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은 한숨을 낮게 내쉬고는 아무도 없는 자리에 섰다.
그 옆에 서서 난 아까 지민씨가 한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말, 할수 있는 말일까? -
아직도 당신은 당신을 잘 모른다던- 그 말,
그러나 말을 먼저 꺼낸건 작약이었다.
"주변의 시선, 느껴져?"
그의 얼굴은 감정이 없어 보였다. 나는 조용하게 소근거렸다.
"다들 당신 얼굴 보고, 다음에 내 얼굴 보고 있는거요?"
그는 그 말에 더 없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저 중엔 분명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들도 있어- 아는 얼굴들 인데... 다가와서 인살 하는건 지민이 하나뿐이군..."
외롭게 들렸다. 이런 자리 싫댔으면서- 이런 자리.. 돌아 오고 싶지도 않았다면서-
"내가 하민이를 죽였다고 생각할 테니까-... 뻔뻔스럽게 느껴지겠지....."
그는 얼굴을 다 잡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위로라도 건내야 하나?
"알던건데- 지워지진 않나보다- "
그는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불안한 표정으로- 나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나와 함께 있는 시간 중 가장 멋진 그의 모습-
그리고 가장 , 꾸며진 나의 모습-... 우리 둘의 모습이 조화롭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당신이 없었으면 가능치 못했을꺼야-"
작약은 내 귀에 살짝 속삭였다. 표정은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달콤했다.
"고마워 정말로-"
그가 그 말을 마치자 강비서가 작약에게 다가왔다-
오늘의 강비서님은 어색했다. 늘 정장이긴 하셨어도- 풀 정장에다 아주 빠--짝 긴장이 든 모습-
농담하나 없고 웃음도 하나 없는 강비서님....
"저.. 작가님- 회장님이 찾으시는데요?"
작약이 나를 쳐다보며 괜찮냐는 식으로 눈짓했고 난 다녀오라고 눈짓했다. 그 자리에 그저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작약은 혼자 두기 불안하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까봐 불안한게 아니라-
주변 이들이 날 해칠까봐 불안해하는 눈빛이었다. 그는 날 무의식중에 보호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식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주 살짝- 그는 그제야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그러면서도 날 돌아보았다.
-
장하임을 혼자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돌아보자 저 용감한 여자는 태평스런 표정으로 가 보란 손짓을 한다.
이런 자리에서도 좀체 주눅들질 않는다. 주눅 들 까봐 걱정했었는데... 그건 기우였던 모양이다-
나는 강비서에게 물었다.
"왜 부르시는거 같은데...... 아직도 인사 할 사람이 남았데-?"
내 퉁명스런 목소리엔 대답치 않고 강비서가 중얼거렸다.
"하임씨를 혼자 두는게... 현명한 생각일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으려다가 대답했다.
"아버지 앞에 세워두는건 독수리한테 토끼를 맡기는 꼴이야- 어차피 나 때문에 아무도 접근 안할거야-....."
스스로가 박테리아 덩어리가 된것 같은 기분이다. 깔끔한 옷을 입었어도 난 이미 병균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느껴지니까-
처음 본 사람들의 눈빛이 문제가 아니다.
'아는사람' 들의 눈빛이 더 문제다. 그들의 눈엔 .... 그게 동정이던 , 혹은 환멸이든-
어디에나 기본으로 깔려있는건 분명하다...... '뻔뻔하네.....' 이 생각이라는게 뻔히 보인다. 이래서였다.
내 사랑을 곡해받고 싶지 않은...
그런 자만이 내게 있었던 거였다...
자만이 아니라 오만일지도 모르지- 내 스스로 들어갔으면서-
남들이 모르자 억울한 이 기분은...... 오만일지도 몰랐다.
내 사랑이 최근엔 저 여자때문에 .... 솔직히 흔들렸을 지언정- 그 사이 지켜온 것들이 있는데-
뻔뻔하지 않게 고갤 숙이고 맘 졸였던 시간을 .... 난 아버지의 은근한 협박 때문에 버려야 했다.
어떠한 인정을 바라는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당연했을 시간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지옥같던 시간에 대한-.. 이해는 조금 바랐는데............
