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큰 규모의 저택이 숲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에는 영역의 경계를 표시하는 철제 울타리가 빙 둘러져 있었다.
그들을 태운 검은 중형 차량은 길을 따라 커브를 돌아, 길의 끝에 있는 출입문을 향했다.
철제 울타리가 유일하게 없는 입구에는 검은 정장 차림의 두 남자가 서있었다.
입구에 차량이 서서히 멈추자, 한 남자가 다가와 운전석 쪽 창문을 두드렸다.
징 하고 창문을 내린 진탁은 아무 말도 않고,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를 지긋이 바라봤다.
진탁과 눈을 마주친 그는 차량에서 몇 걸음 물러나서 차량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이어 들리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진탁은 창문을 올리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로부터 몇 분 후, 차는 부드럽게 멈췄고 진탁이 뒤를 돌아 연호를 바라봤다.
“그 아이는 내가 들까?”
“아뇨,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형은 주차 부탁드려요.”
그는 연호와 다휘를 번갈아보며 물었고, 연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기댄 다휘가 깨지 않도록, 우목을 향해 “문 좀 열어줘.” 라며 조용히 말했다.
우목은 차 문을 열며 동시에 내렸고,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다휘를 안아 올린 연호가 조심히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연호의 뒤로 은국이 정장 자켓을 벗어 팔에 걸치며 내렸다.
조수석의 문이 열리며 도담까지 내리자, 운전석의 진탁은 차가 몇 대 없는 주차장에 주차하고서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택 중 가장 높이 솟아있는 지붕이 있는 출입문 앞에 모두가 서있었다.
이윽고 진탁 다가와 함께 서있자, 연호는 자신의 앞에 선 4명의 남자들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담이 형, 로빈 형에게 언제쯤 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민환이에게 연락해서 상황 파악도 부탁해. 그리고 우목이는 은국 형님이 말한 그들의 신무기에 대해 알아봐줘. 진탁 형은 선우에게 연락해서 복귀하지 말고 거기서 대기하라고 전해주세요. 은국 형님은 도하 씨에게 연락 부탁드려요. 그리고 다들 6시까지 내 집무실로 모여 줘. 간단하게 회의 할 거야.”
연호의 지시가 떨어지고, 모두가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제각기 흩어졌다.
그렇게 혼자 남은 연호는 다휘를 안은 팔에 다시 힘을 주고, 건물의 안으로 들어갔다.
황금색의 화려한 문을 열자, 따뜻한 노란 빛이 저택 내부의 여기저기를 비추고 있었다.
1층에 들어서자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연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연호는 미소로 일관하면서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건물의 중앙을 관통하는 유리관 형태로 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띵- 하는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연호는 양쪽으로 쭉 펼쳐진 복도의 붉은 카펫 위를 걸었다.
넓은 복도에 비해 문의 수는 굉장히 적은 편이었다.
짙은 고동색으로 칠해진 문들 중 한 곳을 열었고, 그는 핑크와 그레이가 잘 어우러진 방으로 들어섰다.
“어··? 왔어요, 보스?”
방 안의 티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있던 남색의 머리카락의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났다.
“그래. 일단 이 아이 좀 잠깐 봐 줘. 다친 덴 없는지.”
연호는 창가에 놓인 연한 핑크색의 침대 위로 다휘를 조심스레 놓았다.
푹신한 침대에 뉘인 다휘는 조금 뒤척거렸다. 이어 연호는 다휘의 작은 발이 들어가 있는 푸른색의 구두를 벗겨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디어디~ 어라? 생각보다 휘원 님이랑 닮지는 않았네요?”
“응·· 그치? 그래도 분위기는 꽤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생겨버려서 성격이 변해버릴 지도 모르겠다. 깨어나게 되면 정신적으로 잘 케어 해줘야 할 거야.”
“흐음···.”
여자는 연호의 대답을 들으며 자신의 턱을 쓸었다. 그리고는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의 주머니에서 체온계를 꺼내 다휘의 귀에 살며시 꽂아 넣었다.
