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호는 집무실을 두드렸다.
“들어와.” 연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은호의 눈짓에 다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다크 브라운과 와인 색이 잘 어우러져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집무실의 책상에 연호가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는 문이 열리고 다휘와 은호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다, 이쪽에 앉아.”
연호가 전날 저녁, 다 함께 앉아 있었던 소파를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은 은호와는 달리 다휘는 쭈뼛거리며 어색한 행동을 보였다.
“다휘야. 식사는 입에 맞았어?” 연호는 그녀가 이곳에 잘 적응을 하고 있는지 걱정을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네. 그런데 제가 원래 아침을 간단하게 먹는 편이라서··.”
평소 싫은 말을 잘하지 않는 다휘는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녀의 목소리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연호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방에 얘기해 둘게.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다휘의 앞으로의 일 때문이야.”
“앞으로요··?”
다휘는 연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호는 그런 다휘를 보며 자신의 책상에서 서류 파일을 들고 왔다.
“다휘는 지금 NEU 기획사에서 작곡가로 일하고 있지. 당장 내일이 월요일이라 출근도 해야 하고. 아직 회사 쪽에 연락 안했지?”
연호의 물음에 다휘는 그의 의도를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표님께 아직 연락 안 드렸어요. 아. 그리고·· 어제 말 못 한 게 있는데 사실 어제 축가 부를 가수 분이 오기로 했었는데, 웨딩홀에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하셨거든요. 입원을 한 달 반 하신다고 들었어요.”
“어?”
“사고? 다휘야, 그런 말은 어제 안 했잖아?”
다휘의 말에 연호와 은호가 멈칫했다. 은호의 물음에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응··. 어젠 정신이 없어서 얘기 못 했어.” 다휘가 대답했다.
“어디 병원으로 입원했는지,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알아?” 연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는 무언가 집히는 것이 있는 듯, 표정이 심각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어·· 아니요. 매니저에게 전화해서 물어볼게요.”
“그래.”
다휘는 핸드폰을 꺼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간의 신호음이 들리고, 호윤의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매니저님. 저 다휘에요.”
[아, 다휘 씨! 어제는 왜 연락이 안 됐어?]
호윤의 매니저는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스피커로 전해져왔다.
“일이 조금 있었어요. 죄송해요. 호윤 씨는 좀 어때요?”
[아직 의식은 안 돌아왔어. 결혼식은 잘 끝났지?]
다휘는 굳이 사고의 일을 얘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충 얼버무리고 연호가 궁금해 하는 호윤의 일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네··. 뭐. 근데 호윤 씨는 무슨 사고를 당한 거예요?”
[어제 내가 회사 회의 참여하느라 호윤이가 혼자 운전해서 갔거든. 나도 병원에서 연락받고 간 거라 정확히는 모르는데, 신호 반대쪽에서 차가 그냥 박아 버렸다나봐. 근데 그 쪽 차에는 사람이 없었대.]
“사람이 없었다구요?”
[응. 차량 번호 조회 했는데, 도난 차량이라고 떠서.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
다휘는 연호에게서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해달라’고 쓴 쪽지를 건네받은 후,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여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호윤 씨는 얼마나 다친 거예요?”
[골절이랑 뇌에 약간 손상이 갔대. 그래서 의식을 당분간 못 찾을 거라고··. 대표님께서 매스컴에 휴식기라고 선수 치셔서, 다른 기사는 없어.]
“네··. 어느 병원이에요? 제가 나중에 찾아뵐게요.”
[여기 BW 병원이야. D 사거리 쪽에. 호윤이가 가족이 없어서 혼자 있는 게 영··· 신경 쓰이네. 하아.]
매니저의 한숨 섞인 걱정에 연호가 급히 펜을 휘갈겨, 다휘에게 쪽지를 다시 내밀었다. 다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호가 내민 쪽지에 적힌 대로 읽었다.
“제가 그 병원 관계자를 알아요. 호윤 씨 일은 걱정 마세요. 제가 신경 쓸게요.”
[다휘 씨가? 그래··. 나야 그렇게 해 주면 고맙지. 알겠어. 그럼 내일 회사에서 봐.]
“네, 매니저님. 쉬세요.”
다휘가 통화 종료를 누르자, 연호가 은호를 바라봤다.
“은호야. 누가 접근 못 하게 애들 셋 붙여놓고, 담당 의사는 우리 쪽으로 바꿔.”
“네, 보스.”
연호의 지시에 은호가 고개를 한 번 끄떡이며 대답했다. 이어 연호는 다시 다휘를 바라봤다.
“다휘야. 그 사람 본명은?”
“최윤호 라고 해요.”
“그래. 은호야.”
“알겠어요.”
은호는 연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재빨리 집무실을 나갔다. 영문을 모르는 다휘는 연호를 보며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다휘야, 표정 풀어. 얘기 해 줄게.”
“네··.”
그녀의 표정에서 심통을 느낀 연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그는 편한 자세로 소파의 등에 몸을 맡겼다.
“어제 네가 들은 우리의 적대 관계에 있다는 조직의 이름이 For Luciano야. 휘원이를 노린 게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한 건지, 개인적인 원한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도 우리랑은 달리 꽤 과격한 일들도 많이 하는 편이고, 그 쪽 보스가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보거든. 작은 풀 정도로 봐. 꺾으면 거기서 멈춰버리는 정도로.”
연호는 그의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지, 주먹을 꽉 쥐었다.