뻔뻔하다고 생각하는 건.... 어쩔수 없이 내게 비수로 꽃혀왔다.
내가 참 괜찮아 보이나보다. 정말.....
정말, 괜찮아 보이나 보다-
다들 속아 넘어 가는구나... 다들-
"아버지-"
다가서서 낮게 말을 걸자- 아버지는 또 누군가의 팔을 잡고 계셨다. 누군지도 모르고
누군지도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날 바쁘게 인사 시키신다.
마지못해 하는 대답들 - 마지 못해 이어가는 이야기들-
신물이 나는 , 말도 안되는 - 서로를 높이는 듯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높이는 그런 이야기들-
인사를 하는 사람이 한참뒤에 끊기자 아버지는 엄한 목소리로 내게 넌지시 말씀을 해 오셨다.
" 녀석 ,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조금은 웃으며 인살 해야 하는거 아니냐? 사람 무안하게..."
나는 그 말에 이렇다할 대답을 하지 못한다. 뭐라고 할까... 반박은 반항으로 밖에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대답도 하지 않자 아버진 낮게 한숨을 쉬시곤 다른 이야길 꺼내셨다.
"하민이 어머님은 뵜느냐?"
안 오실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분은 아버지 셨다. 하지만 , 초대를 하신것도
아버지시니... 이 베베 꼬인 일에 대해 일언 반구 설명도 없이
그냥 납득하라는 것이다... 납득하고 , 받아 들이라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일들...
나는 분노를 누르면서 조용하게 대답했다. "아뇨
그 '아뇨' 에는 여러가지가 담겨 있었다. 내가 감히- 먼저 인살 건낼수나 있을까요-
그 가족은 날 아직도 미치도록 원망하고 있거든요-
하민이 어머님은 좀 다르실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원망은 원망이죠- 달라 지지 않는.......
이 자리에 나올수 밖에 없도록 종용한건 아버지가 하신 일이잖아요-
난 그저 원망을 담아 쳐다보는 것 외에 할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내 원망어린 시선에 아버지는 눈을 돌리셨다. 더 이상 볼수 없다는 듯이- 눈 꼬리를 내리시면서-
"먼저 인사 드려라-........ 이번에 나올꺼 예상 ... 하셨을지 모르겠다-"
그 말에 난 더 없이 낮게 대답했다.
"그럴수 있길 , 바랄 뿐이에요-..... 아버지 말씀대로 되고 있는지 저는 확신하기가 어렵네요-"
아버지가 약간 화가 나신 건지- 아니면 신중하게 대답하려고 하시는 건지 불분명한 목소리로 힐문해 오신다
"뭘 말이냐?"
"하민이 어머니한테 붙은 과녁을 저한테..... 옮긴게 맞는질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다들 절 피하고- 조금은 무서워하는거 같은데요- 뻔뻔스럽단 생각... 하긴 하겠지만 돌릴 정도가 될 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회장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고- 멍하니- 공허하고 무서운 , 자기가 늘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 사고 후엔 더욱 더 알수 없어
두려워했던 텅비어 보이는 -
너머를 알수 없게 되어 버인 그 눈이 파티장을 바라보는 걸 그저 대답 못하고 지켜본다- 아이의 가지런한 얼굴- 촘촘히 돋은 속눈썹 -
옆 얼굴은 아까 내게 독하게 말하던 제 어미를 똑 닮았다.
한숨쉬듯 말한다.
"니 행동에 문제가 있는거 아니겠느냐- 파트너를 다른 자리에 두고 오는 놈이 어디에 있어- 파트너랑 사이 좋아 보이면 간단한 일이지 않느냐?"
내 말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는 가지런한 눈을 바로 치켜뜬다-
"데리고 올 사람이 따로 있지-...... 그런 사이 아닌데도 기대 해서 하나하나- 의미 부여 하실거 아닌가요?"
싸늘한 목소리다.
"그런 사이가 아닌데 왜 데려왔느냐?"
"싫은 사이는 아니니까요-"
아이의 건조한 대답에 난 괜시리 마음이 헛헛해 억지라도 쓰고 싶은 기분이다.