삑 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임무를 다한 체온계가 내는 소리에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기판을 바라봤다.
이어 목에 걸고 있는 청진기로 심음도 확인하고, 간이 혈압계를 꺼내 혈압도 체크하더니 고개를 돌려 연호를 바라봤다.
“·· 보스, 여기 난방 좀 틀어줄래요? 그리고 옷장 안에 담요 큰 거 있어요. 그거 가져다주시고, 주방에 연락해서 따뜻한 물 좀 가져오라고 해요.”
“아. 그래.”
여자의 말에 연호는 서둘러 문 주위의 온도 조절기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리고 핑크색 우드의 큰 옷장을 열었다.
그의 지시가 잘 지켜졌는지 알록달록한 옷들이 옷장 안에 걸려있었고, 그 사이에서 옅은 회색의 담요를 찾아낸 그는 침대 옆에 앉아 다휘를 진찰하고 있는 여자에게 넘겨주었다.
“가벼운 저체온증인 것 같아요. 많이 놀란 것 같은데··. 근육도 경직되어있고. 일단 수발 들어야하니까 사람 둘도 불러주시고요.”
“알았어.”
연호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고용인들을 관리하고 있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호가 남자와 전화를 하는 동안, 여자는 연호에게서 받은 담요로 다휘를 덮은 후 잠시 서서 고민을 하더니 옷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하얀 면 티와 검은 트레이닝 바지를 꺼내 다휘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담요를 살짝 걷어내어 다휘가 입고 있는 하늘빛의 원피스를 조심히 벗겨내기 시작했다.
곧 다휘의 하얀 살갗이 드러나면서 챙겨둔 옷을 입혔다.
하늘빛 원피스의 군데군데 묻어있는 핏자국을 보며 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옷 밖으로 드러난 몸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몸에도 핏자국이 눌러 붙어있었다.
“저기, 은호야. 지금 올라오고 있대. 그럼 다휘는 너한테 맡길게.”
연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남색 머리카락의 여자를 ‘은호’라 부르더니 뒤를 돌아 굳게 닫힌 문을 향해 걸었다.
그의 행동에 은호는 한 쪽 눈썹을 치켜떴다.
만약 다휘가 눈을 뜨게 된다면 자신을 포함한 모르는 사람들 천지일 텐데,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어서 나가려는 연호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보스는 여기 있어야죠. 여기서 다휘 양이 아는 사람은 보스밖에 없다고요.”
은호는 그대로 그를 잡아당겨 침대 곁의 의자에 앉혔다.
“아··. 미안.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네. 그럼 회의를 여기서 할까···.”
“여기서 회의 하실 거면 다휘 양이 중간에 깨서 들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저 수건 좀 적셔 올 테니까, 잠깐 좀 보고 있어요.”
그녀는 하얀 가운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서 방 안의 화장실로 들어갔고, 연호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팔과 다리를 쭉 뻗으며 뻐근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빼서 아이보리색 바탕에 그려진 기하학적 무늬의 천장을 보며 한 번 더 한숨을 내뱉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막막한 기분만 들었다. 그가 답답한 마음에 천천히, 그리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다휘와의 첫 만남은 이것보단 좀 더 로맨틱할 줄 알았고, 휘원과의 이별도 이것보단 마음이 덜 아플 줄 알았다.
모든 게 그의 예상의 범위를 넘기고 있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그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어 부스럭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은 연호는 다휘를 향해 의자를 끌어 당겨, 가까이 갔다. 그리고 다휘의 여전히 차가운 손을 어루만졌다.
멀리서만 지켜봐왔고 이야기만 무수하게 들어 온 휘원의 동생, 현 다휘.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하며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 * *
몇 분 후.
띠링-
무기부에서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우목이 주머니 속에서 울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 회의 장소 변경?”
간부의 단체 채팅방에 연호가 보낸 메시지였다.
