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씀은 설마…….”
“칼립이 있는 성으로 직접 들어가시겠다는 건가요?”
“그래. 그 방법 외엔 돈 있는 뱀파이어들을 만날 방법이 없어.”
“차라리 다른 방법을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로드!”
“저도 브리지트랑 같은 의견이에요. 너무 무모해요.”
“그럼 자네들이 의견을 내보게. 무슨 방법으로 돈을 가져오지?”
라티안스의 지적에 두 뱀파이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에게도 돈을 구해 올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을 하다 보면 라티안스가 말했던 것보단 덜 위험하고 안전한 방법이 있을 수도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럼 그 방법보다 나은 방법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래. 시간을 주지. 칼립의 성에서 열리는 파티가 있기 전까지 다른 방법을 생각해오지 않는다면 난 성으로 간다.”
“로드!!”
“그대들이 다른 방법을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중요한 파티를 놓칠 순 없어.”
“…….”
“그러니 날 파티장에 보내고 싶지 않다면 파티 전까지 좋은 방법을 생각하도록 해.”
반쯤 명령인 말을 내뱉고 라티안스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두 뱀파이어만이 허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바라봄과 동시에 한숨이 터지자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브리지트…. 맞나요? 그대의 로드는 항상 이런 식이신가요?”
“아닙니다. 원래 이렇게 무모하신 분은 아닌데……. 이번만큼은 꽤 무모하시네요.”
“아무래도 조급하신 모양이네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라티안스가 초조해하는 것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서두를수록 실수가 발생하고 놓치는 것들이 많아진다.
이럴 때는 급하더라도 천천히, 신중의 신중히 처리하여 일을 행해야 했다.
그래야 실수가 없고, 실수하더라도 무슨 실수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저희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서 말려야겠군요.”
“서로 좋은 생각이 나면 알려주죠.”
브리지트와 리키나 사이의 동맹이 결성 댔다.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자 라티안스는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거실로 나오자 먼저 일어난 뱀파이어들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지유는?”
“아직 주무시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러면 내가 깨우고 오지.”
라티안스가 지유가 잠들어 있을 방으로 향하자 리키나가 슬쩍 입을 열었다.
“사이 좋네요. 혹시 둘이 사귀는 사이?”
“아닙니다!”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두 분은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발끈하세요?”
리키나는 별 이상한 사람들을 본다는 눈으로 다른 뱀파이어를 봤다.
오히려 저렇게 발끈하니까 아니기보단 뭔가 있다는 느낌이었다.
리키나는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걸 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편, 지유의 방 앞에 도착한 라티안스는 문을 두드렸다.
“지유, 일어나. 아침이야.”
“…….”
“지유?”
문을 몇 번이나 두드렸는데도 방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라티안스는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들어갈게.’란 말을 하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지유의 모습이 보였다.
라티안스는 지유를 깨우려다가 너무 푹 자고 있는지라 깨우기 뭐했다.
“아침이야, 지유.”
라티안스는 전혀 깨울 생각이 없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깊게 잠든 지유에게는 당연히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라티안스는 지유의 곁에 다가가 침대 위에 살짝 걸터앉아 지유를 바라봤다.
잠든 얼굴이 꼭 아이 같아서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다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보고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치워줬다.
“…한 30분 뒤에 다시 와야겠군.”
이렇게 곤히 자고 있는데 깨우는 것은 역시 미안했다.
라티안스는 지유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방에서 나왔다.
라티안스가 방에서 나가자 눈을 감고 있던 지유가 번쩍 눈을 떴다.
“깜짝이야…….”
사실 아까 라티안스가 침대에 걸터앉을 때부터 깨어 있었다.
그러다가 라티안스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자 정말 놀라서 눈을 뜰뻔했다.
겨우 눈을 꾹 감고 있자 라티안스가 방에서 나갔다. 지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30분 뒤에 온다고 했지? 미리 씻고 나가야겠다.”
지유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라티안스였다.
라티안스는 머리를 닦고 있는 지유를 보며 웃으며 들어왔다.
“일어났나?”
“네, 좋은 아침이에요.”
“일어난 김에 몇 가지 이야기할 것이 있어.”
“뭔가요?”
“우린 며칠간 이곳에서 머물 거야.”