"싫은 사이가 아니면 된거 아니겠느냐- 모두가 그렇게 시작하는 법이지-"
아이는 그 말을 듣자 날 경멸한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이를 밀어붙였던 뒤는 혹독했다. 아이는 적어도 전에는 날
약간의 존경은 담긴 태도로 보았으나 이젠 내게서 어떠한 기대도 어떠한 것도 바라지도 않는 다는 듯이
날 그저 건조하게- 쳐다 보라고 하니 어쩔수 없이 마주한다는 듯 한 태도였다.
"그런 실없는 소리 하실꺼면- 전 가봐도 될까요?"
"......흐음"
내가 뭐라 대답도 다 하지 않았건만 아이는 말 없이 돌아선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게 다른 사람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저분이 둘째 아드님이세요? 어쩜- 너무 잘생기셨네요..."
"허허..... 고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어째된게 말라서- 영 볼품 없지요.."-
"요즘엔 저런 분이 미남이죠-"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을 대화- 꽃같은 대화이긴 하나- 생화가 아니라 조화같이 인조적이다 못해 건조한 대화들
나는 말을 하면서도 그저 아들의 뒷모습만을... 눈으로 쫓는다.
-
지혁이 멀어지고 나서- 하임은 자꾸만 멀뚱멀뚱 눈알을 굴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혼자 서서 눈알을 멀뚱멀뚱 굴리고 있으면
작약이 날 두고 어디서 뭘 하는지 시선 닿을 일이 많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끊임없이 뭔가를 생각 하는 것처럼 자못 심각 한 표정으로
별 상관 없는 것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예상못한 아주 높은 목소리
인사를 건낸 여자는 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 사진으로- .... 작약이 경고 한 바... 있는 여자였다.
김희영이었다.
옆으로 넘겨진 머리- 어지간히 빨간색을 좋아하는 듯- 옆이 깊게 파인 적색의 드레스- 번쩍거리는 귀걸이까지
난 이 여자가 싫었다. 그냥 이유없이- 주눅이라기 보다는 ... 뭐라고 해야 할까
옆에 있으면 나까지 시뻘겋게 물들것 같아서 싫은 인상-
그녀의 빨강은 무서운 빨강이다- 내가 좋아하는 짙은 적색이 아닌
다홍에 가까운 빨강-
"네...."
더 말하기 싫단 맘을 담아 나는 최대한 불쾌한 표정을 숨기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여자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거리낌 없이- 내 앞에 아예 자리를 잡고- 묻는다-
"우리 본적 있는것 같은데.... 아닌가?"
여자는 생긋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끝이 벌써 짧다 예의는 어디 가져다 버린건지-
나는 그녀가 더 불쾌하라고 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기억 안나는데- 봤나?........
내 말을 듣더니 그녀는 더 방긋 웃었다.
내가 눈을 피하는 것을 어느정도 눈치 챈듯 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개의치 않았다.
"이런 곳은 처음일 텐데 , 첫 등장이 꽤나 인상적이던 걸요?-"
그 여잔 손에도 붉은 빛이 도는 음료를 들고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든 잔에서 보드카 냄새 비슷한 짙은 알콜향이 풍겼다.
그러나 여잔 전혀 취해 있지 않았다. 마지막 말은 내 눈을 보고 말하지 않았다. 마치 정해진 사실을 전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결정이 나 버린듯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 알수 없었다.
긴장하지 말자- 긴장하지 말자-..
난 계속 속으로 되뇌였다.
좀 멍청해 보이겠지만 되뇌여야 긴장감이 떨어질것 같아서 계속 되뇌인다-
나는 가볍게 들리도록, 최대한 힘을 빼고 대답한다-
"글쎄요- 또 올일도 없는데.... 뭐 무슨 상관 있겠어요-"
콧방귀를 슬쩍 뀌며 그렇게 대답했더니 그 여자는 내가 한 말을 가늠하는 듯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아주 순식간에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 그게 참- 쉽지 않답니다- 들어올땐 별거 아닌데.... 나가기가 더 힘들죠-"
그녀의 말은 짐작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나가기가 더 힘들거라고?
그녀는 갑자기 또 표정을 싹 바꾸며 살갑게 이야길 꺼낸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무례했어요.. 김 희영입니다- 마케팅 부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때는 자못 단정해졌지만- 그 순간에도 얼굴에 이상한 미소는 여전히 달라 붙어 있었다.