「BOSS : 다들 미안! 회의는 다휘네 방에서 할게´Д`; 6시까지 시간 맞춰서 와.」
「BOSS : 507호야 ゚ ▽ ゚ ;」
그 아래에는 몇몇이 불평을 하는 메시지가 있었지만, 다들 큰 불만은 없어보였다.
우목은 연호의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고 가볍게 웃으면서 알겠다고 간단히 답장을 했다. 그리고서 6시가 되기 전까지 30분 정도 남은 것을 확인했다.
무기부에 신무기에 대해 물어봤더니, 아직 들어온 정보가 없다고 죄송하다는 말만 들었다.
건수를 건지지 못한 우목은 혀를 차며 “어디서 정보를 얻어야 하나··” 라며 벽에 기대어 생각에 빠졌다.
어라? 그러고 보니·· 아까 차에서 은국 형이 혜혁과 형주에게서 신무기의 정보를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우목은 들고 있던 핸드폰의 채팅 앱의 친구 목록에서 형주의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이내 전화를 걸어야 하나 하고 손가락을 멈칫, 하며 고민이 들었다.
그러나 결혼식장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과 겨우 살아남은 한 여자를 생각하니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뚜르르.. 뚜르르..
[뭐야?]
형주의 날이 선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렸다. 신경이 날카롭기로 유명한 형주의 목소리에 잠시 움츠러들었다.
그의 성격에는 당해낼 사람이 없어서, 그의 상사인 혜혁도 형주만큼 성격이 좋지 않다고 유명하지만 형주에게는 늘 진다고 한다.
[전화 해놓고 말이 없어? 짜증나게.]
“아, 혀, 형주 형. 나야. 우목이.”
[알어. 내 핸드폰은 장식이냐? 니 이름도 안 뜨게?]
등으로 왠지 모르게 서늘한 땀 한 방울이 흐르며, 우목은 침을 꼴깍 삼켰다. 평소보다 더 예민한 목소리와 말투인 걸 보니 분명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일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뭐·· 다른 게 아니라. 은국 형한테 알려준 그 녀석들의 신무기 정보, 나도 알려달라구··.”
혹여 귀찮다고 화를 내며 전화를 끊을까봐 우목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는 스피커 너머의 정적에 자꾸 목이 말라와 또 침을 삼켰다.
[··· 톡으로 보냈으니까 귀찮게 하지 마. 끊는다.]
그리고 전화를 끊으려는 듯 멀어지는 형주의 목소리에 이어 통화가 끝난 벨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허무하게 얻어낸 정보에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형주와의 개인 채팅방으로 들어갔다.
「공형주 형 : For Luciano-안개의 습격.pdf」
「공형주 형 : 그리고 도선우는 왜복귀취소됐?」
「공형주 형 : 제발좀.. 꺼지라해」
형주가 보낸 파일명을 보고 우목은 잠시 손을 멈칫했다. 그가 보낸 메시지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For Luciano는 자신들이 지칭하는 ‘그들’ 혹은 ‘그 녀석들’, 또는 ‘그 자식들’ 등등 간접적으로 말하는 조직의 이름이다. 그럼 뒤의 ‘안개의 습격’이 신무기의 이름이란 건데···.
“안개는 우리 아닌가?”
자신들 조직의 보스와 2인자를 제외한 간부들을 ‘8인의 안개’라고 부르기 때문에 잠시 의문이 들었다. 조금은 진지해진 표정으로 핸드폰을 노려보더니 얼마 가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눈 아파···. 뭐, 내가 예민한 거겠지.”
그리고선 파일을 다운받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다지 길지 않은 파일의 스크롤을 내릴수록 우목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고, 부릅뜬 두 눈의 고동색 눈동자는 점점 분노에 휩싸여갔다.
이렇게 중요한 정보인데 왜 본부에 자료 보고를 안했지? 미쳤어··! 젠장, 이건 그냥 ‘무기’가 아니잖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우목은 입술을 깨물며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기운 없어 보이는 그의 걸음은 어딘가 심술을 부리는 듯 발끝이 위로 향해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쉽게 얻은 자료를 들고 다휘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