“이곳에서요?”
“그래. 그리고 칼립의 성으로 갈 수도 있어.”
“칼립의 성으로요?!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우리에겐 돈이 없어서 돈을 얻으려면 부자에게 돈을 받아야 해.”
“그 부자를 만나기 위한 곳이 칼립의 성이라는 거죠?”
“그렇다는 거지.”
“부자랑 만날 수는 있지만, 너무 위험해요…….”
“다른 뱀파이어들이랑 똑같은 말을 하는군.”
“위험한 상황은 마찬가지잖아요.”
“위험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여기서 며칠 머문다고 했죠?”
“그래.”
“그럼 며칠 머무는 동안 더 생각해봐요.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날지도 모르잖아요?”
지유의 말에 라티안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칼립의 성으로 가는 건 너무 위험한 방법이었다.
파티가 열릴 때까지 다른 방법이 없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칼립의 성으로 가는 건 마지막 수단이었어.”
어제 칼립의 성으로 꼭 가겠다고는 말했지만 이게 마지막 수단인 건 알았다.
하지만 파티 말고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라티안스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군.”
“그러네요…….”
“…그런데 정말 지유, 1주일 뒤에도 여기 남을 생각인가?”
“왜 자꾸 묻는 건지 모르겠는데, 저 여기 남을 거예요.”
지유의 단호한 태도에 라티안스는 기묘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여기 남을 거냐고 계속 물어봐도 지유가 머물러 있겠다고 말해주길 기대했나 보다.
“그대가 옆에 있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라티안스의 말에 지유의 양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옆에 있어 줘서 다행이란 말에 왜 이렇게 설레는 걸까.
왜 이 사람의 말에는 무엇하나 쉽게 흘려들을 수가 없는 걸까.
지유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니에요. 그냥……. 기분 탓이에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지만. 혹시 어디 아프면 꼭 말해.”
“네, 그럴게요.”
지유는 말하겠다고 했지만 도저히 말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의 사소한 한 마디에 이렇게 가슴이 뛴다고 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지유는 정체 모를 이 마음에 자꾸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간질거리고 따뜻하며, 당신에게만 설레는 이 마음은…….
‘이 마음이 뭔지…. 이제 알고 있어.’
자신은 라티안스를 좋아했다. 어째서일까, 별로 보지도 못한 사람을 이렇게 좋아하게 되다니.
지유는 슬며시 시선을 들어 라티안스를 바라봤다.
온 세상의 어둠을 끌어모은 듯한 흑발과 사람을 빨아드리는 듯한 붉은 눈.
차가워 보이지만 자신에게 향하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따뜻한 뱀파이어…….
“왜 그렇게 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언제까지 여기 있을 생각인가요?”
“칼립의 파티는 1주일 뒤에 열려. 그때까진 여기서 있을 거야.”
“그 파티에 설마 혼자 가실 생각이에요?”
“아니, 리키나의 병사 중 한 명을 데리고 갈 거야.”
“한명이요? 너무 적지 않아요?”
“그렇다고 군대를 다 데려갈 순 없잖아.”
라티안스의 말에 지유는 라티안스가 대담한 것인지 아니면 주의 깊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지내는 1주일 동안 라티안스가 생각한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나오길 기대해야지.
병사 한 명과 가기에는 칼립의 성은 너무나도 위험이 컸으니까.
곰곰이 생각하는 지유의 얼굴을 보던 라티안스는 작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대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걱정되는 걸요.”
라티안스는 걱정된다고 말하는 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지유는 고개를 집어넣으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상한 표정에 라티안스는 소리 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귀에 울리자 지유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싸우지 않고 이렇게 계속 평화로우면 좋겠는데…….
‘그러는 건 무리겠지.’
이 평화는 1주일 뒤면 깨질 평화였다. 라티안스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런 평화도 이상한 것이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어쩌면 이런 평화마저도 사치일지도 몰랐다.
지유는 자신이 이런 일에 휘말렸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1주일간 여기에만 있으면 지루하겠지.”
“…뭐 그렇겠죠.”
“그럼 1주일간 무엇을 하면 그대가 덜 지루할까?”
“제가 뭐하게 해달라면 하게 해줄 거예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