체 실험은 많은 사람들을 삼켰죠. 그게 한 명의 탈주자도 없이, 행방불명자 수백이라는 그 막대한 양의 보푸라기도 철저하게 감춰졌습니다.”
챙.
광수는 같이 듣고 있던 개방의 부분타주 막걸개와 건배했다.
막걸개의 심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개방이 왜 의와 협에 다른 문파보다 광분하는가.
정보 때문이었다.
천하의 귀.
그런 명성이 무색한 것이다. 마교에서 삼킨 사람들은 누가 제사 지낼까?
“그러다가 삼십 년 만에 사고가 난 건, 아마 지진 때문이었을 겁니다. 대지진이었죠. 사람들은 죽어라 탈출했지만, 결국 전부 다 잡혔습니다. 마교의 위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게 드러나는 것 같았죠. 하지만 사실 거기서 몇 명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
탁명옥은 눈을 빛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마교를 대비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터였다.
“어느 대협이 지하에 숨은 마교를 추적하고 있었고, 게다가 인정도 많아서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사연도 털지 못해 같이 조사하던 중이었습니다. 결국 그 고수는 마교의 생체 실험실 근처까지 찾아왔고, 지진으로 탈출한 사람들을 잡고 돌아가던 마교의 고수들과 충돌했죠. 한데 그 고수는 의외로 살아남았습니다. 마교의 집법당주들은 강했고, 열두 명이 한꺼번에 합공을 했습니다만, 그 고수에게 중상만을 입히고 결국 몰살했습니다.”
실로 놀라운 얘기였다.
전설로 치부되는 마교. 그 마교의 집법당에는 하늘을 쪼개는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마교의 조직 체계를 유지하는 율법을 집행하기 때문이다. 마교의 율법을 거부하는 자를 처단해야 하니, 마교를 거부할 만큼 강한 자를 상대해야 한다.
마교를 거부하는 자가 보통 고수겠는가. 그런 마교 집법당 고수 열둘을 한꺼번에 상대하고도 살아난 고수의 존재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대체…… 그분이……?”
광수는 쓰게 웃었다.
그런 후, 하나의 글귀를 읊었다.
“칼이 휘둘러지나 죽은 죄는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어 붉은 피도 없도다.”
주변에서 탄성이 일었다.
“하늘이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듯이, 그의 검은 사람에게 자비롭도다! 피를 보지 않으니 눈물을 흘리지 않는, 눈물 없는 검! 무혈루(無血淚) 윤홍광 대협!”
탁명옥도, 막걸개도 술이 확 깨는 듯 깜짝 놀라며 외쳤다.
무혈루 윤홍광.
그는 강호 사상 최초로 구대문파나 거대 세력이 아닌 곳에서도 절정을 다시 한 번 넘는 고수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사람이었다.
그런 인생 역정을 가진 사람이니 한두 줄 글귀만으로 표현이 가능한 사람도 물론 아니었다.
벼락같은 칼놀림 끝에는 죽거나 다치는 사람조차 없었다.
거대 문파라는 자존심마저 패배를 인정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윤홍광에게 패했다면 말이다.
검만이 아니라 그 검법을 익히기 위한 손의 수련법부터 해서, 갖가지 전설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십 년 전 마교와의 은밀한 전쟁에서 가장 공로가 컸다.
그 공로를 보상받지는 못했지만.
마교와의 은밀한 전쟁은 아는 사람만이 알 뿐, 개방의 일개 분타주조차 잘 모를 정도로 기억 밑에 가라앉았다.
심지어는 마교와 은밀히 충돌해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탁명옥과 막걸개로서는 당연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 그분이 살아 계시기는 한 겁니까? 어찌 그간 세상에 안 나타나셨답니까? 이건 정말…….”
“아…….”
광수는 쓴웃음만 술잔 속에 뚝뚝 떨구며 화살같이 쏴 대는 질문 공세를 막았다.
“이십 년 전, 마교와의 비사는 지금 거론할 만한 이야기가 못 됩니다. 구대문파 어르신들이 스스로 입을 여시기 전까지는요. 사부님도 그걸 원하셨고요.”
그래서 막걸개도, 탁명옥도 인상을 썼다.
말해 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대체 어르신들이 어떤 식으로 막 나갔길래 그런 정명광대한 분이 입을 함구하라 하셨습니까? 나 참…….”
광수는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때가 되면 스스로들 말씀하실 겁니다. 막 부분타주 같은 세대의 여러분이 실제 일을 해야 할 위치가 되었는데 모르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쨌든…….”
광수는 염옥잔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그분이 탈출한 그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게다가 삼 형제였습니다.”
탁명옥의 입도, 막걸개의 입도 같이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겨, 견자단이 바로…….”
생체 실험에 끌려갔단 말인가!
광수의 입에 대어진 염옥잔 속 죽엽청은 그래서 썼다.
“사부님은 우리를 구하시고 시간을 또 소모했습니다. 마교의 호법들이 입힌 상처가 위중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당한 만령충을 제거하느라 그만큼 시간이 걸린 것이죠.”
그때, 묵묵히 술만 마시던 광검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집에 가시지도 못했소. 시집간 따님, 그 외손녀도 있더랬는데 말이지.”
탁명옥은 입에 광수의 쓴맛이 전염되기 시작했다.
“그 말씀은…….”
“검아!”
광수가 나무라자 광검이 흥,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유언? 사부님이? 언제? 그냥 다 들려줘!”