난 이 여자한테 이름을 말해주는게... 아니 어차피 알고자 하면 알게 되겠지만... 이름을 말해 주는 것이 현명한 생각인지 알수 없었다.
그러나 대답을 안하는 건 실례일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해야 했다.
"..... 장 하임 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잔으로 내가 손에 그저 들고만 있던 - 탄산수 잔에 살짝 잔을 부딫혔다.
그러곤 나를 면밀히 살폈다.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
테이블엔 단 둘뿐-
여기서 자리를 뜨면 좀 이상해 보일것 같았다. 그래서 억지로 참았다. 그녀는 궁금한게 한 보따리인 듯 했다,
".... 심 지혁씨랑... 친하신가요?"
그런걸 왜 묻냐는 듯한 시선을 던지자 그 여자는 능구렁이마냥 생글 생글 웃으며 , 자신에 질문에 부가 설명을 더 했다.
"꽤나... 다들 궁금해 했거든요- .. 형제인데 이사님은 항상 회사에 계시는 반면- 심지혁씨는 회사 근처에도 온 일이 없으시니까요-
그런분이 데리고 오신 여성분이- 이렇게 멋지신데 당연히 궁금증이 일죠-"
멋지면 그런 표정을 짓지 않는게 예의 아닌가-
난 속으로만 궁시렁 댔다.
그러고는 최대한 시큰둥 하게 대답했다.
"뭐... 일 같이하는 사이죠- 같이 갈래 - 뭐 이렇게 되서 잠시 왔죠.... 저도 이렇게 거창해 질줄은 몰랐네요-"
.........약간의 정적......
그 후에 여잔 말을 이었다-
"정말요?"
그녀의 정말요는 아주 짧고 숨을 내뱉는것 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그 말엔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박힌듯 따끔하는
뭔가가 있었다. 내 중심의 코어를 흔드는 뭔가가 , 날 왠지 순식간에 두렵게 만드는 어떤것이
".... 정말이죠 그럼, 뭐하러 다른 소릴 하겠어요- "
나는 그걸로 부족할것 같아 덧붙였다
"난 당신을 모르는데-"
내 말도 짧아지자 그녀는 재밌단 듯이 웃었다. 난 이 여자가 날 간파한단 생각에
맘이 몹시 더 불편했다.
"저는 안 그런거 같은데.... 앞으론 왠지 자주 마주칠것 같네요- 왠지 모르게요-"
이 여자의 친절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친절로 끝나는게 아닌거 같단 생각을 할수 밖에 없었다.
눈으론 알수 없는 다른 뭔가가 담긴 듯한 얼굴, 난 다른 대답을 못했다.
그때였다.
작약이 다가왔다.
작약은 왜인지,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매섭게 굳은 입매가 그건을 반증하고 있었다-
무서운 눈빛으로 내 한쪽손을 잡아서 살짝 자신의 쪽으로 당기면서 눈은 그 여자에게서 떼지 않았다.
그러곤 한참을 보다가 낮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죠?"
나는 걱정되었다. 작약이 너무나 감추지 않고 적대감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이상할 정도였다- 내 눈에도-
여자의 눈빛이 흥미롭단 빛을 띄어서 더 그랬다. 왜 이렇게 오버하는거야....
"아뇨... 그냥 인사한 것 뿐이에요- 안녕하세요-"
여자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김희영씨죠?"
작약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어떻게 이름을 알고 .. 계시네요-"
여자가 놀란 듯 하자 작약은 그제야 웃었다. 난 그 웃음이 이름만 웃음일 뿐 몹시 난 화를 억제하고 있음을 알았다.
작약은 지금 왠진 몰라도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나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어서 팔이 아팠다.
뭐 이렇게 손아귀 힘이 센 거야- 난 티나지 않게 살짝 빼려 했지만 택도 없었다..
"모를 수가 없죠...."
여자가 갸웃 하며 대답했다.
"영광이네요-"
작약은 한참 침묵하다- 생글생글 웃으며 결국 이야길 꺼냈다.
"무슨 이야길 하셨는진 몰라도- 형한테 말 하실꺼면 '팩트' 그대로 전하세요-
빙빙 돌려 전해서 또 날 찾아오면... 그땐 그쪽도 각오해야 할 겁니다-...."