다휘는 생명의 가치를 그런 식으로 여기는 For Luciano 보스의 이야기에 치를 떨었다. 그가 바로 오빠를 죽인 원수였다.
“그 사람도 휘원이의 결혼식에 가는 길이었다면, 사고도 그쪽에서 냈을 가능성이 높아. 외부인이 있으면 안 되니까 차단해야지. 그리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니까 빠른 시일 내에 암살자를 보낼 거야. 특히 지금처럼 의식을 잃었으니까 더 위험하지. 그 쪽은·· 내가 관리할 테니까 걱정 하지 마.”
연호는 다휘를 안심시킬 목적인지,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휘는 그의 미소를 볼 때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저기, 감사해요.” 다휘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중얼거렸다.
집무실이 조용한 탓에 작은 목소리임에도 연호에게 제대로 닿은 다휘의 말에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계속 띠고 있었다.
“그래. 그럼 앞으로 다휘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해보자. 일단 휘원이를 포함한 죽은 사람들의 장례는 치러야지. 다른 사람들은 전부 유가족에게 돌려보냈어.”
연호는 다휘에게 들고 온 서류 파일을 내밀었다. 사망자들의 명단이었다.
가장 위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 현휘원, 이은편, 현주혁, 강백연의 이름을 본 다휘는 임시방편으로 막아뒀던 눈물을 다시 글썽거렸다.
“유령 회사를 만들어서 거기서 만든 폭죽을 결혼식에 사용했는데, 그게 불량이라 큰 사고가 나서, 결혼식에 있는 전원이 사망했다고 사고를 만들었어. 찝찝하긴 하지만, 우리 쪽에서 한 일이 아니라 이 정도밖에 하지 못했어. 미안해, 다휘야.”
연호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다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는 다휘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묻게 했다.
“어쨌든 거기는 그렇게 위험한 마피아들이니까··. 나는 다휘가 당분간은 여기에 살았으면 좋겠어. 작곡가니까 자택 근무도 가능할 것 같은데. 회사에 가야 되는 일이 있을 때는 우리가 데려다주면 되고. 어때, 다휘야? 그 쪽에서 네가 살아있다는 걸 알면 네가 제일 위험할 테니까.”
연호의 제안에 다휘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채로 고개를 들었다.
연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위험하다는 사실에 놀란 것도 아니었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은근히 바라고 있던 소망을 꿰뚫어봐서 놀란 것도 아니었다.
“연호·· 오빠···.”
기뻤다.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지만 자신이 머무를 장소가 있다는 것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괜찮아, 다휘야. 내가·· 널 지켜줄게.”
연호는 그가 몇 년간 그려왔던 다휘와의 재회를 실현시키는 순간이었다.
비록 휘원은 없지만, 그를 대신해서라도 다휘를 행복하게 해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맴돌기만 했는데, 이제야 한 사람으로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유 환. 당신이 다휘를 노리는 이유 같은 건 몰라. 나는 최선을 다해서 지켜 보일거야.’
연호가 다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렇지만 그녀를 토닥이는 손길은 더욱 부드러웠다.
다휘는 은호와 연호를 알게 되어, 자신의 곁에 있어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 *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그의 갈색 머리카락과 닮은 브라운 정장을 입은 남자가 검은 리무진 앞에 멈췄다.
그의 주위에는 새까만 정장을 입은 덩치가 큰 남자들이 서있었다.
“연호는?”
“본부에 계신다고 합니다.”
“좋아. 출발하자!”
“일단 탑승부터 하십쇼.”
남자의 밝고 명랑한 목소리와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들의 분위기는 확연히 차이가 났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밝은 웃음을 흘리며 리무진에 올라탔다.
남자를 태운 리무진이 부드럽게 공항을 빠져나갔고, 경호원들은 태운 중형 차량이 그 뒤를 이었다.
“이 아이입니다.”
“우와, 예쁘다. 정말 이 애가 휘원이 동생이라고?”
“예. 본부에서 보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NEU 기획사 작곡가? 연예인 같은걸 해도 될 얼굴인데? 아깝다.”
그는 서류 속의 다휘의 사진과 이력을 보며 감탄에 탄식을 이어나갔다.
“로빈 님. 보스께서 오후에는 다 같이 암살부로 갈 계획이라고 하십니다.”
“그럼 난 안 갈래. 거길 내가 왜 가!”
그의 수행원의 이어지는 보고에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인지, 아예 고개를 돌렸다.
“로빈 님. 혜혁 님과 아직 화해 안 하셨어요?”
“화해 아니야. 걔가 잘못 한 거거든?”
“이번 기회에 말씀 나누시면서 화해하시면 되겠네요.”
그, 로빈은 질색하는 표정을 하고서 수행원을 바라봤다.
“도담 형이 시킨 거지?!”
“크흠··· 본부까지 1시간 정도 걸릴 예정이니, 잠시 쪽잠이라도 주무십쇼.”
“아!! 도담 형 진짜 싫어. 너도 완전 싫어!”
“안 그래도 도담 님께 전화 드릴 예정이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도담 형은 스승님이니까. 존경한다는 거지.”
수행원이 핸드폰을 꺼내보이자, 로빈은 그제야 입을 삐쭉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린 아이 같은 면모가 많이 드러나는 그는 Bloody Ellipse의 현재 보스 차 연호의 사형[같은 스승을 둔 제자들의 관계]이었다.
로빈은 모진 생각을 하면서도 도담을 위해 산 선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도담의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표정을 상상하며, 그는 다리를 쭉 뻗고 조금은 불편한 자세로 잠에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