“혹시 그 따님이…….”
광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홍춘입니다.”
탁명옥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럼, 광수 대협과 같이 사는 저 홍춘이란 여인이 바로 윤홍광 대협의 유일한 혈육이란 말입니까?”
광수는 자조의 쓴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탁명옥은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막걸개도 마찬가지로 입이 궁해졌다.
저 정도로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 일을 하다니. 여기까지만 들어도 사실 집안이 어찌 되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 아닌가!
오죽하면 홍춘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딸을 기루에 팔았겠는가!
윤홍광이 강호에 어떤 일을 했던가.
그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강호 전체가 윤홍광을 배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막걸개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세상에, 천하제일의협의 피를 이어받은 혈육이 사는 꼴이 이렇게 망가지도록 아무도 몰랐다니…….”
말의 표현이 조금 셌다. 하지만 막걸개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호 사람들은 그렇게 욕을 먹어도 쌌다.
“그러니까 홍춘은…… 윤홍광 대협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버림을 받았습니다. 늙으신 사모님과 어린 아현과 같이 길바닥으로 나앉았죠.”
탁명옥도, 막걸개도 황당해 입을 쩍 벌렸다.
당시 윤홍광의 과년한 딸이 시집을 간 곳은 오대세가 중 가장 큰 세를 과시하던 모용세가였다.
얼마나 화제를 뿌렸던가. 윤홍광과 인척을 맺는 집안은 과연 어디가 될까라는 추측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사람 흥분시키는 소재였다.
광수가 여전히 쓴웃음을 지으며 술을 한 잔 더 들이켰다. 역시 썼다.
“사부님은 딱 한 번, 홍춘의 결혼식 날 찾아갔다고 합니다. 홍춘은 그날 울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도 몰랐고.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 돌아오신 후, 이 년 만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윤홍광의 시신도 모용세가의 종복이 연락을 위해 찾아왔다가 그의 모옥에서 발견했다. 그러니 모용세가에서 걸은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진 셈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식으로…… 모용세가가…… 그렇게 황당한 집안이었다니…… 도대체…….”
“나희령이 문제였습니다. 그 악녀에게 모용세가 가주가 비명횡사하고, 그걸 모용세가에서는 사부님께서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세가의 무공을 발전시켜 주리라 기대한 것이 워낙 컸어요. 어쨌든 윤홍광의 사돈 집안이니까. 기다림 끝에 배신당한 셈이나 마찬가지가 된 것이죠. 어쨌든…… 모용세가에서 그렇게 쫓겨난 홍춘은 몸에 지니고 있던 장신구로 간신히 장만한 집도 원인 모를 화재로 잃었습니다.”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뭐라 말하겠는가. 막걸개의 손이 탁자를 쥐고 부들부들 떨렸다.
“사부님에게…… 아주 길게 설명을 들려 달라고 졸라야 할 문제군요. 이건 대체…… 하늘에서 내린 인의대협이라고 떠받들던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합심해서 몰락시킬 수가…….”
광검은 이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킬킬대며 웃었다.
“거대한 모든 것은 작은 것들을 착취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한다!”
실로 구대문파에게는 지독한 모독이었지만, 막걸개도 탁명옥도 딱히 반격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윤홍광이 세상에 어떤 일을 했던가.
변명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광수의 말은 그래도 담담하게 이어졌다.
“둘째야, 그 세상을 저주하는 입 안 다물면 일단 너부터 팬다. 어느 날인가, 사모님이 심하게 아프셨다고 합니다. 약값이 있을 턱이 없어서 진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관계로 홍춘은 아현을 기루에 팔았습니다.”
당시 홍춘의 남편은 그나마 몰래 생활비를 주다가 모용중걸에게 걸려 참담한 수모를 겪은 직후였다.
“그 직후에 우리가 도착한 겁니다. 사부님의 유언을 전할 때, 홍춘은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다 필요 없다고…….”
“감히…… 이해한다는 말을 꺼내기도 두렵군요.”
홍춘의 인생 역정을 누가 위로하겠는가.
막걸개가 말을 덧붙였다.
“제 대사형이신 서안 분타주께서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죠. 나, 후계자 빨리 길러서 빨리 은퇴한다고……. 전 그때마다 대사형에게 감히 핀잔을 던졌는데, 윤홍광 어르신의 참담한 일을 들으니, 사형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세상인심이란 것이 참…….”
탁명옥이 서둘러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어쨌든, 윤홍광 대협의 혈육을 찾았으니, 강북련에서라도 천인검 대협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을 해야겠소. 다행히 아현 아가씨도 밝은 모습이라, 그나마 안심이오.”
그러나 광수는 안심하지 못했다.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만령충 시술을 받은 자가 이렇게 빨리 진화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이제 마교의 움직임은 빨라질 겁니다. 우리도 사부님의 유지를 받들어야 합니다. 같이 바빠질 것이고…….”
죽을 수도 있겠지요, 라는 말을 꿀꺽 삼키는 광수였다.
혼잣말이라도 그런 말은 홍춘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말을 바꿨다.
“홍춘은…… 다시 혼자 아현을 길러야 하겠지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는 이 자리에 없었다.
탁명환이 먼저 진저리를 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견자단주, 우릴 다시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만들 셈이오?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입에 담지도 마시오!”
대답은 없었다.
다시 술잔이 오가며 강호 정세의 미래에 대해 화제를 옮겨 갔지만, 광수의 마음속 염옥잔은 채워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