생긋 웃으면서... 작약의 이런 얼굴은 처음 보는것 같았다. 감정을 잘 감추지만-.... 웃으면서 감추는 것은 처음 보는거 같았다.
작약은 늘 어둡게 사실을 감추는 편이었지 이렇게 생긋 방긋 웃지 않았었다. 그러나 입은 활짝 웃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그가 말한, 가식일까?
그도 ... 이런 면이 있었나?
지금 말 하는 내용은 협박인데 말이다.
"어머,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여자는 말만 '어머' 지 하나도 당황하지 않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혀, 1%도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난 심장이 터질듯 놀랐는데...... 이런 이야길 자기 입으로... 자기가 꺼내면 대체 어떡하자는 거야???
여자는 피식 웃었다. 그리곤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제가 느낀 그대로- 전하죠... 저도 알고 있어요- 이사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열등감 느끼시는거"
작약은 그 말에 콩 볶듯 읊조렸다.
"제가 아무리 회사에 없어도... 당신 한테 피해 주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에요-....
조심해요- 무슨 이야기든-.... 당신은 당신이 가장 똑똑하다고 느끼겠지만-
이 바닥은 출신지에 엄격하거든..... 배운다고 해서 배워지는 것은 아니지요- 아마 알겠지만- "
작약은 이 말의 말미쯤에 다시 살벌하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빙긋이 웃었다.
"그럼 반가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작약은 내 팔을 잡고는 남들 눈에 안 띄게 뒤편으로 날 데리고 나왔다.
이제야 당황한 듯한 여자는 그대로 두고서-
복잡한 뒤편의 , 가려진 문 사이의 복도-
거긴 넓은 복도와 바람부는 테라스, 그리고
화장실이 있었다.
작약은 남자 화장실 문을 열곤 칸칸이 누가 있나 확인 한 후 큰 문을 잠궜다.
모든게 순식간이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빨랐던가?
그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리곤 날 돌아보고 다그쳤다.
그의 목소리는 다소 다급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이미 이유는, 없다고 생각되는데도-
"저 여자 조심하랬잖아- 왜 거기서 이야길 나누고 있어! 불편하고 싫으면 피하기라도 하지 그랬어!
무슨 말을 듣고 있는거야!"
그에게 잡힌 팔목이 아팠다. 나는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대체 뭐야....
"나로는 안 끝나- 저 여잔 무슨 짓이든 형한테 가서 전할수 있어-
당신 가족, 친구- 탈탈 털어서 조사할수도 있는 이야기란 말야"
그의 목소리는 언성은 높지 않았으나 화가 난건 분명히 알수 있었다. 나는 한참만에 입을 뗐다.
"팔..... 아파요-"
....?
그 말에 작약은 그제야 놀란 듯 팔을 놓았다.
그의 팔이 놓인 자리엔 벌겋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걸 보고 그는 진심으로 놀란 듯이
말을 더듬었다.
자기가 그렇게 힘 주고 있었는 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배짱좋게 이야기 해 놓고 긴장은 자기 혼자 다 했었는지....
"진...진짜 미안해...... 이렇게 세게 잡은..줄...."
그러더니 수도가로 다가가 손 수건을 꺼내 물을 묻혔다. 그러더니 그걸 팔에 살짝 대었다.
나는 말 없이 그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갤 숙였다..
그리고 진정된 목소리로 또 그 말을 뱉었다.
"미안해... "
나는 약간 따끔 거리는 팔을 살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멍이 들것 같다-
"그말 싫댔잖아요..... 그리고 별 이야기 안 했어요-
그럼 그 사람 그리고 나 딱 둘있는데... 무슨 말 하면서 내빼요? 다른 사람도 다 모르는 사람인데
저기 아는 사람 있다 그러고 내빼겠어요 아님 당신한테 가겠어요? 빙글 빙글 돌리면서 이 질문 저 질문하길래 그냥 시큰둥하게
대답했어요- 그 사람은 말에 뼈가 그득했지만 난 안 그럴려고 애 썼다구요-"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말이 점점 삐딱해졌다. 도와주겠다 그런건 난데... 그러면 안되는데-
그가 화내는게 싫었다.
