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호와 스쳐지나가 침대로 다가선 은호는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길 바라며, 할 수 있는 최대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침대의 끝에 걸터앉으며 손전등과 체온계를 들고 있지 않은 손을 다휘의 손 위로 겹쳐 올렸다.
“안녕, 다휘 양. 내 이름은 서 은호라고 하고, 이 곳 의료부의 책임자야. 아까 네가 많이 놀라서 그런지, 체온이 좀 떨어졌었어. 근육도 딱딱해졌고. 잠깐 좀 살펴볼게. 몸에 힘주지 말고 있어.”
“아, 네, 네···.”
얼떨떨한 표정의 다휘가 떨리는 눈동자로 은호를 살짝 올려다봤다.
은호는 미소를 잃지 않고 먼저 그녀의 체온을 쟀다. 삐 하고 단조로운 기계음이 들렸고, 은호는 다휘의 체온이 정상 범위에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이어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확인을 해나갔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세 남자는 왠지 어두운 표정이었다.
“··· 연호 형. 회의 여기서 할 거야? 다휘가··.”
우목이 난감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돌려 연호를 바라봤다.
연호도 그와 비슷한 마음인지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매만지며 고민을 했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지. 다휘도 알 건 알아야하고, 이제 우리랑 있어야 할 텐데···.”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다휘가 쉽사리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의 정체도 가볍게 수긍하지는 못할 것이다. 요즘 세상에 ‘마피아’라니···.
심지어 그녀의 오빠인 휘원이 이 조직의 일원인 것도 모르는데, 모든 사실을 알리기에는 성급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한편, 다휘의 진찰을 끝낸 은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연호들에게 다가갔다.
다휘는 갈아입혀져 있는 옷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은호가 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보스··아···.” 평소대로 연호를 보스라고 부르는 버릇이 튀어나온 은호가 말을 멈칫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직 다휘가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다휘를 힐끔거리며 계속해서 이어갔다.
“다휘 양 상태는 이제 괜찮아요.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회의 여기서 하실 거예요?”
“응··. 담이 형이 올 때까지 기다릴까 했는데. 은국 형님도 나가버렸고···.”
담요를 두른 다휘가 은호의 손짓을 따라 테이블에 앉았다.
자신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우목과 진탁의 시선이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연호는 잊고 있었던 뭔가를 떠올리며 다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다휘야. 여기 방은 당분간 네가 쓸 방인데, 저기가 욕실이야. 지금 따뜻한 물 받아뒀는데, 일단 씻고 올래? 욕실 안에 네가 갈아입을 옷이라든가 수건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씻고 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다시 올게.”
연호가 다휘와 눈을 마주치고서 말했다. 이어 방을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목과 진탁, 은호도 일어났다.
순간, 다휘는 연호의 검은 양복 자켓 끝자락을 붙잡았다. 그는 당겨지는 느낌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 다휘를 내려다보았다.
다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앙 다문 입술이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목과 진탁, 은호는 연호가 걸음을 멈추자 뒤돌아 두 사람을 바라봤다.
연호는 의자에 앉아 있는 다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그녀의 백발에 가깝게 탈색한 긴 머리카락의 끝자락을 손에 감았다.
“저기··. 무, 무서워요···. 여기서 기다려주시면·· 안 돼요?”
어렵게 말을 꺼낸 듯, 다휘는 연호와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고 있었다.
연호의 옷을 붙잡은 손이 부들거리며 떨렸고, 그녀의 진회색 눈동자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가족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본 아이.
연호는 다휘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혼자 남겨지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팔을 뻗어 다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자신을 다정하게 만져주는 느낌에 다휘가 고개를 들어 연호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꼬리가 휘어질 정도로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다휘가 글썽거리는 눈물을 흘렸다.
“응. 기다려줄게. 진탁 형, 우목이, 은호. 1시간 내로 데려갈 테니까, 내 집무실에서 회의 준비해줘. 담이 형이랑 은국 형님도 찾아와주고.”
“알았어요. 저녁 시간도 같이 늦출게요.”
연호의 지시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가 대표로 대답을 하면서, 세 사람은 지금 방을 나가서 각자 할 일에 대해 얘기했다. 곧 세 사람이 나가자, 나름 차 보였던 방이 허전해졌다.
“자, 다휘도 씻고 오자.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연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마피아 조직의 보스답지 않게 순수함을 가진 웃음은 조금도 위화감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따스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자상한 보스이지만, 그것도 동료에 한해서 라는 것은 조직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휘는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휘청거리는 몸에 적응하지 못했다.
“조심해. 혹시 목욕하다가 무슨 일 생기면 소리 질러! 내가 눈 감고 들어갈게.”
그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다휘를 내려다봤다.
다휘는 그의 말에 입가를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 아직 눈물을 전부 닦아내지 못해, 웃긴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연호는 그런 다휘를 다정하게 내려다봤다.
* * *
한편, 다휘의 방에서 나온 세 사람은 계단을 타고 내려와 건물을 나가고 있었다.
우목은 회의 준비를 위해 자신의 방으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진탁은 은국을, 은호는 도담을 찾아보기로 역할 분담을 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의외의 장소에서 도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도담·· 님? 어라? 헉?!” 은호가 입가를 가리며 작게 외쳤다.
간부 숙소 건물의 앞에서 쪼그려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담의 모습에 놀란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그의 기운 없이 움츠린 자세, 그리고 이내 고개를 든 도담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것에 놀란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 너희들.” 잔뜩 갈라진 목소리의 도담이 세 사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살짝 든 고개로 보이는 처참한 모양에 진탁은 서둘러 자켓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을 빼내 들고 도담에게 건넸다.
“도담 형··.”