뭐가 제일 화나는 포인트였는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화가 난건 분명했다.
"근데 당신이 다 들켰어요- 알아요? .... 당신이 내 손목 잡는거- 그 여자 처음부터 끝까지 훑고 있었어요-
다 아무렇지도 않게 한 일인데- 왜 그랬어요- 왜....... 당신이 들키게 해요- 왜-"
그때였다.
절대 못 잊을, 순간의 일이........ 일어났다.
평생의 기억에, 아로새겨질 어떠한 기억-
말 없이 듣고 있던 그가 다시 내 손을 당겼다. 손수건이 땅에 떨어졌다.
무슨 일인지 알수 없었다.
그가 날 당겨서 안았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이 폭 잠겼다. 그의 향기가 났다.
진하디 진한 그 향기,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억할 그 향기가- 그는 내 어깨와 머릴 조심스레 감싸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나 그는 그렇게 나를 안고 숨을 죽였다. 그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깊고 깊게 잠겨서 심장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것 처럼 멀리 있을줄만 알았는데- 그의 심장소리는
생각보다 힘차게 내 귓가를 두드렸다.
빠른것 같지도 느린것 같지도 않았다. 그 소리는 내 맘도 착 가라앉혔다.
내 귓가에 있는 이 가슴이... 이 속에 있을 그 마음이 아프지 않길 난 진심으로 바랬다.
늘 이렇게 맘 졸이지 않길- 그러지 않길........
그저 말을 잃고 우린 서로에게- 귀 기울였다. 들리는 것만 같은- 말로 뱉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걸려 있어서-
혹은 너무 많은 것들이 누르고 있어서
뱉기엔..... 아깝고 아쉽고
아픈 그 이야기들이.... 들리는 것만 같아서-
...........
아주 한참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팔은 풀지 않고 , 그저 말했다.
"미안해.... 이 말 싫어하는거 아는데...... 이 말.... 해야되서... 그것도 미안해................
그래, 니 말이 맞아- 내가 들켰어..... 내가 그랬어.....
널 혼자둬선 안됐는데- 멀리서 당신이 보이는데-......
앞에 그 여자가 있잖아.... 그래.... 그냥 그렇게 대처하면 될 일인데..
당신 말 대로- 진짜 별일 아닌데....
그 여자가 어떤 여잔지- 들었었으니까,
형 보다- 더 이간질을 잘 하는 여자란, 이야길 들었었거든.... 언뜻이었지만....
그렇다보니까.......
순간적으로 이성이 멎었어-..... 차 앞에 애 놔둔 사람처럼 머리가 멎었어-
아무 생각도 안 났어-
그래서 화가 났어- .... 뭐때문에 그랬는진 모르겠는데...... 그랬어-
너무 화가났어.... 미안해...."
그는 내 머릴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을 볼수 없는게 난 좀 아쉬웠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이라도 봐야 확실히 알수 있을것 같애서
그의 목소린 그 답지 않게 너무나 애틋했다.
난 왠지 눈이 뜨거웠다- 꽉 잡힌 팔보다도 더- 그의 품 속이 따뜻해서- 처음엔 닿는것도 질색하던 그가
날 먼저 이렇게씩이나 꽉 안은게 믿기지 않기도 했다.
"당신때문에 들켰으니까-.... 당신이 수습해요 알았죠?"
난 바보같은 소리나 중얼거리는 멍청이였다. 이 품에 내가 대체 얼마만에 안겼는데- 겨우 이까지 닿아놓고
바보같이..
그가 아주 조금, 아주 살짝 웃었다. 웃으니까 가슴의 낮은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떨림에
내 얼굴이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붉어졌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모양 좋은 코로 가슴에 들었을
그 숨이 , 내게 닿은 품을 오르내리게 하는 그 숨이
왜 이렇게 설레이는지.....
.....
수없이 많은 지구상의 생명체 중에서
숨을 쉬지 않고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는데
당신의 가슴에 드는 그 숨 한줌이 내게 왜 이렇게도 큰 의미인지
왜 이렇게도, 와 닿는 숨인지...
왜 이렇게, 특별한지.....
그가 날 놓아주지 않길 바랬다. 적어도 지금만은-..... 내 얼굴을 보지 않길 바랬기에-
그러나 그는 그 타이밍에 맞춰서 날 놓았다. 그리곤 머쓱해했다.
"그래.. 그럴게- "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본다. 그의 눈- 얼굴이 이렇게 가까이에-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는데
...
이런 사랑은
내 세상에 다시 없을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자신의 손수건을 주웠다. 그리곤 다시 그걸 씻어 물을 적신 뒤 내게 건냈다-
다시, 그 다운 얼굴로
"팔 진정시키고- 천천히 나와-.. 여긴 어차피 멀어서 사람 잘 안와- 나 먼저 나가있을게
나오면 곧장 나한테로 와..... 알았지?"
그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했다.
난 아직도 얼굴이 뜨거운데- 너무나 말간 그 얼굴이 살짝 얄밉게도 느껴졌다
그는 내 얼굴을 또 잠시 바라보다가 먼저 문을 살짝 밀어닫고 나갔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난 히죽 웃었고- 그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우리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생각한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를 떠올린다-
짜증이 가득하던 그 얼굴- 나와 마주 볼 일도- 평생.... 안길일 따위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그와
나는 이만큼이나 가까워져 있었다.
그의 숨을 내 숨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웃었다. 웃을일이 아닌데- 그의 말 처럼 난 이제 큰일 난 걸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은 못하고
그저 웃었다.
환하게- 웃었다. 소리를 죽인채로-
그렇게 멍청할 수가 없는데도-
계속 웃음이 났다.
-
나는 문을 살짝 밀어 닫고 문에 기대어 섰다. 어두운 복도-
살짝 웃다가 얼굴이 다시 굳는다- 생전 웃어 버릇하질 않아서- 웃음은... 그저 내 입가에서 나오질 못하고
한참을 뒤를 돌아보는 것 처럼 입가에서도 망설인다. 보는 이가 없다고 해도-.....
후회하진 않는다.
그 말을 혼자 속으로 되뇌여본다.
이상하게도 저 여자 앞에선 본능이 먼저 움직이는 순간이 많다.
말하지 말아야지 하면 말하게 되고-
안지 말아야지 하면 안게되고-
웃지 말아야지 하면 웃게되고-......
언제나 날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
감히 상상도 못한 방향으로-
영원히 다신, 갈일 없을꺼라- 멀리 멀리 떠나온 곳으로-
자꾸만 돌아온다- 천천히 계절을 걸어서 그렇게........ 돌아온다-
나는 다시 다리에 살짝 힘을 준다- 그리고 어둡고 써늘한 복도를 걷는다-
이쪽 복도는 사람이 올 일이 없다- 화장실은 반대 쪽에 더 큰것이 있고-
게다가, 이 복도는 불빛이 없어서
사람들은 나왔다가도 아마- 다시 들어갈 것이다. 길을 잘못 들었나 해서-
그런데 그 복도의 끝에서- 익숙한 걸음이 보였다.
익숙한 인상의 여자분이... 걸어오고 있었다........
쿵............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하민이 어머님이- 걸어오고 계셨다. 혼자서-...
내가 잊을수 없는 얼굴,
내가 거역할수 없는, 얼굴....
나는 자리에 멈췄다. 더 걸을수도 없어서- 어차피 마주하게 될 것을 알았으면서- 인사도 드려야지... 이제
내가 대신 그 총알은 맞아 드려야지- 이제 괜찮게...... 해 드려야지 하고서도-
이토록 놀랄수가 있을까,
이토록 날카로운 순간이 있을까..
나는 방금전의 천국에서 지하까지 텅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목덜미에 아찔한 땀이 배어났다.
긴장을 너무 해서, 목까지 꽉 조여오는 나와 달리,
하민이 어머님은 이렇다 할 눈빛없이 다가오셨다.
평안한 , 표정이셨다.
다가서서 말을 먼저 꺼낸 분은 어머님이셨다.
"오랫만.... 이구나 지혁아, 이렇게 얼굴을 보는건-"
단정한 목소리 - 나는 손도- 얼굴도 저렸다. 피가 통하지 않는 기분-
난 어둠속에서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밖에서 비쳐오는 빛에 그분의 얼굴만을
응시 할 뿐이었다.