“아니. 됐다. 눈물은 그친지 좀 됐어. 들어가자.”
도담이 무릎을 붙잡고 일어나면서 물기가 채 가시지 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손수건을 내민 손이 민망하게 느껴진 진탁은 어색하게 손을 거둬들였다.
“아, 도담 형. 저희 회의 시간이랑 장소 변경됐어요. 1시간 후에 연호 형 집무실에서요.”
우목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도담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그에 도담은 걸음을 멈추고 살짝 뒤를 돌아 세 사람을 힐끗 보며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1시간 후에 가도록 하지. 그녀의 상태는?” 도담이 물었다.
“아, 다휘 양 말이죠? 저체온증이 경증으로 보여서 처치했어요. 지금 보스가 같이 있어주고 계세요. 회의에 같이 참석 할 거예요.”
그의 물음에 은호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도담은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 건물의 입구에서 벗어나 세 사람을 지나쳐갔다.
“아, 도담 형! 어디 가요?!”
“담배.”
자신들을 지나쳐가는 도담을 향해 진탁이 그를 불러 세워봤지만, 도담은 짤막한 단어 하나로 그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겼다.
“네에?! 도담 님, 금연 중이잖아요?!” 은호가 도담을 향해 외쳤다.
분명 오늘로 금연 6일 째인 도담인데, 금연을 그만두겠다는 건가?
그런 은호를 향해 우목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작게 속삭였다.
“은호야, 저기에··.”
“산더미네.”
그곳에는 여러 가치의 담배꽁초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은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어 진탁이 두 눈을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도담 님! 1시간 후에 회의는 꼭 오셔야 해요! 그리고 니코틴이 단시간에 몸속에 고농도로 주입되면 거부 반응이··”
“시끄러.”
시작되려는 조직의 주치의나 다름없는 은호의 잔소리를 단 한마디로 틀어막은 도담은 유유히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목 님, 진탁 님! 두 분도 마찬가지잖아요. 담배 언제 끊으실 거예요?!”
“아아. 은국이 찾으러 가야지.”
“형님. 그럼 있다가 회의에서 뵙죠.”
“아, 진짜! 이 사람들이?!”
그리고 화살표의 방향이 자신들에게 꽂히자, 우목과 진탁은 은호의 잔소리를 뒤로 하여 도담이 지나간 길을 걸어 나갔다.
은호는 주먹을 꽉 쥐고, 이젠 다휘도 있으니 그녀를 물고 늘어져서 칙칙한 남자들의 흡연을 꼭 끊게 하리라고 다시 굳게 마음을 먹었다. 은호의 다짐이 꼭 성공하기를!
* * *
1시간 후, 연호의 집무실.
“후··. 형님은?”
집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굉장히 지쳐 보이는 민환이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며 들어왔다.
그는 누구든지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라는 듯 집무실을 쭉 둘러보았다.
연호가 없는 그의 집무실의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낮은 테이블과 1인 소파, 그리고 테이블의 긴 면을 따라 각각 기다란 소파가 1개씩 놓여있었다.
소파로 다가가 빈자리에 찾아 앉은 민환은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다.
“병원에서 온 거야? 약품 냄새 으으··.” 민환의 옆에 앉아있던 은호가 코를 찌르는 냄새에 코를 조금 가리며 말했다.
“아. 그렇게 심해? 끙··.”
은호의 반응에 민환은 난감해하며 검은 양복 자켓을 벗어 팔에 걸쳤다.
그의 표정에 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파의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보스는 다휘 양이랑 곧 오실거야. 병원 쪽은 어때? 생존자가 있어? 휘원 님이나 은편 언니나···.”
“아··. 안타깝지만 생존자는·· 없어. 그 여자가 유일해.”
하얀 가운의 앞섶을 꽉 쥐고 있던 은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민환을 바라봤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다휘 양이 유일한 생존자라니?”
“··· 다들 은호에게 얘기하지 않은 거야?”
민환은 은호의 물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함께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을 둘러봤다.
진탁과 우목은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바닥을 내려다봤고, 은국은 팔짱을 끼고 꼿꼿이 허리를 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시선의 끝에는 도담도 비춰졌지만, 민환은 기운 없어 보이는 도담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줘야 알지. 오빠가 아니어도 되니까 누구든 제게 설명 좀 해주실래요? 다휘 양이 오기 전에.”
은호의 어둠이 앉은 푸른빛 눈동자가 모두를 훑었다.
그녀의 맞은 쪽 소파에 앉은 은국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지긋이 바라봤다.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메시지가 오갔는지,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행동에 은국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은 함께 연호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진탁은 나간 두 사람의 자취를 좇으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작게 숨을 내뱉었다.
“은국이라면 잘 설명하겠지.” 진탁이 말했다.
그의 말에 우목과 민환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가 휘원 형을 워낙에 잘 따랐으니까요.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할 텐데··.”
우목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휘원을 유독 잘 따랐던 은호였기에, 모두가 은호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을 걱정했다. 이어 민환이 도담을 다시 바라봤다.
“저기, 도담 형님. 로빈 형은 어떻게 됐습니까?”
“내일 오후에 들리겠다는군.”
“아··. 네. 그렇군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머릿속에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 바보 같은 웃음을 짓고 키만 큰 남자가 떠올랐다.
적에게 습격을 할 때마저 바보처럼 행동했던 그의 모습.
‘좋아! 들어가자! 어라? 나 총이 어디 갔지? ··· 으악! 잠깐만! 항복, 항복!! 공평하게 해야지! 나 총 없는데!’
“하아···.”
“에휴··.”
네 사람의 한숨이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자신들의 보스의 친형이나 다름없는 그, 로빈을 생각하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